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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May 08. 2022

저, 유학 갈래요

한국을 떠나기로 결정하던 날

내가 8살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용산으로 이사를 왔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아빠는 공인중개사 일을 하겠다며 이촌동에 작은 부동산 사무실을 하나 냈다.


당시 용산에는 면적만 약 80만 평에 달하는 크나큰 미군부대가 있었기 때문에 이촌동에는 미군들이 넘쳐났고, 아빠는 미 8군을 손님으로 응대할 일이 많았다. 당시 군인들 나이대가 대부분 삼십 대였기 때문에, 그들의 자식들도 대부분 내 나이 또래였고, 그래서 나는 초등학생 시절 내내 조그마한 이촌동 동네에서 혼혈인, 그리고 미국인 친구들과 소꿉놀이를 하며 자랄 수 있었다.


주말 혹은 할로윈데이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미군 아저씨들이 나와 동생을 부대로 자주 데려가 주었던 게 기억난다. 어린 마음에 놀이 시설이 한가득 있는 부대 내 햄버거 집은 그렇게도 굉장해 보였고, 외국인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는, 치어리딩을 하는 언니 오빠들을 볼 때면 나도 그들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심을 품게 되었다.


고학년이 되자 나와 소꿉놀이를 하던 외국인 친구들과의 영어 실력 차이가 빠른 속도로 벌어졌고, 단어 하나 만으로도 까르르 까르르 할 수 있던 시절은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놀이터에서 매번 만나던 친구들을 만나도 더 이상 예전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느낌이었고, 그런 아쉬움이 커지자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나의 동경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어서도 자발적으로 영어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 언젠가는 미국에 꼭 가겠다는 마음으로 해리포터 대본을 구해 달달 외우기도 했고, 가십걸이라는 드라마는 주인공들의 발음을 한 문장 한 문장 흉내 내며 푹 빠져서 보곤 했다. 하필 그때 펜팔도 유행을 했어서, 외국인들과 펜팔도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언젠가는 꼭 유학을 가겠다는 다짐으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내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는데, 학교에서 여름방학 특집으로 중국 청도에 있는 어느 중학교와 자매결연을 맺는다고 했다. 자매결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우리 학교 학생들 집에 한 집당 두세 명씩 중국 친구들이 일주일간 머무르게 되었고, 각자의 방식으로 중국 친구들이 한국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야 했다.


'외국인'과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로망이 크던 나는 부모님을 설득해 우리 집에 두 명의 친구를 데려오게 되었다. 그 친구들의 얼굴도, 그 친구들이 입고 있던 교복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당시, 전교 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그 명분으로 중국 친구들에 대한 환영사와 송별사를 하게 되었다. 언어는 중국어를 사용해야 한다는데, 내가 중국어를 할 수 있을 리가. 당시 <황제의 딸>이라는 중국 드라마가 한창 유행해 열심히 보긴 했었지만, 그건 그거고 내가 말을 한다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일단, 그냥 외워


나를 불쌍히 여긴 친구가 누나가 대학에서 중어중문학 전공을 한다며 누나를 소개해주었다. 카페에서 그 언니를 처음 만났는데, 내가 한국어로 환영사를 써오면 본인이 중국어로 번역을 해 내가 읽을 수 있도록 알파벳으로 병음까지 써주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언니는 나의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일주일 후, 언니는 나 같은 사람도 읽을 수 있도록 병음으로 환영사 대본을 준비해 주었고, 나는 언니와 환영사를 한 줄 한 줄 같이 읽으며 발음을 익혀 나갔다.


어차피 내가 중국어를 전혀 모르니, 이해란 필요가 없었다. 언니는 시간이 없으니 그냥 언니의 말을 잘 듣고 그 발음 그대로 외우라며 환영사를 녹음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스파르타식 중국어 교육을 받고 집에 와 며칠 동안 대본을 달달 외웠다.


대망의 환영식이 있던 날, 떨리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붙잡고 그동안 달달 외워뒀던 환영사를 자연스럽게 읊었다. 환영사가 끝나고 박수갈채를 받고 나자 외국인에게 나의 언어가 아닌 그들의 언어로 나의 마음을 전달했다는 데서 오는 묘한 짜릿함이 느껴졌다. 


환영식이 끝나고 두 명의 친구를 배정받아 우리 집으로 데려갔다. 나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동생도 중국어는 전혀 못했기 때문에 손짓 발짓을 다 써가며 의사소통을 했다. 맛있는 식당도 데려가고, 에버랜드도 데려가고, 여기저기 좋은 곳들을 많이 데려갔는데 이건 어떤 음식인지, 여기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설명을 해줄 수가 없는 게 너무 답답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의 아이리버 전자사전을 들고 다니며 단어 하나하나 검색해서 보여줬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친구들과 일주일을 보내고 나니, 외국어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더 커졌다. 내가 영어를 잘한다면 영어 쓰는 친구들을 그만큼 더 사귈 수 있을 테고, 내가 중국어를 잘한다면 중국어 쓰는 친구들이 쉽게 내 친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만 보던 그런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다는 건 너무 멋진 일처럼 느껴졌다. 내 무대가 '한국'이 아닌 '세계'가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렇게 두 친구들을 중국으로 돌려보내고 난 뒤, 나는 며칠을 부모님을 설득했다. 내가 왜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지 설득하려고 별의별 핑계를 다 갖다 붙였던 것 같다. 결국 부모님은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셨고, 나가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오라 해주셨다. 단, 영어는 학교에서도 계속 배웠고 언제든 마음먹으면 배울 수 있으니 이왕 나갈 거면 중국부터 다녀오는 게 어떻냐고 하셨다. 중국이 곧 G2가 될 테니 중국어를 한다는 건 나중에 엄청 큰 플러스가 될 거라나.


당시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한국 사람들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끌리는 제안은 아니었지만, 아빠의 말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영어는 어디서든 계속 배울 기회가 있을 것 같았지만, 중국어는 이렇게 시작하지 않으면 영영 관심을 안 둘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부모님은 일사천리로 학교를 알아봐 주셨고, 나와 동생의 목적지는 국제학교도 아닌, 중국 로컬학교로 정해졌다. 말 그대로 야생에 던져지게 된 것이다.




중국은 9월에 새 학기가 시작하니, 가기로 정해졌으면 빨리 떠나야만 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담임 선생님께 전화해 이 사실을 알렸고, 학원에도, 학교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알리며 빠르게 자퇴 절차를 밟았다. 그때는 그게 고생길의 시작인 줄도 모르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설렘에 가슴만 마구 뛰었다.


2007년 8월 어느 날, 그렇게 어쩌다 나의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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