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혈관을 흐르는 커피
최고급 에티오피아산 스페셜티 원두를 손수 갈아 커피를 내리니 고소하고 달콤한 커피 향이 집안 가득 퍼진다, 와 같은 모닝 루틴은 오늘도 없다. 대신 탕약처럼 시커먼 맥심 커피 한 주전자를 만들며 하루를 시작할 뿐이다.
여름이면 겨울을 그리워하고 겨울이 되면 여름이 그래도 낫다 싶다. 여름에 일찍 일어나던 버릇을 못 고쳐 엄동설한에도 새벽같이 눈이 떠진다. 해가 뜰 기미라곤 보이지 않는 시간을 아침이라 부르며 거실 창문을 여니 하늘도 꽁꽁 얼어붙어 시린 바람만 휭휭 분다.
그때 역시나 컴컴한 골목에 불 켜진 앞집 창가가 눈에 들어온다. 흐릿하게 새어 나오는 조명이 조금이나마 골목에 온기를 퍼트려준다. 그 따스함에 끌려서 조금 오래 창가에 버티고 서본다.
앞집에는 아이가 없는 젊은 부부가 산다. 벌써 이사 온 지 5년쯤 됐는데 주택 2층인 우리 집에서 보면 마당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골목 하나를 우리 집과 나눠 쓰는 관계로 주차 문제 때문에 서로 은근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선지 적당한 거리를 두며 골목에서 마주쳐도 모르는 척 데면데면하게 산다.
앞집 부부는 외관상 자유분방하고 개인주의를 즐기는 사람들로 보였다. 대형 suv를 몰며 늦은 밤에나 외출하고 배달 오토바이가 수시로 드나들지만 정작 음식 쓰레기통은 보이지 않는 집. 아이 대신 개를 키우고, 마당에는 고양이 급식소를 만들어 동네 비둘기, 참새까지 모두 불러들이는 집. 그리고 그렇게 모여든 동물들 가운데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서서 유유자적 담배를 피우는 부부.
나는 막연히 그 부부가 예술계통에 종사하고 있다고 짐작했는데 내가 관찰한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뿐 아니라 이사 올 때 짐 중에 석고상을 보았고 빈티지 가구가 유독 독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차는 노상 마당에 주차돼 있고 출퇴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므로 그들은 혹시 일명 ‘욜로족’일까, 나는 온갖 추측을 펼쳤다.
어느 날, 우연히 일찍 일어나 거실 창을 열었을 때 나는 앞 집의 골목 쪽 작은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정확히 5시경, 그 불 켜진 창은 시계처럼 언제나 주 5일 일정했고, 주말에는 늦잠을 자는 것처럼 어두컴컴했다.
미라클 모닝이라도 실천하는 건가. 어떤 학자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대변보고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시작한다더니. 그들도 혹시 새벽 5시에 능률이 가장 잘 오르는 바이오 리듬을 가진 걸까. 나처럼 그들도 새벽 일찍 일어나 홀로 고독한 하루를 시작하는 비장한 생활인인가.
언제나처럼 나만의 상상 속에서 드라마를 써갔다. 갑자기 일찍 일어난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그 루틴을 꾸준히 지킨다는 이유로 앞집 사람들에게 확 친밀감이 느껴졌다.
앞집 부부가 쌀쌀맞고 개인의 취향을 추구하는 요즘 커플일뿐 아니라 생계를 위해 분투하는 생활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단잠에 빠져 있을 첫새벽에 홀로 일어나 무언지 모르지만 묵묵히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을 괜히 눈앞에 상상해 보면서.
그러고 있자니 이제 앞집 너머 4층 다세대 맨 꼭대기 층도, 골목 첫째 집 반지하 방 창문도 하나둘씩 훤해지기 시작하고 하얀 불빛들이 점점이 창문을 밝힌다. 오늘도 찬바람 쌩쌩부는 세상으로 나서기 위해 모두들 깜깜한 시간에 일어나 무거운 눈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모두가 합심해 시린 겨울 새벽을 떨치려고 하는 모습이 왠지 감동적이다.
창을 연 김에 냄비에 정수된 물을 붓고 펄펄 끓인다. 유리 주전자에 인스턴트 가루 커피 맥심 오리지널을 털어 넣는다. 뜨거운 물을 붓고 휘휘 저어주자 크리마가 올라오며 금세 밤색 커피 한 주전자가 뚝딱 만들어진다. 실내는 구수한 보리차 냄새 같은 커피 향이 넘실거린다.
한때 그라인더와 드리퍼를 사놓고 원두를 종류별로 구입해 한잔씩 내려 먹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덧 아침이 오면 끙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켜 무조건 진하고 쓴 커피를 꿀꺽꿀꺽 넘기는 사람이 됐다.
뱃속에 뜨거운 커피가 콸콸 들어가자 혈관 속에서 강렬한 에너지가 팽팽 돌기 시작한다. 잔뜩 만들어 둔 유리 주전자의 커피는 저녁이 되면 다 동난다. 섬세하거나 고급스러운 취향은 옛날에 포기하고 무조건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줄 강력한 카페인, 그 외에 내가 커피에게서 바라는 것은 없다.
오늘도 맥심 오리지널 커피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