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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 헤드린 Aug 12. 2024

사이버 표뮬러의 조연 '신죠'에 대한 철학적 반성

철학도의 회상록-3

1. 들어가며


어릴적 다들 가슴을 뜨겁게 달군 애니메이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특별히 좋아했던 캐릭터와 시나리오도 있을 것입니다. 저와 제 동생의 경우 저희도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아이의 티를 벗었다고 생각했을 때 로봇물 에니메이션에서 다른 종류의 에니메이션으로 관심을 돌린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광의 레이서' 또는 '사이버 포뮬러'라고 불리는 에니메이션이었습니다. 저희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고 부모님으로부터 학교 공부에 대한 잔소리를 듣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각자 성적표를 받고 서로의 등수를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던 저희에게 뛰어난 용사가 멋진 로봇을 타고 악당을 싸우는 에니메이션이 아니라, 각지의 선수들이 포뮬러 머신을 타고 경쟁하는 에니메이션은 큰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에는 1990년대 인기리에 방영된 애니메이션 사이버 포뮬러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2. 사이버 포뮬러의 조연 '신죠'


사이버 표물러는 주인공 하야토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일을 담은 애니메이션입니다. 매 화는 지역 예선과 본선으로 그리고 그 준비 과정으로 구성되고, 캐릭터마다 다른 재능과 노력 그리고 다채로운 포뮬라 머신의 개성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기를 마치고 나면 선수들의 순위가 공개되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흥미로운 레이스를 지켜보면서 이번에는 누가 우승을 하는지 긴장된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사이버 포뮬러의 주인공인 하야토는 어린 나이에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최고의 머신인 아스라다를 타고 포뮬러 선수가 됩니다. 사이버 포뮬러는 하야토가 낮은 성적에서 점차 역경을 이겨내며, 실력을 성장시키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조연 선수들도 등장하는데, 부잣집 도련님부터 성격이 날카로운 선수, 괴짜 기질이 있는 선수 등 다양한 선수가 등장합니다. 마치 학교 성적이 학생들에게 순위를 매기는 것처럼, 저희는 가장 어리고 미숙했던 하야토가 성장해 나가기를 간절히 응원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한편의 에피소드로 인해 주인공인 하야토가 아닌 다른 선수를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수는 바로 '신죠'입니다. 그의 에피소드는 주된 이야기가 아니라 부가적인 단편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이전의 레이싱 경기는 주인공인 하야토, 그리고 그의 라이벌인 란돌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그 중에 신죠는 어디까지나 조연으로 이야기의 진행을 돕습니다. 해당 화는 사이버 포뮬러 TV판 31-32화로 7차전 아프리카 케냐의 경기입니다.


신죠 팀에 새로 영입된 드라이버

7차전에서 신죠가 소속되어 있는 아오이 레이싱은 떠오르는 선수인 '블리드 카가'를 영입하고 새로운 팀을 창설합니다. 그래서 아오이 레이싱 산하에 두 개의 팀이 구성되고, 기존 선수였던 신죠는 입지가 불안해집니다. 이전 대회에서 신죠는 새로운 머신인 파이어 스페리온을 제공받았음에도 하야토와 란돌에게 밀려 좋은 성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오이 포뮬러는 신죠의 스테프를 재구성하였고, 유능한 스태프를 새로 구성된 팀으로 배정합니다. 아오이 표뮬러에서 1군 스테프를 쿄코에게 붙여주고 2군 스테프를 신죠에게 붙여준 것입니다. 사실상 신죠는 2군으로 격하되는 수모를 격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신죠는 더욱 승부와 성적에 집착하게 됩니다. 예선전에서 신죠는 21위를 기록합니다. 팀네 분위기는 더욱 암울해지고, 신죠는 좋은 성적을 위해 스태프들을 나무랍니다. 신죠는 기록과 순위에 집착하며 더욱 스테프를 질책합니다.




이후 7자 케냐의 결승전이 시작되고, 코스를 방해하는 변칙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코스를 방해하는 코끼리 무리부터 표뮬러에 달라붙는 메뚜기 때까지 다양한 변수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죠는 1위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신죠는 1위를 위해 코스를 이탈하는 무리한 질주를 감행하고, 그 결과 신죠는 자신이 운행하고 있는 파이어 스페리온의 성능을 무리하게 감행합니다. 그 결과 신죠는 선두 그룹을 따라잡고 결국 선두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신죠의 무리한 질주는 진흙에 빠지는 상황을 유발하게 되었고, 신죠는 손수 머신에서 진흙을 걷으려고 합니다. 신죠는 진흙을 걷어내고 지속적으로 달려봅니다.  결국 신죠의 성적은 꼴등, 신죠는 빈 차고를 보며 쓸쓸히 고개를 숙입니다.


레이싱이 끝난 신죠를 아무도 맞이하지 않습니다.

신죠는 현재의 자신을 한탄하며 과거 최고의 스테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내었던 자신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우승을 위한 길은 '팀 워크'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신죠는 다른 스태프를 2군 취급하며 질책했던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그는 스테프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심어린 사과를 합니다. 그랑프리의 이름난 선수의 입장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스테프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스테프는 엔진의 내구성을 강화하여 신죠의 퍼포먼스를 보조하고자 합니다.




신죠는 이어지는 본선에서 자신의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고자 노력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이전 경기에서 리타이어 했기 때문에 우수한 성적을 내기 위해 무리한 운행을 감행해야 했습니다. 그는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적재적소에 부스터를 사용합니다. 결국 그는 선두 그룹을 따라잡는데 성공합니다. 그의 실력은 주인공인 하야토와 천재인 란돌을 따라잡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연속된 경기로 인해 머신의 엔진 내구성은 예전보다 낮아져 있었습니다. 결국 신죠의 파이어 스페리온은 도착점 100미터 앞에서 엔진 과열로 멈춰버립니다.


중개석에서 아나운서가 신죠의 리타이어를 공지하려고 합니다. 신죠 또한 묵묵히 머신 문을 열고 내립니다. 하지만 아나운서의 예상과 달리 신죠는 서킷을 이탈하지 않고 머신 뒤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신죠는 묵묵히 파이어 스페리온을 손으로 직접 밀기 시작합니다. 뒷쫓아오던 하야토는 머신을 손으로 밀고 있는 신죠를 보고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란돌 역시 산죠의 옆모습을 겹눈질하며 지나쳐갑니다. 이렇게 경쟁자들은 신죠를 앞질러 결승선을 넘고, 일부 관중들은 그의 처지를 조롱하기도 합니다. 이제 남은 순위는 5위, 신죠의 뒤에서 두 대의 머신이 굉음을 내며 결승선을 향합니다. 신죠는 이에 질세라 필사적으로 머신을 밀기 시작합니다. 이미 우승자는 정해졌습니다. 하지만 신죠의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두 손과 팔로 스테프와 머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5위로 결승선을 통과합니다.


해당 경기의 우승자는 하야토였습니다. 반면 신죠는 5위에 머물러 시상식에 오르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청자인 저에게 있어서 우승자는 이미 신죠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최선의 결과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는 드라이버가 스스로 머신을 밀면서 땀을 흘리는 장면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순위가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생한 신죠를 향하는 스테프들의 모습에서 존경과 영광이 느껴졌습니다. 해당 에피소드를 보고 난 후, 신죠는 진정한 노력파 선수로 저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해당 에피소드는 저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고, 이후 마지막 화까지 주인공인 하야토가 아닌 신죠를 응원했습니다. 신죠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아쉽게 하야토에게 추월당하여 2위를 기록합니다. 신죠는 최고의 머신을 타고 있는 하야토와 막대한 자금과 재능을 가진 란돌 사이에서 오직 노력만으로 2위를 거머쥡니다. 비록 그는 2위였으나, 저의 마음 속에서는 진정한 '영광의 레이서'로 기억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1등하는 삶이 아니라, 노력하는 멋진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위는 모두가 쟁취하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하지만 저의 목표는 남들이 다 바라는 목표가 아니라, 저의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는 저만의 결과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원하는 1등은 저에게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저 좋은 성적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제가 얼마나 근성을 가지고 노력했는지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3. 철학으로 바라본 신죠의 에피소드


신죠의 이야기가 인상깊은 이유는 그의 서사에서 '어떠한 나가 될 것인가?'의 질문을 스스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죠는 삶의 문제 상황에서 휘둘리기만 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상태를 성찰하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자신의 태도와 방향을 설정합니다. 그래서 신죠의 본모습은 서킷의 순행이 아니라 문제 상황을 마주했을 때 드러납니다. 문제를 마주하고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자신을 계획함으로써 새로운 자신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죠의 모습에서 저는 독일의 현대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말하는 '실존'을 떠올렸습니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인간의 실존은 '한계 상황'에서 드러납니다. 야스퍼스는 인간은 늘 상황 속에 있으며, 상황에서 상황으로 건너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각각의 상황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는 다른 상황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상황들 속에서 특정한 상황들은 인간의 순탄한 삶을 막아서는 순간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멈춰서게 하는 상황을 '한계상황'이라고 합니다. 한계상황은 "우리가 거기에 부딪치고 난파하는 하나의 벽"(p. 333)과 같습니다. 우리는 한계상황 앞에서 자신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을 마주하고 스스로 난파되는 경험을 할 때,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고 말합니다. 즉 한계상황은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 시련과 같은 고통의 순간이지만, 미래의 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성장의 계기인 것입니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한계상황에서 좌절하는 현존이 아니라, 새로운 자신을 세우는 실존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나아감을 '실존적 비약'이라고 하며, 이는 곧 한계상황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에서 실존이 되기 위해서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그가 말하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은 한계상황 앞에 있는 자신의 '기준점'을 말합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점'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만약 고정된 받침점만 주어진다면 지뢰대의 원리로 지구를 들 수 있다고 한 말에서 비롯된 표현입니다. 그리고 야스퍼스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에 빗대어 한계상황에서 가정적인 하나의 지점을 설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지점은 '자신을 사유하는 관찰'(p. 335) 또는 '철학적 사유로서의 실존조명'(p. 340)을 말합니다. 비약을 하려면 뛰어오르기 위한 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발돋움의 시작지점이 바로 '어떠한 나가 될 것인가?'하는 철학적 자기 고민입니다.




신죠의 에피소드를 보면, 신죠는 문제 상황을 마주하고 스스로 절망하는 경험을 합니다. 연속된 부진과 2군으로 강등 그리고 소속사 내 새로운 드라이버와 팀 구성으로 신죠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워집니다. 신죠는 서킷에서 리타이어되고 힘들게 돌아왔으나 아무도 신죠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때 신죠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상황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스테프들에게 화를 내고 그들의 실수를 탓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죠는 곧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합니다. 드라이버를 시작한 초심으로 돌아가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고, 다시 새로운 미래의 모습을 구상합니다. 이러한 신죠의 자세는 야스퍼스가 말하는 '한계상황에서 실존되기'의 자세로 볼 수 있습니다. 신죠는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되찾습니다. 그리고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상황 속에서 성장한 자신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렇기에 신죠는 결승선 앞에 멈춘 머신을 두 손으로 밀 수 있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자신을 기획하였고, 그렇기에 자신을 지나쳐간 경쟁자와 관중의 조롱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해당 에피소드는 한계상황을 마주하는 인간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 나가며


제가 해당 에피소드를 시청하면서 떠오른 감격은 실존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라고 생각합니다. 1등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미있는 삶을 사는 것, 저는 이러한 삶의 자세가 실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적 사이버 포뮬러가 인기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포뮬러 머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이버 포뮬러는 매화 그랑프리 경기를 다루고 있으며, 2회의 1번씩 선수들의 순위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제 막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시험과 성적, 그리고 순위를 의식하게 된 당시 저의 상황과 유사했습니다. 어울려 놀던 옆자리의 친구도 얼굴도 모르는 옆반의 학우도 저의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성적표의 석차를 볼 때마다 부족한 자신을 탓하기도 했고, 공부 못했다면서 좋은 성적을 거둔 학생을 얄밉게 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성인이 되고 나서 더 심한 경쟁 구역에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과 학과 그리고 자격증과 경력, 외모와 나이 등 많은 요소가 경쟁의 기준이 됩니다. 경쟁과 결과를 의식하면서 오는 부담감, 이는 사이버 포뮬러의 선수들이 보여주는 고뇌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과정과 동기보다는 결과가 우선되고, 그 결과는 순위와 점수로 수치화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무한 경쟁 사회를 마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죠가 보여준 실존의 자세일 것입니다. 상황에 빠져 허우적 거리기 보다는 상황을 인지하고, 어떠한 자신이 될 것인지를 설정합니다. 이러한 실존의 자세에서 우리는 1등 선수보다 멋진 '영광의 레이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해당 회차는 야스퍼스의 "철학" 2 실존조명에서 인용하였으며, 철학사상에 대한 이해는 홍경자 교수님의 논문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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