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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이 Dec 28. 2024

미국식 콩나물 무침

처음 배운 요리

비싼 물가 때문에 장을 볼 때마다 놀란다. 약 2년 전부터 슬금슬금 오르던 물가가 요즘은 아예 고질병이 됐다. 이제 시장에도 2천 원 미만 채소는 없고, 온라인으로 장을 보는 마트에서도 클릭만 하면 무조건 5천 원이다. 

“다른 사람들은 뭘 사요?”

“콩나물... 두부... 그런 거죠.”

동네 입구 작은 슈퍼 주인에게 물었더니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과연 들어오는 사람마다 가게 구석 냉장 쇼케이스로 향한다. 손에 들려 있는 건 모두 콩나물, 그런 따위의 값싼 부식들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장바구니에 콩나물을 두 개씩 담게 됐다. 홈플러스 시그니처 무농약 콩나물이다. 줄기가 통통하지 않고 가늘며 반투명한 게 내가 좋아하는 콩나물 스타일이다. 그걸로 게맛살, 오이를 채쳐 콩나물 냉채도 하고 잡채에도 넣고, 간 돼지고기 조금 넣고 두반장과 함께 볶아주면 중화식 콩나물 볶음이 된다. 

하지만 역시 콩나물 하면 콩나물 무침, 그것도 고춧가루, 마늘, 파 듬뿍 넣어 빨갛게 무친 콩나물 무침이 최고고 내가 제일 많이 하는 반찬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깨달은 게 있다. 콩나물 무침은 바로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배운 요리였다.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게 콩나물 무침이잖아.”

뜻밖의 말에 언니의 얼굴을 다시 봤다.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 가 스무 해 넘게 산 언니는 내 눈에는 미국 사람 같았다. 피부도 하얗고 눈동자는 옅은 갈색이고 머리색도 노랬다. 말하는 것도 사근사근, 영어 악센트가 섞인 한국말이 폼나고 세련됐다. 그런데 언니는 콩나물을 무치고 남은 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 게 제일 맛있다고 했다. 


나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녀보겠다고 야심 차게 태평양을 건너간 스무 살 짜리였다. 순전히 오래전 미국에 터를 닦은 친가 쪽 친척들을 믿고 저지른 모험이었다. 듣던 대로 미국에서 성공한 고모네 집은 영화 속에서나 보던 꿈의 저택이었다. 차고를 두 개 거느린 커다란 하얀 이 층집 뒤편으로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이 감춰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집에 사는, 피아노를 전공하고 미국 사람처럼 영어를 잘하는 나보다 대여섯 살 많은 사촌 언니는 당연히 동경의 대상이었다.


“네 고모는 정말 음식 솜씨가 좋아. 언니도 고모한테서 배웠으니 당연히 그렇겠지.”

어른들이 하던 말처럼 언니는 결혼하기 전부터 못하는 요리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나를 만나자마자 자연스럽게 요리를 가르쳐 주려고 했다. 

수십 년 전 미국에는 한인 마트가 요즘처럼 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콩나물이니 배추 같은 한국 채소를 아무렇지 않게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다. 국산 전통 참기름이 수입이 안 돼서 인도산 참깨를 쓴 대용량 참기름을 쓰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리고 나는 금세 왜 고모나 언니가 하는 음식이 맛있는지 비결을 알아차렸다. 참기름도 듬뿍, 비싼 고춧가루도 듬뿍, 깨도 철철, 뭐든지 재료를 아끼지 않으니 당연히 맛이 있을 수밖에. 

사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그랬다. 뭐든지 풍성하고 여유로웠다. 차도 크고, 스테이크도 크고, 사람도 컸다. 설탕과 지방을 아끼지 않아서 먹는 것마다 기름지고 달고 고기가 듬뿍 들어갔다. 


언니는 콩나물을 한 냄비 데쳐서 커다란 볼에 넣고는 온갖 양념을 넘치도록 넣고 무쳤다. 하지만 나는 시큰둥하게 서서 구경꾼처럼 바라보기만 했다. 주방에서 반찬이나 배우려고 돈 들여 미국까지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팽팽했다. 

언니가 나에게 직접 해보도록 하고는 잘한다며 추켜세워주는 것도 별로 고맙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요리 등 갖가지 살림에 푹 빠져 사는 언니의 모습은 전혀 멋지지도 미국적이지도 않았다. 

나는 인생의 출발점에 서 있는 스무 살이었고, 미국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누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국에 왔다고 미국 사람도 아니면서 미국 사람처럼 행동하고, 미국 사람보다 더 미국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그런데 미국 사람이면서 가장 한국적으로 사는 언니의 모습은 모순되게 보였다. 마치 미국식 콩나물 무침처럼. 음식 천국 미국에 살면서 촌스럽게 콩나물 무침 따위에 꽂혀 있다니.


 어느덧 젊음은 퇴색되고 인생의 전성기마저 흘려버리고 쓸쓸한 가을날 같은 생을 마주하는 나이가 됐다. 요리는 주부나 하는 거라고, 내 앞에 드라마 같은 레드 카펫이 깔려 있을 줄 착각했던 시간은 애초에 갔다. 이제는  매일 같이 새벽에 일어나 주방에 서서 채소를 다듬고 반찬을 만드는 것이 일과가 됐고 때론 지치지만 그 속에서 작은 즐거움을 발견하려고 애쓰며 살아간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본 내가 만드는 콩나물 무침은 그래서 무심한 듯 단순하다. 콩나물을 씻어 도자기 볼에 담은 후 마늘 한 숟가락, 다진 파, 소금, 참기름, 고춧가루를 넣고 전자레인지에 3분쯤 돌린다. 꺼내서 콩나물 대가리가 익었는지 본 후 잘 뒤섞어 주고 1, 2분 정도 더 돌린다. 


 스무 살 때 처음 배웠던 미국식 콩나물 무침의 강렬한 인도 참기름 맛과 넘치도록 씹히던 통깨의 맛을 아직도 기억한다. 하지만 내 식의 소박한 콩나물 무침 맛도 그런대로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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