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면 이(異)세계 전생물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1화에서 주인공은 트럭에 치여 죽는 이야기가 클리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종종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소개하는 영상을 보면, 이러한 이세계물의 인기는 비단 최근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만화와 라이트노벨 또는 웹소설이 먼저 인기를 끌고, 애니메이션은 가장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세계물의 인기는 훨씬 더 이전인 2020년 즈음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희가 어렸을 시절에도 이세계물은 많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현실을 바탕으로 이능적 존재가 등장하거나, 시작부터 이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와 차별적으로 '이세계물'은 평행세계를 설정하여 현실의 주인공이 이세계와 현실을 오고 가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를 지칭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세계물'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를 '이세계'로 이동하는 '이동물'과 다시 태어나는 '전생물'이라는 두 개의 소재로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도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만화영화는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대표적인 '이세계 이동물'은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와 '환상게임'입니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은 주인공이 이세계로 이동을 할 뿐 전생하지 않았습니다. 즉 아기의 상태로 이세계에서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한 상태로 이세계의 삶에 적응해야 합니다. 또한 '이세계 이동물'은 '이세계 전생물'과 달리 가족이 없는 온전한 외톨이의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저는 각각의 애니메이션이 숨겨진 우리의 욕망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지친 일상, 금수저와 흙수저의 대조,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이 큰 사회일수록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삶'이 갈망될 것입니다. 이러한 갈망은 현재에서 바꿀 수 없으니 과거에서 다시 시작하여 삶을 바꿔보겠다는 의지의 바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현대인들은 새로운 삶을 처음부터 시작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현재 이세계 전생물의 인기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세계 이동물은 어떠한 욕구가 반영되어 있을까요? 저희가 어렸을 적에는 사실 '이세계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죠. 다만 다른 세계에 가는 포맷에 매료되어, 실제로 평행세계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고는 했습니다.
'에스카플로네'와 '날아오르는 주작'
전자 바이올린의 날카로운 고음으로 시작하는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의 주제곡과 '날아오르라 주작이여!' 하던 '환상게임의 주제곡'을 들으며, 가슴 뛰던 어린 시절이 기억납니다. 물론 다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내용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보지 않을 저와 동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설정과 세계관으로 어린아이의 애니메이션가 아니라 어른의 애니메이션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몰래 보고는 했죠. 해당 글에서는 이세계 이동물의 대표작인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와 '환상게임'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고, 이세계 이동물을 철학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2.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와 환상게임
이세계 이동물은 공통적으로 주인공이 고등학생인 상태로 이세계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이세계인들에게 '이질적인 존재'가 됩니다. 동시에 주인공에게 이세계는 '환상과 혼동의 세계'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처음에 이세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거나 또는 좋은 사람을 만나 보살핌을 받게 되죠. 주인공은 낯선 세계에 떨어져, 위협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주인공 또한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여서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존재로 공경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가진 특별한 능력 때문에 이세계에서 문제에 휩쓸리기도 하고, 또 문제를 해결하는데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의 경우 주인공인 마리(일어판: 히토미)는 타로카드와 점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고생입니다. 히토미는 쉬는 시간에 목걸이를 이용해서 친구들과 자신의 점을 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세계의 왕자 반과 만나게 되고, 이세계의 균열에 휩쓸려 이세계로 이동하게 됩니다. 히토미가 이동한 이세계는 '가이아'라는 행성이었고, 하늘에 지구가 달과 같이 떠 있는 세계였습니다. 이세계의 사람들은 지구를 환상의 달이라 불렀고, 마리는 환상의 달에서 온 신비의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후 마리는 꿈속에서 반 왕자의 왕국인 파넬리아가 멸망하는 환시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인근의 자이바하 제국이 파넬리아를 침공하고 왕자 반의 왕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이후 마리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예언의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고, 마리 또한 자신의 능력을 통해 반을 돕고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반은 전설의 기체인 '에스카플로네'를 조종하여, 마리를 위험에서 구출하고 적들을 하나 둘 무찌릅니다. 반과 마리는 기나긴 여정 끝에 적을 모두 물리치고, 반은 자신의 고향인 파넬리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반은 모험을 함께한 마리에게 인사하고, 마리는 에스카플로네의 힘으로 다시 지구로 돌아옵니다. 최종화에서 마리는 자신의 현실로 돌아가고, 그리운 반을 추억하며 애니메이션은 끝이 납니다.
현실에서 반의 환상을 보며 그리워하는 마리
이 모험에서 마리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요? 마리는 본래 타로와 점을 좋아했습니다. 마리의 신념체계를 보면 인간의 운명이 정해져 있으며, 이를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환시를 통해 본 예언은 반드시 일어나며, 사건의 발생을 막기보다는 사건 발생 이후 대처를 위해 노력합니다. 마리에게 있어 운명은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악역인 '아이작'은 운명을 거스르려 노력합니다. 그는 '운명 조정 장치'를 개발하고, 세상을 변혁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아이작의 노력은 실패하고, 그는 운명을 조정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불확정적인 것이므로 과학의 힘으로도 조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리는 '이미 정해진 운명은 없으며,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인간의 삶은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으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마리는 자신이 점칠 때 사용하던 목걸이를 반에게 주고, 현실에 돌아와 다시는 운명을 점치지 않게 됩니다. 즉 마리는 여정을 통해서 '삶은 운명이 아니라 마음'에 좌지우지된다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미주(미아키)와 유귀(타마호메) 그리고 유성(호토호리)
'환상게임'의 경우 주인공인 미주(일어판: 미아카)는 절친인 진아(유이)와 함께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신천지서'를 읽다가 이세계로 빨려 들게 됩니다. 미주와 진아가 이동한 세계는 '책' 속의 세계였습니다. 이세계에 막 떨어진 둘은 강도에게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미주는 구출을 받지만, 진아는 다시 책을 통해서 현실 세계로 돌아옵니다. 현실로 돌아온 진아는 자신이 빨려 들어갔던 책을 다시 펼치고, 진아는 미미주와 다른 사람들이 사실은 소설책의 등장인물로 그려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세계 사람들은 미주를 '주작의 무녀'로 신봉하였고, 미주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따라 '주작칠성'을 모아 주작을 소환하고 현실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친한 친구사였던 미주(미아카)와 진아(유이)
진아는 현실에서 미주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고, 그녀는 미주를 구하기 위해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진아가 떨어진 곳은 미주와 먼 타국이었고, 사람들은 진아를 '청룡의 무녀'로 신봉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주와 진아는 친구 사이에서 '주작의 무녀'와 '청룡의 무녀'로써 라이벌 관계가 됩니다. 둘은 서로를 가까이에서 아끼면서도 동시에 상대에 대한 부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남자 주인공인 유귀에게 구출된 미주와 달리, 진아는 힘든 역경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미주와 진아는 서로를 이기기 위해 싸우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남자 주인공인 유귀는 자신이 '사신천지서'라는 소설책 속의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유귀는 스스로 미주를 구하기 위한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고, 미주를 도와 주작을 소환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결국 청룡과 주작이 소환되지만, 진아는 청룡의 힘에 먹혀버리고 자아를 유지한 미주가 3 가지 소원(청룡에게 먹힌 진아의 부활, 청룡의 봉인, 세계의 회복)을 빌면서 사태는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미주는 유귀와 이별하고, 진아와 함께 현실로 돌아옵니다. 다시 현실에 적응한 미주는 유귀가 소설 속 존재라는 점을 알면서도 유귀를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눈이 내리는 겨울날 마치 주작의 기적처럼 유귀는 현실 세계로 넘어와 미주에게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미주와 주작칠성
사신천지서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마리는 점차 성장해 나갑니다. 본래 마리는 수동적인 학생이었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합니다. 마리와 진아의 대화를 주의 깊게 보면, 진아는 늘 주목받는 학생이었으며 마리는 그런 진아와 함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아는 본래 주인공은 자신이 자치해야 하며, 마리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했다고 질투합니다. 진아의 이러한 모습은 극심한 열등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으나, 동시에 그만큼 마리가 수동적이고 나약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여정을 속에서 마리는 청룡칠성에 의한 중상모략과 환시, 변장 등의 술수에 빠져버립니다. 이러한 모습은 시청자로 하여금 마리가 가엽게 느껴지다가 한심하게 비치기도 합니다. 마리는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주작칠성 특히 유귀의 도움 없이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진아의 공격에도 마리는 여전히 '우린 친구잖아'하고 설득하려 합니다.
능동적인 진아와 수동적인 미주
여정의 끝에 가서야 마리는 진아와 대립하기로 결단합니다. 마리는 주작을 소환하는 데 성공하고, 3가지 소원을 빌어 청룡을 봉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소원 앞에서 마리는 '유귀를 현실의 존재가 되게 해 주세요'와 '세계의 멸망을 회복해 주세요'의 소원 중에 고민하게 됩니다. 마리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위한 소원이 아닌 세계의 회복을 빕니다. 이러한 미주의 모습은 능동적인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미주는 이세계로 소환되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상황에 자주 빠지게 됩니다. 때로는 청룡칠성에 의해 강제로 납치를 당하기도 하고, 주작칠성에 의해 구출받습니다. 그리고 최종장에서 자신의 결단이 옳았음을 믿으며 현실로 돌아갑니다. 이후 미주는 기적같이 현실에 다시 태어난 유귀를 발견하고 기억이 없는 그에게 인사하고 그를 끌어안습니다. 늘 안기던 미주의 모습과 달리, 이제 미주는 다가가고 마주하는 인물로 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재회한 미주와 유귀
그리고 '이세계 이동물'은 현실 지구에서 살던 '평범한' 학생이 우연 또는 운명으로 인하여 다른 세계에 떨어진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학교에서 교과서를 보며 공부에 전념하는 반복적이고 평화로우며 다소 지루한 일상을 살던 삶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주인공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시련'과 '긴장', '도전'을 경험합니다. 주인공의 고군분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 임무를 수행하는데 주인공은 한 없이 나약한 존재이죠. 그래서 주인공은 이세계에서 사람들과 사귀며,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줄 조력자들을 구합니다. 모험의 과정에서 주인공은 학교생활에서 체험할 수 없는 역경을 경험하며, 그 과정에서 우정과 사랑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끝에서는 주인공이 현실 세계로 무사히 돌아가게 됩니다.
3. 이(異)세계 이동 애니메이션에 대한 철학적 고찰
이렇게 '이세계 이동물'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일탈과 다시 현실로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와 '환상게임'이 두 개의 애니메이션을 시청할 때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우리는 애니메이션 속 세계에 몰입하여, 현실과는 다른 시대상과 사회 그리고 인과관계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 또한 현실에서 이세계로 이동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면 할수록 마치 주인공과 같이 이세계로 간 듯한 상상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 '마리'와 '미주'가 된 것처럼 보다 쉽게 몰입하게 됩니다. '일상의 평범했던 나', '대중 속의 나'에서 벗어나, 때로는 공경의 대상이 때로는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다른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이 이야기는 만화적 요소에 따른 허구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애니메이션도 허구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이세계로 가기 때문에 '이질적 공간'과 '이질적 대상'을 마주했을 때 벌어지는 일에 더 쉽게 감정이입하게 됩니다. "실제로 나의 하루에 저들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고, 등장인물의 역경을 다시 곱씹어 보면서 자신의 반응과 대책을 상상하게 됩니다. 마치 주인공이 이세계에서 성장하듯 나 또한 상상의 세계에서 성장하는 스토리를 구축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청자는 마치 주인공들이 현실 세계로 돌아오듯, 현실로 돌아와 주변 인물과의 실제 관계로 돌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현실의 일을 이세계의 이야기에서 발견하고, 이세계의 이야기를 현실에서 경험하게 되죠.
푸코,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이처럼 '이세계'에 대한 공상은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줄까요? 철학자 푸코는 이러한 '이질적 공간'이 현실 세계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푸코는 공간을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삶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세계이자,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토피아'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둘째는 '유토피아'입니다. 유토피아는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 '있을 수 없는 공간'입니다. 누구나 꿈꾸는 이상향으로써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세계입니다. 셋째는 '헤테로토피아'입니다. 헤테로토피아는 현실과 이질적인 공간입니다. 하지만 유토피아와 달리 이는 허상의 이상향이 아닙니다. 푸코에 따르면 유토피아의 경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나,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를 해체하여 현실에 이질성과 다양성을 제공하는 반(反) 공간입니다. 헤테로토피아는 이질성을 지닌 '바깥의 사유'를 제공하는 공간입니다.
저는 푸코가 말하는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바람을 '이세계 이동물' 애니메이션이 충족시켜 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다른 일탈이 가능한 공간, 안락한 현실과 대조되는 공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 하지만 누구나 소망할 법한 그리고 있을 법한 이야기를 가진 공간입니다. 헤테로토피아는 극장과 같습니다. 극장은 현실에서 분리된 공간이나, 동시에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극장과 현실이 다른 점은 바로 '이질성'에 있습니다. 나의 현실은 나에게 같은 배경과 인물들의 관계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극장은 다른 배경과 이해관계의 상황을 제공합니다. 연극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체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하게 됩니다. 인간은 공간과 소통하는 존재이며, 동일성의 공간이 아니라 이질성의 공간에서 성장의 기회를 얻습니다.
'마리'가 이세계에서 삶과 운명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현실로 복귀하는 것처럼, '미주'가 사신천지서의 세계에서 성장하고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이질적 공간을 향해 몰입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감으로써 새로운 성장과 가르침을 얻습니다. 그렇기에 '이세계'는 보다 이질적이며, 그 이질성에서 가혹한 시련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현실의 공간이 동일성의 안정을 제공한다면, 이세계의 공간은 이질성의 새로움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세계'가 단순히 현실을 회피하고 찾으려는 허상의 '유토피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간접 체험을 통해서 현실의 삶을 보다 성숙하게 유지하기 위한 '헤테로토피아'라고 생각합니다.
4. 나가며
과거와 달리 요즘 웹툰을 보면 '평범한 여고생'이 아닌 '평범한 회사원'인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공은 청년 또는 장년의 남성으로 바뀌었고, '이동'이 아니라 '전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취업한 현대 청년들의 삶이 부조리하고 어려움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과거의 '이세계'가 청소년들의 상상과 바람을 충족하는 세계였다면, 이제 '이세계'는 성인의 삶을 위로하는 세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과 다른 '만약 ~ 하였다면'하는 바람이 모두의 마음속에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지금도 많은 작가분들이 다양하고 새로운 간접체험을 위해, 새로운 '헤테로토피아'를 구축하고자 노력하고 계십니다. 소설과 웹소설 그리고 웹툰과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까지 그 매개체 또한 다양해졌습니다. 일각에서는 만화와 가 애니메이션이 어린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치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단순히 어린아이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질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과 간접체험은 현실의 각박함에 지친 여러분께 잠시간의 쉴틈과 모험 그리고 긴장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의 어덜트들에게 이(異)세계가 이(利) 세계가 되길 바라며, 이글을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