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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Aug 16. 2022

동료들이 내게 원반을 던지자 한다

무엇이 정답일까. 아니, 정답이 있을까?

내가 살던 버팔로는 미국 뉴욕주 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뉴욕주에서 뉴욕시 다음으로  중소도시다. 버팔로윙과 나이아가라 폭포로 한국인들에게도 꽤나 친숙한 곳이지만 5년이란 시간을 보내기에는 조금심심한 곳이었다.


뉴욕시와는 차로 6-8시간 정도 걸리는데,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뉴요커들과 버팔로니안들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는 꽤나 거리감이 있었다.


학교 입학처에서 일할 때 나만 학생 신분의 아르바이트생이었고, 나머지 여섯 명은 입학처 일을 full-time 직업으로 삼고 있는 평범한 버팔로 주민들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한 2주일 정도 지났을 때 슈퍼바이저 Josh가 주말에 나와 동료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며 같이 frisbee를 하자고 했다. 우리가 흔히 '원반 던지기'로 알고 있는 그 놀이다.


당시의 나는 사람들을 만날 는 같이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거의 전부였기 때문에 처음 동료들끼리 frisbee 하며 놀자는 제안을 받았을  적잖이 당황했다.


'다 큰 어른들끼리 원반을 던지고 놀자고?'


막상 해보니 재미있긴 했지만, 그래도 적응이 안 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 동료의 제안은 cornhole 게임이었는데, 우리나라의 콩주머니, 팥주머니 던지기 놀이와 비슷한 게임으로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옥수수 주머니를 구멍에 넣는 놀이다.



이것도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맥주 한 잔과 함께 점수 내며 놀다 보면 시간도 잘 가고 즐거워 그 뒤에도 이런 기회가 있으면 종종 따라다녔다. 다음에는 다른 동료 집의 지붕을 수리하며 놀았다. 입학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조교 일을 같이 했던 동료들과 교수님과는 Becker Farm이라는 농장에 몇 번이나 갔는지 모른다. 블루베리, 딸기, 사과 등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 같이 제철 과일을 따러 갔으며 할로윈에는 건초더미 트럭에 앉아 담력체험 같은 것도 했다.



20대 초반의 나는 콘크리트 정글이라 불리는 뉴욕에서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매일 바쁘게 고층빌딩 어딘가로 출퇴근하는 뉴요커로서의 삶에 대한 로망만 가득했던 야망동자였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시시하게 느껴졌었다. 물론 어린 시절엔 나도 부모님과 한강에서 연도 날리고, 눈사람도 만들고, 부메랑도 날렸으며 운동회 때는 박 터트리기도 하고 명절에는 온 가족이 모여 윷놀이도 했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이런 경험이 자연스레 줄어들다 보니 성인이 되어 이런 시시콜콜한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졸업을 하고 친구들은  부류로 나뉘었는데, 나처럼 맨해튼으로 내려가는 친구들과 굳이  뉴욕처럼 정신없는 도시에 가서 아등바등 사냐며 버팔로에 남겠다는 친구들이었다. 미국은 나라가 커서 내가 다녔던 회계법인도 미국 전역에 오피스가 무려 50개나 있었고 당연히 버팔로에도 4 회계법인이  있었기 때문에   이만   받자고 '굳이' 대도시 행을 감행하지 않겠다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함께 맨하탄으로 내려갔던 친구들조차 1년이 지나니 다시 뉴욕을 떠나 버팔로 오피스로 트랜스퍼를 신청해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모든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개인의 빠른 성장보다는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의 느리지만 여유로운 삶을 택하겠다는 그들의 선택을 아주 오만하게도 '시시하다'는 네 글자로 평가했다.


그렇게 나는 뉴욕으로 가 그리도 원하던 '바쁜 뉴요커'의 삶을 2년간 살았고, 코로나가 터지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더 바쁜 서울인'의 삶을 살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던 어느 날,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보고 있는데 프랑스에 로테이션을 간 미국인 에밀리에게 직장 동료 뤼크가 "You live to work. We work to live"라는 말을 던졌다. "우리 프랑스인들은 살기 위해 일을 하지만 너희 미국인들은 일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 같다"는 말이었는데, 이 말에 헉하며 몇 번을 되감아 본 지 모른다. 버팔로에서의 한가하고 여유롭던 삶을 뤼크에, 뜨겁고 치열했던 뉴욕과 서울에서의 삶을 에밀리에 대입시키면서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토록 꿈꿨던 치열한 삶 속에서 몸도 마음도 한 번씩 상해 보고 나니 철없던 시절 감히 시시하다고 치부해 버렸던 버팔로 친구들의 삶 속에서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깨달았다.


행복감


광저우, 버팔로, 뉴욕, 서울. 내가 여행자가 아닌 거주민으로서 경험해 본 도시는 이 네 곳이 전부이기 때문에 함부로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같은 시대에 지구라는 같은 공간에 살아가면서 누구는 A라는 가치관을 최고로 여기며, 또 누구는 B라는 가치관을 최고로 여기며 서로 너무나도 다른 방식의 삶을 영위해가는 모습들이 참 신기하다.


뜨겁고 미지근한 삶을 모두 경험해 본 지금은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겠다. 아니, 정답이 있기는 할까? 버팔로니안의 삶도, 뉴요커의 삶도, 서울러의 삶도, 에밀리의 삶도, 뤼크의 삶도 결코 틀린 삶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결국 너무 뜨거울 때엔 미지근함을, 미지근할 때엔 또 가끔씩 뜨거움을 그리워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마치 퇴사 후 반년이 지난 지금, 저녁도 주말도 없이 워커홀릭처럼 일만 했던 그 시절의 뜨거움이 아주 가끔씩 그리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늘 뜨거워도 좋고, 늘 미지근해도 좋으며 뜨거움과 미지근함 사이 그 어딘가를 계속 왔다 갔다 해도 좋으니 그저 매일매일의 행복감만 놓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저 그러면 되는 거 아닐까?




그래도 주위에 너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만으로 가득한 것 같은 요즘은 어쩐지 버팔로에서 던지던 원반이, 콘홀게임이, 농장이 가끔씩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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