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는 뒤늦게 온다
가을이 되면서부터 부모님의 친지들이 보내주는 농산물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손수 키운 배추로 담근 김장 김치, 고향 특산품인 산나물과 감자, 그리고 ‘이천 아저씨’가 농사지은 고구마까지. 모두 택배 기사들이 기피하는 한 무게, 한 덩치 하는 박스들 뿐이었다.
나 역시 그런 선물들이 다 반갑지는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고령의 부모님들 대신 집에서 힘쓰는 일은 모두 내 차지가 됐기 때문이다. 최소 10킬로 이상 되는 육중한 박스를 풀고 부모님에게 보여드린 후 마당 뒤꼍의 서늘한 곳이나 냉장고 안으로 옮기느라 낑낑댔다.
운반과 보관 후엔 그것들이 상하지 않도록 신경 써서 썩기 전에 제때 먹어치우는 것까지 모두 부담스러운, 내겐 선물 이전에 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천 아저씨의 고구마가 배달된 늦가을 어느 날도 그런 기분으로 상자를 열었다.
고구마는 돌덩이처럼 큰 것부터 엄지 손가락 만한 것까지, 모양도 먹기 좋게 튼실한 것부터 인삼처럼 생긴 것까지 각양각색이었다. 품종도 보라색, 주홍색, 노란색 종류별로 들어 있는 게 마치 버리는 것을 한데 모아놓은 것 같았다.
이천 아저씨는 엄마의 옛 고향 동생인데 은퇴한 후 시골로 귀촌해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며 취미로 농사를 짓는 분이었다. 그러니까 고구마가 그렇게 상품성이 떨어지는 건 파는 게 아니라 직접 키운 걸 보내주셨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구마는 한 해는 호박 고구마, 다른 해에는 새로 나온 황금 고구마를 심어 봤다며 마치 실험이라도 하듯 이것저것 시도하시곤 했다. 그래놓곤 정작 먹을 사람이 없다며 수확을 하면 모두 쓸어 담아 아는 사람들에게 보내주셨다.
“누님, 고구마 맛 어때요? 비료를 안 줘서 못난이만 보냈는데 그래도 괜찮죠?”
“아직 안 먹어봤어. 근데 어떻게 지내? 나이도 많은데 이제 농사 좀 그만 지어.”
자식은 해외에 살고 상처한 지 오래라 소일거리로 하는 거라고, 안 그러면 땅을 놀리겠냐고 꿋꿋이 고집하시는 아저씨였다. 그러면 받기만 해서 미안한 엄마는 나를 시켜 아저씨에게 가끔 곰탕이나 찐빵 같은 먹을거리를 답례로 보내주게 했다.
역시나 건강 때문에 거동이 쉽지 않아 엄마와 아저씨의 소통은 대개 전화로 이뤄졌다. 주로 고향에서 한 동네 살 때, 서울에 올라와서 학교 다닐 때, 외갓집과 한 집안처럼 지낸 젊었을 적 이야기로, 노년에 접어든 아저씨는 흘러간 옛일을 나눌 수 있는 얼마 안 남은 친지였다.
그나마 최근엔 엄마의 귀가 나빠져 한번 통화라도 할라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가능했다. 화제도 어디 아프다는 이야기 밖에 없는데도 아저씨는 그 마저도 그리운 듯 불쑥불쑥 안부 전화를 걸어왔고 그때마다 엄마는 반가워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을 만난 건 몇 해 전으로 그나마 엄마가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기 전 겨우 시내에 나가 얼굴만 보고 돌아온 게 다였다.
“누님, 아직도 고구마 안 먹었어요?”
그날도 또 이천 아저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지만 어쩐지 휴대폰 밖으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그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얼마 전에 차를 몰고 가다 트럭과 교통사고가 났다고, 치료하고 퇴원했는데 아직도 영 몸이 좋지 않다고.
엄마는 안타까워하며 몸조리 잘하라고 다 나으면 만나자고 언제나처럼 인사를 건넸다. 통 외출을 하기 힘들어하는 엄마에게는 입에 밴 인사였지만, 허투루 하는 말은 아니었다.
고구마는 뒤꼍에서 손도 안 댄 채 그대로 있었다. 7월 초부터 시작된 폭염은 가을까지 사그라들 줄 몰랐다. 긴 여름 동안 음식을 하느라 열기와 싸운 나는 뒤꼍에 고구마가 썩어가든 말든 손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고구마를 철수세미로 깨끗하게 씻고 찜기에 올려 찌고 어쩌고.. 한 30분은 불옆에 서 있어야 할 텐데..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전자레인지로 고구마를 찐다는 영상을 봤다. 우묵한 그릇에 물을 좀 넣고 고구마를 반씩 잘라서 돌리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오직 가스불만 신봉하는 엄마는 불신의 표정이 역력했다. 고구마는 정말 5,6분 전자레인지에 돌리자 감쪽 같이 익었다. 고구마 크기가 적당히 아담해서 더 잘 쪄진 것 같았다. 고구마 찌기가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더 빨리 해 먹을걸 후회했다. 매끼 밥하기도 힘든데 고구마로 때울걸. 이제부터 열심히 먹어서 빨리 다 해치워야지 생각했다.
“이상하네. 얘가 전화를 안 받네.”
이제야 고구마 잘 먹었다고 엄마는 고마움에 전화를 걸었지만 웬일인지 아저씨와 통화가 되지 않았다. 바쁜 일이 있나, 병원에 갔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엄마는 계속 통화 버튼을 눌렀고 마침내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낯선 목소리에 멈칫하던 엄마는 잠시 후 창백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아저씨는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병원에 다시 들어갔는데 그 길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벌써 일주일 전쯤 일이고 해외에서 급히 귀국한 자식이 경황이 없어 제대로 주변에 알리지도 못하고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날벼락같은 뉴스였다.
한 분, 두 분 친지들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황망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이렇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돌아갔다는 소식은 또 처음이었다. 목소리에 기운이 없고 몸이 아프다고 호소하던 음성이 생생한데 그날이 마지막이었다니. 느닷없는 아저씨의 죽음에 엄마는 할 말을 잃었다.
아직도 온기가 가시지 않은 고구마를 멍하니 내려다보다 한 입 베어 물었다. 켁, 소리와 함께 목이 메어 황급히 물을 찾았다. 벌컥벌컥 찬물이 속을 타고 내려가도 먹먹한 가슴은 시원해지지 않는다. 그가 농사짓고 상자에 넣어 부쳐준 고구마는 여전히 살아 있는데 정작 그의 존재는 세상에 더 이상 자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우리가 아는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느덧 한 해, 두 해 부모님의 주변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제는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이 모두 사라져 소식을 전하거나 대화를 나눌 상대조차 없다.
엄마는 아직도 휴대폰에 저장된 아저씨의 전화번호를 가끔씩 들여다보신다. 마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여전히 잘 지내고 있겠지, 그렇게 믿고 살 수 있다면 꿈을 꾼다 할지 모른다. 언제라도 걸면 받을 것 같은 번호는 영원히 지울 수 없다.
어떤 상실은 뒤늦게 천천히 온다. 아마 올해 가을쯤 더 이상 이천에서 보내는 고구마가 도착하지 않을 때쯤 그의 부재도 도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