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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 헤드린 Sep 06. 2024

'란마 1/2'과 '이누야샤'에 대한 철학적 고찰

철학도의 회상록-9


1. 들어가며


최근 '란마 1/2'이 다시 리메이크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란마 1/2'에 대한 추억도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있어서는 '이누야샤'도 같이 떠올랐습니다. 두 개의 애니메이션을 모두 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란마와 이누야샤의 연관점이 무엇이 있냐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두 개의 애니메이션은 그만큼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두 개의 애니메이션이 모두 타카하시 루미코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주인공이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연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중에서 란마와 이누야샤 그리고 세나와 가영이는 입체적인 인물들이죠. 이들에게는 '요구되는 나'와 '진정한 나'에서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란마 1/2과 이누야샤를 통해 우리 모두가 한 번쯤 해볼 만한 고민인 '정체성'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2. 란마 1/2과 이누야샤


80-90년대생이라면 란마 1/2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란마'는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자도 되고 남자도 되는 그의 특별한 능력 때문입니다. 이런 능력은 란마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은 아니었습니다. 본래 남궁란마는 무술에 진심인 소년이었죠. 란마의 집안인 '남궁가'(일어판: 사오토메)는 가문 대대로 무술을 전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란마의 아버지인 남궁민(겐마)은 란마를 '남자 중의 남자'로 만들기 위해 무술 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둘은 무술 수련을 위해 중국으로 넘어갑니다. 고생 끝에 도착한 전설의 수련장에서 둘은 실수로 저주가 깃든 연못에 빠집니다. 아버지인 남궁민'웅묘익천'에 빠졌는데, 이 연못은 오래전 판다가 빠져 죽었다 하여 여기에 빠진 이는 찬 물에 판다로 변하는 저주를 가지게 됩니다. 반면 란마가 빠진 연못은 '낭익천'으로 찬 물에 여자로 변하고 따뜻한 물에 다시 남자로 돌아오게 되는 저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란마는 찬물에 빠지면 여자가 되고, 뜨거운 물에 빠지면 남자가 되는 두 개의 성별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란마의 상황은 애니메이션의 오프닝 주제곡에 심리가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의 모습을 찾아주세요. 착한 일 하면 찾아올까? 사랑을 하면 돌아올까? 치마를 입고 학교를 갈까? 바지를 입고 갈까나? 오늘은 어여쁜 여자. 남자친구 만나면은 남자가 되어버릴까? 어떤 때는 새침 떼고, 남자로 변하면 몰라! 여자로 변해도 몰라!" 노래 가사를 보면 두 개의 성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란마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피소드의 내용을 보면 란마는 상황에 따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성별을 달리 바꿔서 해결합니다. 주제곡의 내용과 같이 란마는 장난스럽게 두 개의 성별을 사용하죠. 란마는 자신의 저주를 비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하고 살아갑니다.



이후 저주에 빠진 란마와 그의 아버지 남궁민은 친구인 주 씨(텐도) 집안에 더부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란마는 양가 아버님들의 약조로 주 씨 집안의 셋째 딸인 '주세나'(아카네)와 약혼하게 되죠. 다른 가족에 더부살이하는 환경, 주 씨 집안의 세 딸과 생활, 갑작스러운 약혼녀, 새로이 전학 간 학교, 찬물을 피해야 하는 저주 등 다양한 요소로 란마의 일상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자 란마에게 "사내 녀석이 ~"라고 하며 그가 속이 좁다고 평을 합니다. 또는 "댕기머리 소녀! ~"라며 여자 란마를 쫓아다니는 사람도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란마는 장난스럽게 여자와 남자로 변신하여 위기를 모면합니다.


란마의 이러한 모습은 특히 약혼자인 세나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란마가 주 씨 집안에 들어오기 전, 세나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남자들로 인해 남성에 대한 혐오가 있었습니다. 많은 남학생들이 하루를 멀다 하고 세나를 쫓아다니며 사귀자고 조르곤 하였죠. 세나는 이에 싫증을 느꼈고, 주 씨 가문에 내려오는 무술을 이용해서 남학생들을 무찌릅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란마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란마는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이성도 온전한 동성도 아니죠.

 그래서 처음에 세나는 다른 남자들을 대하듯 차갑게 대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세나는 여자 란마에 대해 알게 되고 시나브로 란마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란마는 다른 남자들처럼 세나에게 구애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차갑게 대하곤 하죠. 그런 란마를 보면서 세나는 '너는 사내아이가~'하며 잔소리를 합니다. 그리고 세나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 또한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잔소리를 받았던 일을 떠올립니다.


이렇게 남자이나 속이 좁아서 남자답지 못하다고 불리는 란마, 여자이나 거칠어서 여자답지 못하다고 불리는 세나는 각각 '남이 정해준 정체성'에 저항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 차이가 있다면 란마의 경우에는 신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이끌려고 합니다. 그런 란마의 모습을 보고 세나는 자신이 속은 좁지만 남자다운 든든한 버팀목 란마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나 또한 당당한 자신을 찾아갑니다. 선머슴이고 말광냥인 세나, 하지만 세나는 이제 거칠기만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란마와 세나는 사회가, 어른들이, 주변의 타자가 정해준 자신들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다움을 고민하여 스스로 정립 나갑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애니메이션 이누야샤를 살펴보겠습니다. 애니메이션 이누야샤는 현대의 여중생인 가영이(카고메)가 저주받은 낡은 우물을 통해 요괴들이 가득한 세계로 이동하여 모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가영이는 요괴를 물리치다가 '사혼의 구슬'을 화살로 맞추게 되고, 사혼의 구슬은 작은 조각이 되어 온 세상에 흩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가영이는 사혼의 구슬을 지키는 사명을 가진 이누야샤와 같이 여행하며 사혼의 구슬 조각을 모으게 됩니다.


이들의 여정을 보면 가영이와 이누야샤는 각각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영이는 현실의 인물이면서 이세계로 넘어온 다른 세계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영이는 학년이 누락되지 않기 위해, 현실의 중학교로 돌아가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봅니다. 하지만 따분한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 곧 이누야샤가 있는 요괴들의 세상으로 가고는 합니다. 가영이는 현실과 이세계를 오고 가면서 양쪽의 삶을 모두 유지하려고 하죠. 가영이에게 있어 이중의 정체성은 모두 지켜야 하는 자신의 일부와 같습니다. 하지만 가영이의 진실한 속마음은 학업에 전전하는 여중생이 아니라 요괴를 무찌르는 이세계의 무녀의 역할입니다. 가영이는 현대의 의약품을 과거로 가져가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합니다. 그 이외에도 자전거와 간식, 우산 등 모험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갑니다. 가영이는 주체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삶의 자리를 주체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반면 이누야샤는 '반요', 즉 요괴인 아버지와 인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누야샤는 요괴에도 속하지 못하고 인간에게도 속하지 못하죠. 이누야샤는 이복형인 셋쇼마루에 비하면 그 힘이 매우 미약합니다. 이누야샤는 아버지의 유산인 '철쇄아'가 없으면 다른 요괴들에게 패배하기 일쑤입니다. 또한 반요인 이누야샤는 보름달이 뜨는 밤에 요괴의 능력을 모두 상실합니다.

머리는 검게 변하고 강아지 귀 또한 없어집니다. 날카로운 손톱 또한 사라져서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이누야샤는 보름달이 뜨는 밤에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누야샤가 인간들의 무리에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백발의 머리와 붉은 눈동자, 그리고 강아지 귀는 사람들에게 있어 요괴라는 혐오감을 불러오기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이누야샤는 외로운 생활을 보냈고, 그에게 다가온 사람은 요괴와 비교적 가깝게 지내는 무녀뿐이었습니다. 그 무녀는 금강(키쿄우)이었고, 금강은 자신을 바쳐 사혼의 구슬을 품고 죽습니다.

이누야샤는 금강의 환생인 가영이가 나타나기 전까지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반요인 그는 무녀가 없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대상이었죠. 반요인 이누야샤는 요괴의 측에도 그리고 인간의 무리에도 소속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요괴라고 하기에는 나약하고, 인간이라 하기에는 이질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누야샤는 마을 사람들에게 '흉측한 요괴'로, 반면 다른 요괴에게는 '나약한 인간'으로 치부됩니다. 이 중에 이누야샤는 다소 무례하고 거친 반응을 보입니다. 인간과 요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했기에, 타자를 신뢰하고 관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죠. 그 내면에 상처받은 마음이 있어, 이누야샤는 그 누구도 살갑게 대하지 않습니다. 이누야샤는 타인에 대해 적대적이고 다소 무례하게 반응합니다. 이누야샤는 위험 속에서 무모하게 달려드는 등 불안한 정서를 보이기도 합니다. 무례하고 거친 그의 내면에는 상처받은 나약한 아이가 있었던 것이죠.

그런 이누야샤에게 가영이가 등장합니다. 처음엔 둘의 사이가 좋지 못했으나, 이누야샤는 곧 가영이에게 정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그 계기는 인간으로 변한 이누야샤의 모습을 가영이가 알게 된 다음부터입니다. 가영이는 이누야샤의 과거를 알고 가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누야샤를 '반요'가 아니라 '이누야샤' 그 자체로 바라봅니다. 가영이는 이누야샤가 요괴인지 인간인지 구분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누야샤를 하나의 실존으로 대해주죠. 이러한 가영이의 관심은 이누야샤의 마음을 열기 충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누야샤는 가영이의 잔소리 섞인 관심에 따라 점점 사교적이고 친절하게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어느덧 미륵과 산고, 싯포, 키라라 등 동료들이 생깁니다. 외로웠던 이누야샤는 사라지고 언제나 일행과 함께하는 일상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우리는 란마, 가영이, 세나 그리고 이누야샤의 모습에서 이중 정체성을 대하는 상이한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란마는 저주받은 자신의 삶을 탓하기보다는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어가고자 노력합니다. 저주를 비난하기보다는 저주를 이용해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죠. 이런 란마의 모습에서 상황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다니는 현존의 자세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을 결정하는 실존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존적 면모는 세나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주변인들은 세나에게 '권법으로 남자를 때리면 결혼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엄포를 주죠. 하지만 세나는 주변에서 규정하는 '여자아이다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 다움'을 고집합니다. 가영이 또한 자신이 소속되고 싶은 장소와 사람들을 선택합니다. 현대와 과거를 오가며 자기 필요에 따라 양쪽을 넘나듭니다. 가영이는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자신 있게 행동하며 주체적인 삶을 이루고 있습니다.

란마, 세나, 가영이, 그리고 이누야샤는 각각 '나 다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각각 이들에게 '상황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들은 각각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란마는 이를 장난스럽게 유머로 넘기는 경우가 있고, 세나의 경우에는 갈팡질팡하며 고민하기도 합니다. 반면 가영이는 특유의 당찬 성격으로 단박에 결단을 내리기도 하고, 이누야샤의 경우에는 투덜대는 성격으로 회피하기도 합니다.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성장 과정을 통해서, 주체성 있는 결단과 실행의 중요점을 알 수 있습니다. 상황 앞에서 회피하고 주저해서는 '나 다운 삶'을 살 수 없으니까요.



3. '나 다움'과 무제약적 행위


야스퍼스에 따르면 우리는 상황에서 상황으로 건너가는 연속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상황 속에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 그리고 선택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다양한 양상이 발생할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행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선택입니다. 이는 곧 행위의 결과와 연결됩니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선택 행위가 이루어진 방법'의 문제입니다. 즉 어떤 목적으로 해당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행위의 동기와 연결됩니다.

야스퍼스는 '동기'를 기준으로 상황 속에 행위를 구분합니다. 먼저 첫째는 '제약적 행위'입니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제약적 행위는 정신의 반성이 없는 충동적 행위입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성찰이 선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동적이고 즉흥적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행위의 주체인 '나 다움'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에 대한 사유 없이 본능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합목적적으로 A의 자극에 B라고 반응한 것입니다. 굳이 내가 아니라도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할 수 있는 보편적인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자기 초월'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다움'에 대한 사고에서 시작해야 하며, '자신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그 경계의 넘어섬이라는 지향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충동적 행위의 경우에는 이러한 초월의 과정이 일절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제약적 행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제약적 행위'와 상반된 '무제약적 행위'를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제약적 행위는 현존의 자세에서 발생하는 반면, 무제약적 행위는 실존을 향한 기회에서 발생합니다. 무제약적 행위는 정신의 반성이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초월적 행위입니다. 이를 쉽게 표현하면 식욕에 따라 반응하는 두 가지 다른 양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이와 달리 운동선수가 되기를 지망하며, 배고픔과 고통을 견디고 몸을 단련하는 사람이 있고, 또는 아름다운 몸매를 가꾸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인간은 욕구라는 자기 제약에 한정된 행위를 할 수도 또 그 제약에서 벗어난 무제약적 행위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인간을 두고 '스스로 창조한 제2의 자연'이라고 합니다.


제약적 행위와 무제약적 행위는 인간의 욕망만이 아니라 다른 기준에서도 적용됩니다. 인간의 행위를 제한하는 요소는 생각보다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사회는 우리에게 '여성다움', 또는 '남성다움'을 규정하기도 하며, 이는 당위적인 명령이 되어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기도 합니다. 또한 '아이는~', '청소년은~', '학생은~', 'MZ는 ~'과 같이 규정되는 제약도 있습니다. 문화적 배경에 따라 각각 나이대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이 규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규제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나 다움'을 사고하지 않을 때, '제약적 행위'를 시행하며, '제약적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실존하지 못한 현존의 삶으로 고유한 자신을 가꿀 수 없을 것입니다. 반면 자신에 대한 갈망과 선택이 있을 때, 우리는 '무제약적 행위'를 하며 '자신 다운' 실존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각각 란마 1/2와 이누야샤의 등장인물을 보면, 야스퍼스의 구분에 따라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란마의 경우 저주받은 자신의 상황을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를 이용해서 장난을 치고 사건을 해결합니다. 이런 란마의 모습을 보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란마는 종종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자신을 맡기기도 합니다. 강인한 사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연약한 여자의 모습을 감추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란마도 세나에게는 '여성다움'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란마는 주위에서 무어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가영이에게도 발견됩니다. 가영이는 중학생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당찬 성격을 보여줍니다. 현실과 과거를 오가며 주체적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여주인공들과 달리 가영이는 요괴에게 붙잡히는 경우도 적습니다. 붙잡혀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죠. 가영이는 과거인들과 요괴들에게 다가가 서스름 없이 대화를 시도합니다. 이런 가영이의 모습에 수동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죠.


반면 이누야샤는 다소 수동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이누야샤의 모습에서 그는 상황 속에 휘둘려 이끌려 다닌 삶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보다는 강하고 요괴보다는 약하기에 어느 한쪽에 소속될 수 없었죠. 인간의 엄마와 대(大) 요괴인 아빠의 그 어느 쪽에서도 정을 두지 못합니다. 이누야샤는 자신에게 주어진 배경을 탓하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쪽과 저쪽 모두에 호의적으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세나 또한 성별에 대한 주의의 고정관념으로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면서 남자를 싫어하나 그렇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여성적이지는 못한 소녀로 남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각각 란마와 가영이를 만나면서 삶의 관점이 변하게 됩니다. 주변을 의식하기보다는 '자신' 다움을 가꾸고 세계에 개방된 자세로 성장하게 됩니다.

야스퍼스의 철학 사상에 따라 생각해 보면 이누야샤와 세나는 각각 제약적 행위를 하던 현존에서 무제약적 행위를 하는 실존으로 나아가는 면모를 지닙니다. 그래서 답답한 고구마 같던 인물에서 매력적이고 호감적인 인물로 변화하죠. 이들의 변화에는 자기 자신을 제약하고 있던 일종의 '감옥'이 있습니다. 이 감옥은 '처해진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하지만 실존에게 있어서 상황은 필연의 족쇄가 아닙니다. 실존은 필연적인 것에 대항합니다. 세계가 그리고 사회가 정해준 규정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실존은 도전이며, 진정한 자기 자신을 위한 자유를 행사합니다.


4. 나가며


누가 뭐라 해도 난 나야. 난 그냥 내가 되고 싶어. I wanna be me, me, me. 굳이 뭔가 될 필요는 없어. 난 그냥 나일 때 완벽하니까. I wanna be me, me, me.
- ITZY의 WANNABE  -


넌 너의 길로, 난 나의 길로, 하루하루마다 색이 달라진 느낌. 밝게 빛이 나는 길을 찾아 I'm on my way, 넌 그냥 믿으면 돼
- IVE의 I AM -
    

점점 자기 자신을 찾아가고자 하는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기 가요의 가사에서도 종종 실존에 대한 바람을 볼 수 있죠. 위의 노랫말을 보면 사회와 문화가 규정한 자신이 아닌, 자기 고유의 모습과 길을 발견하고 성장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점점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예능 오락에서도 '자기 브랜딩'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고유한 자신의 매력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큰 관심으로 떠오릅니다. 심리상담과 각종 성격유형 검사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편에서는 고유한 자기를 드러내고 표현하고자 하는 경향을 일시적인 세대의 경향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그 세대가 X 세대로, 지금은 MZ세대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실존하고자 하는 노력은 세대를 넘나드는 인간 본질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자기 다움을 찾는 여정에 계신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글의 내용은 '야스퍼스, 철학, 신옥희, 홍경자, 박은미 옮김, 9장 무제약적 행위'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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