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이 Aug 14. 2022

반지하의 햇살


낡은 단독주택을 허물고 그 자리에 3층 집을 지었다. 스무 해도 더 전, 다가구 주택이 유행할 때였다. 오래되고 조용한 주택가가 하나둘씩 차례대로 다가구, 혹은 빌라로 변모했다. 

다가구주택은 반지하 세대를 만드는 게 필수였다. 애초에 주거난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주거 형태이기 때문이었다. 옥탑방은 원래 물탱크실로 설계되어 나중에 방으로 용도 전환되지만, 지하는 처음부터 주거용이었다. 그것도 평수에 따라 최대한 잘게 나눠야 했다. 전세금을 받아서 건축비를 해결하는 목적이었다.



옛날엔 지하실은 고작해야 연탄창고나 보일러 실이었는데 그게 세를 놓는 집이 된다는 거였다. 모두 집이 부족하고 비싼 서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선지 집이 완공되자 반지하라도 전세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신혼부부, 중년 부부, 노부부, 아들까지 세 식구인 세입자도 있었다. 그들은 돈이 많지 않다는 점과 가정이 화목하지 않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같이 이사를 와선 계약기간이 끝날 땐 남남으로 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은 지하에서 부부싸움이 유독 맹렬하게 일어났다. 한밤중까지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뭔가를 부쉈는데 그 충격이 옥상의 내 방까지 전해졌다. 부부싸움의 태반이 돈 문제 때문이 라지만, 반지하에서는 유독 그 점이 더 강력하게 작용했다. 반지하라는 그 음울한 단어는 그곳에 사는 사람의 인생까지 좌우하는 것 같았다. 그게 반지하라는 환경이 조성하는 것인지, 반지하를 찾는 사람에게 내재된 운명인지 알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반지하를 포기하게 된 건 침수 피해 때문이었다. 어느 해 여름, 밤부터 예고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하방 현관문 앞에는 평소 하수구 마개가 있는데 비가 많이 오면 막히지 않도록 마개를 아예 빼놓아야 한다. 하지만 반지하가 처음인 젊은 부부는 그런 상식이 없었고, 집주인인 엄마는 단속하는 걸 깜빡 잊었다.

다음 날 새벽, 얕은 현관 턱 때문에 셋집 안까지 물이 들어왔고 부부는 경악을 했나 보았다. 이른 시간에 우리 집까지 쳐들어온 부부는 엄마를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아붙였다. 그런 집에 어떻게 세를 주느냐, 물이 들어오는 집에 살 수 있겠냐, 는 그들의 항의에 우리 집은 죄인이 됐다. 결국 반지하에 세를 놓는 건 도리가 아닌가 보다, 는 결론에 이른 후 그 집은 비워놓게 됐다.     

 


“방세 곧 드릴 게요. 며칠 있다가요.”

공주가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그러자 김 씨가 분무기를 들고 화분에 물을 주는 척 공주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 뭐 내가 너한테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 걱정돼서 하는 소리지. 식구라고는 너랑 네 아버지 둘 뿐이잖니. 쯧쯧. 그래, 아버지 들어오시면 내가 좀 보잔다고 해. 가 봐라.”

(동화 소나기밥 공주 P39) 



6학년 공주는 월세 반지하에서 가난한 아빠와 단 둘이 산다. 엄마는 집을 나갔고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아빠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다.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재활원에 수용되면서 반지하 집에 남겨진 공주는 혼자 생활을 감당해야 한다.  

계급의 구조는 피라미드 형인데 주거 조건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부유하고 높은 사람일수록 꼭대기에 살고 가난한 서민은 바닥으로 내려간다. 지하, 혹은 반지하는 땅 위를 기는 지렁이 같은 벌레처럼 사람이 살면 안 되는 형태로 혐오된다. 그래도 지하에 사는 사람은 결국 땅속의 벌레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역대급이라는 올 해의 장마는 지루하게 길고 상처도 크게 남겼다. 서울에서 물난리로 인명사고가 났는데 하필이면 반지하에서였다. 동네가 물에 잠기자 반지하 창문으로 넘어 들어온 물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전국에는 30만이 넘는 반지하 가구가 있고 그중 20만이 서울에, 그중 대다수는 월세라고 한다. 

동네 이곳저곳에는 여전히 잘 살고 있는 반지하 가구들이 있다. 우리 집은 조건상 응달지고 습기가 많이 차는 위치지만, 도로 쪽으로 건물이 나 있어서 햇볕이 잘 들고 번듯한 집들도 있다. 반지하를 사람 못 사는 곳으로 묘사하는 요즘 분위기 때문에 심란에 빠진 이웃들이 분명 있을 듯싶다. 

왜 이리 집이 컴컴하고 습기 차냐고 항의하는 세입자 앞에서 우리 집은 반지하를 아예 세놓지 않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지하라는 조건이 갖는 어두움과 눅눅함, 불결함과 누추함이 그들의 불행에 일조할까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반지하를 아예 없앤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반지하가 필요한 사람들이 더 안전하고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해결책이 절실하다는 걸. 



반지하의 그늘이 드리워진 어린 공주에게 햇볕이 든 건 주변의 관심과 도움 덕택이었다. 비록 집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공주가 버틸 수 있는 원조와 보호가 이웃들로부터 제공됐다. 공주가 만약 힘들었다면 그건 반지하라는 집 때문이라기보다는 반지하 같은 막막함과 고립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지하에도 누군가 산다. 그들은 아직까지 반지하가 필요하다. 반지하가 처한 문제를 반지하를 없애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반지하를 백안시하지 않고 같은 공동체의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관심이 더 필요하다. 그래야 반지하에 햇살이 든다.    




사진: 픽사베이 Susbany님의 이미지 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이라는 감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