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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May 29. 2022

저, 학교 그만둘게요

고등학교 1학년, 자퇴를 결심하다

사실 변화를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다.


2008년 9월 15일, 150년 역사를 자랑하던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 신청을 하며 세계 경제는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미국, 캐나다, 일본, 한국, 대만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친구들이 모여있던 우리 학교에서도 본국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만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리라는 걸 인지하고 있지 못했을 뿐-


'글로벌 금융위기가 온다', '환율이 미친 듯이 높아질 것이다' 등등 들리는 말은 많았지만 나는 우리 집의 경제적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저 멀리 미국에서 일어난 일로 내 인생이 망하겠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저녁을 해주는 사이 숙제를 하러 방에 들어간 나는 열려있는 엄마의 노트북을 봐 버리고 말았다.


아빠가 보낸 메일을 읽고 있던 엄마.

메일에는 매일매일 고공 행진하는 환율에, 금융위기로 사업까지 타격을 입어 힘들어하고 있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별 말 없길래 우리 집은 마냥 괜찮은 줄로만 알았던 나는 당시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부모님은 어떻게든 내가 학교는 졸업할 수 있게 하자고 결론을 내린 듯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우리 집 재정상황에 무지했어도, 내 교육을 위해 무리해서 보내준 학교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내가 처음 중국에 유학 갔을 때, 위안화 환율은 125-135원, 달러 환율은 1,000원 정도였다. 하지만 2008년 말~2009년 봄, 위안화 환율은 무려 220원, 달러 환율은 1580원에 달했.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환율이 치솟았던 것이다. 당시 내가 다녔던 국제학교의 학비는 달러로 내고 있었는데, 연간 학비가 무려 3만 불에 달했다. 환율 효과를 무시할 수가 없는 금액이다.




그날부터 몇 주간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했다.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필수불가결 한 선택 같았다. 부모님은 분명 걱정하지 말라며 중국에 남아도 된다고 하실 게 뻔했지만, 엄마, 아빠가 저렇게 힘들어하는 걸 본 이상 유학생활을 지속하는 건 더 이상 내 옵션으로 남겨둘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면, 학창 시절 내내 수능을 준비하다 대학에 진학하게 되겠지-

입시 위주 교육에 익숙했던 내게 그다지 나쁜 옵션은 아니었지만, 이미 미국식 교육의 맛을 봐버린 나는 미국 유학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 내린 결론은 '학교를 다니지 말아야겠다'였다. 한국으로 돌아가 수능 준비에 나의 시간들을 다 바치는 대신, 하루빨리 검정고시를 보고 그 시간 동안 더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돈을 벌어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해야겠다 생각했다.


다만, 이걸 어떻게 말한담?




불행인지 다행인지, 휴가를 맞은 아빠가 중국으로 일주일간 놀러 왔고 온 가족이 모인 이 시점에 나의 계획을 밝혀야겠다 싶었다. 저녁 먹고 강변으로 산책을 나가 그간 혼자 마음속에 꽁꽁 숨겨뒀던 계획을 밝히며 자퇴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얘기했다. 한껏 혼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네 생각이 뭔지 잘 알 수 있게 A4용지 한 장에 계획을 정리해 와 봐'였다.


그건 너무 쉽지-


왜 그게 바로 허락으로 들렸을까. 이미 몇 주간 혼자만의 동굴에 들어가 생각 정리를 끝낸 후였기 때문에, 나의 계획을 정리해서 보여주는 건 너무나도 쉬웠다. 엄마, 아빠가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아 더 신나게 적어 내려간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아침 이 글을 쓰기 위해, 열일곱의 내가 적었던 그때 그 워드 파일 한 장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1년 365일 중 180일 이상을 교실에 앉아서 보내기보다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책을 쌓아두고 이것저것 공부하며 내 미래에 한 발 한 발 내딛고 싶다', '계획 실행을 될 수 있는 한 빨리빨리 해 보고 싶다', '40년, 50년이 지나 내 인생을 뒤돌아보았을 때 제대로 살았다 하며 후회 없는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어떤 것이고, 나는 무얼 하기를 좋아하며, 무엇을 했을 때 가장 행복할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등의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부모님은 어린 나의 이야기를 꽤나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셨고, 나는 그렇게 1년 반 가량의 짧디 짧은 첫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첫 유학생활이 짧게 마무리되다 보니, 중학교 3학년 때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을 꽤 여러 번 받았다. 내 대답은 자신 있게 no-


물리적인 시간은 짧았지만,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던 그 시절 그 곳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고, 무엇 하나 예측할 수 없던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며 너무나도 단단해질 수 있었다. 후회는 없지만 더 오래 있지 못한 아쉬움은 남아 3년 후 미국 대학에 입학하기 전, 반년 간 광저우에 다시 들렀다 갔다.


귀국 후 나의 이야기는 다음 매거진 <한국에서 홈스쿨링을 한다는 것>에 차곡차곡 담아 볼 예정이다.



<어쩌다 이방인> 이전 이야기:

1. 저, 유학 갈래요

2. 어서 와, 중국은 처음이지?

3. 이런 학교가 있다구요? 멘붕의 연속인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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