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는 아름답다
거실 테이블에 놓인 바나나가 사놓은 지 오래된 것 같다. 밤색 반점이 얼룩덜룩 생긴 게 꼭 표범 등허리 같다. 미술 작품처럼 독특하게 변해서 먹기보다 감상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온 가족의 간식이라 늘 떨어지지 않게 사다 놓는데, 어쩌다 다른 먹거리에 선순위를 뺏길 때 바나나는 바나나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버린다.
위궤양이 있는 엄마는 새벽녘에 갑자기 허기를 느낄 때 바나나만 한 것이 없다고 하신다. 당뇨약도 먹는 처지이므로 칼로리나 당도가 높은 음식 대신 다이어트 식품인 바나나가 제격이다. 아버지는 바나나가 최애 과일은 아니지만, 마치 어린아이처럼 바나나 하나만, 하며 먹고 싶어 하실 때가 있다. 바나나가 귀했던 과거 향수 때문에 더 애착을 갖고 계신 것이다. 나에게는 가끔은 바나나를 대할 때 어떤 양가감정 같은 것이 생겨난다.
“과일은 원할 때 마음껏 드시나요?”
올여름 동네 보건소에서 파견된 조사원이 우리 집 거실 소파에 앉아 그렇게 물었다. 해마다 보건의료사업과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지역 보건소에서 조사원이 방문해 설문지를 작성한다는데 그 대상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가구 수입을 직접적으로 묻는 문항도 있었지만 ‘치과 치료를 미루지 않고 받느냐?’와 같은 질문을 통해 그 집안의 생활 수준과 형편을 에둘러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진 ‘과일’에 대한 물음 역시 같은 맥락인데, 왠지 그 단순한 질문 뒤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과일을 실컷 먹느냐, 일주일에 몇 번이나 먹느냐는 물음에 주저 없이 ‘매일’이라고 답했다. 사실 과일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나와 달리 아버지는 후식으로 꼭 과일을 먹어야 하고 못 먹고 자란 한이 있는 것처럼 과일을 즐기시는 편이라 엄마는 늘 식비보다 과일비가 더 든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조사원이 ‘과일’ 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사실 거실 테이블에 늘 놓여있는 저렴한 수입 바나나였는데 그녀가 의미했던 것은 ‘샤인 머스켓’이나 ‘겨울딸기’ 같은 값비싼 과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뒤이어 들었다.
사실 우리 집은 누가 선물해 주기 전에는 여름에 수만 원이나 하는 수박을 잘 먹지 않고, 샤인 머스켓 가격이 과잉생산으로 폭락하기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니 우리 집에서 가장 만만한 것은 오며 가며 사 오는 값싼 수입 바나나였고, 그것이 때때로 외면받아 갈색으로 썩어가도 무관심할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바나나는 과일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더 이상 과일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이 바나나였고 바나나를 실컷 물리도록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바나나가 너무 흔하고 값싸서 천덕꾸러기가 되었으니 격세지감이 있다.
하지만 바나나는 과일이기를 포기할 때 더 많은 쓰임이 있다. 싱싱하고 덜 익은 바나나는 풋풋한 맛으로, 잘 익은 바나나는 특유의 단맛이 좋아서 먹지만, 너무 익어서 물러터져도 갈아서 주스나 아이스크림으로 만들 수 있다. 특히 빵을 만들 때 적당한 부재료가 없으면 바나나처럼 유용한 것이 없다. 바나나를 넣고 만든 카스텔라나 인절미는 달콤하고 향기롭다. 그러므로 바나나는 여전히 표범처럼 아름답고 이국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