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다이어리 시안을 봐달라는 메일을 받고, 문득 그분께 드렸던 마지막 다이어리가 생각났다.
매년 연말에 회사 다이어리를 제작해서 임직원들에게 배부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시중에서도 쉽게 구할 법한 무난한 디자인으로 제작되지만,
간혹 디자인이 예쁘게 나온 경우 욕심내는 분들이 종종 있곤 했다.
올해 다이어리가 그랬다.
직접 팀원과 함께 업체를 방문해서 가죽 재질, 디자인 등을 하나하나 골라 제작했고,
회사의 CI컬러가 들어간 무난하면서도 산뜻한 다이어리가 완성되었다.
같은 층에 근무하시는 한 분이, 혹시 다이어리 하나만 더 얻을 수 있냐고 메일을 주셨다.
여분으로 가지고 있던 것을 하나 챙겨드릴 테니 또 달라고 하시면 안 된다고,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드렸는데,
그 다이어리가 정말 그분께 이 회사에서 받는 마지막 다이어리가 될 줄은
나도, 그분도 몰랐다.
몇 가지 이슈로 인해 회사는 그분께 권고사직을 제안했다.
그분은 당황하고 속상해하시면서도 체념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평상시에 점점 일거리가 없어진다며 주눅 들어 있었고,
말씀하실 때도 조용조용하게 하시는 분이었는데...
면담하며 눈물을 보이셔서 덩달아 나까지 울컥할 뻔했다.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회사나 근로자가 무언가를 잘못한 것도 아니다.
시장환경의 변화나 기술의 발전으로 본인의 역할이 없어진다거나, 본인의 역할에 맞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회사가 자선단체나 복지시설이 아닌 이상 자리를 비워달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직장인의 숙명은 언제나 회사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니까,
새로운 지식과 기술은 계속 나오니 항상 공부해야 하고, 업무 하며 자연스레 익숙해지는 것 이상으로 역량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개인 시간을 들여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
심지어 멀쩡히 잘 되고 있는 업무 방식 또한 더 나은 방법이 없냐고 개선해 보라는 임무가 주어지기도 하니까.
그렇게 그분을 내보내야 하는 상황을 스스로 정당화하다가,
불현듯 인사담당자인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몇 명 없는 인원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겨우 쌓이는 일을 처리하는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그나마 인원에 여유가 있는 중견기업조차도 교육 프로그램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 곳이 많다.
우리 회사 또한 그랬다.
형식적인 교육은 마련되어 있지만, 과연 그 교육을 통해서 근로자들이 시장에서 통할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인사 일을 하는 이상, 권고사직 또한 나의 업무 중 하나이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안타까운 상황을 최소화하려면, 올해는 반드시 직원들의 자기 계발을 도울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 다짐했다.
그렇게 약 반년을 준비한 결과, 전사 교육 체계에 대한 청사진이 나왔다.
정말 실무에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지, 각 팀 팀장님들과 여러 차례 미팅하며 각 직무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들을 정리했고,
교육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승진 체계에도 이를 반영했다.
다행히 대표이사님 또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해 주셨고, 부서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셨다.
아직 시행 초창기라 삐걱대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들이 많아 하나하나 보완하며 진행 중이다.
계획했던 프로그램이 사라져 버린 경우도 있고, 미처 발견 못했지만 추가해야 할 교육들도 발견된다.
교육 신청 및 이력 관리 시스템도 아직 잡아가는 과정이다.
HRD와 HRM은 다른 영역이지만 대기업이 아닌 이상 HRD를 따로 운영 중인 회사가 얼마나 될까?
나 또한 HRD 경험이 없었지만, 조직에 필요한 일이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동고동락한 동료들을 준비 없이 회사 밖으로 내모는 무책임한 인사담당자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나의 자리에서 할 일들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