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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들deux맘 Jun 03. 2024

4.2kg으로 태어난 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마흔세 살 아줌마의 다이어트 해방일지

맛있게 먹을 때 제일 예쁘다고?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맞다.

행복은 몸무게 순이다.


1981년 3월의 어느 날

나는 4.2kg 우량아로 세상에 태어났다.

엄마는 내가 둘째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하곤 했다.


중학교 시절

엄마가 멋진 올블랙 바지 정장을 입고 외출 후 집에 왔다.

큰 키에 긴 목을 가진 엄마는 탤런트 박원숙을 닮았다.

"엄마, 그렇게 입으니까 완전히 영화배우 같아.

너무 예쁘다!"

엄마는 딸의 극찬에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영주야..."를 부르며 그대로 소파에 쓰러졌다.


그 당시 유행했던 풀무원 다이어트를 했던 엄마

6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6kg의 감량을 해낸 엄마

그 엄청난 미션을 마친 엄마는

아름답게 적당히 야윈 그 모습 그대로 집에 돌아와

사랑하는 딸을 앞에 두고 소파 위에서 쓰러져

실신 직전까지 갔다.


그 엄마에 그 딸!

중3 연합고사를 마치고 후련한 마음에

친구들과 함께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풀무원 다이어트에 쓸 거금도

헬스장에 다닐 여유도 없는 우리는

독특한 모양의 유리병에 담겨

소비자의 악력까지 마음에 담아 만들어진

델몬트 오렌지 주스와 함께

원푸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참 어리석었다.

안 그래도 4.2kg 우량아 출신인 내가

잘못된 원푸드 다이어트로 인해

늘 못 먹고 굶주려도 살이 잘 빠지지 않는 몸뚱이로

변하게 된 것이다.

저주받은 하체는

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를 동네 목욕탕 세신사분께  맡겼다.

평균이상인 덩치가 엄마에게도 조금은 벅찼으리라.

일주일에 한 번

거룩한 주일이 되면

집 앞 목욕탕

깨끗한 단상에 누워

굳이 말보다는 세심한 터치 2번으로 신호를 보내시는 세신사 분과 함께

내 소중한 몸의 앞, 뒷면 그리고 양팔까지

섬세하고 친절한 4번의 뒤집힘과 함께 깨끗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곤 했다.

끝을 알리는 2번의 터치와 함께

나는 단상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엄마 옆자리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어릴 적 내가 살 던 곳은

3층 단독주택이었다.

엄마는 늘 나에게 옥상에 가서 줄넘기를 하라고 하셨다.

그 당시 고무줄놀이의 선두주자였던 내게

줄넘기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한 번의 뜀박질에 300번, 400번, 500번까지 성공했다.

줄넘기 천 번도 가뿐히 해내던 나를 보며 엄마는 흐뭇해하셨다.

사랑하는 딸이 오동통한 모습으로 자라는 것이

조금은 걱정되셨던 엄마의 마음이었을까?

손쉽게 할 수 있는 줄넘기가 내 생애 첫 운동이었다.


엄마는 늘 요리를 좋아하셨다.

엄마는 도마에 칼을 올려 야채를 썰때의 그 '송송'소리가 너무 좋다고 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늘 변함이 없으시다.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늘 요리를 하시고 간식도 풍성히 만들어 주시던 엄마

그런 행복한 가정에서 잘 먹으며 오빠와 나는 조금은 오동통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나는 는 잘 먹고 잘 자라

대한민국 수험생의 대표주자 고3이 되었다.

그 역할에 그 누구보다 충실했던 터라

성적과 몸무게가 비례하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 고3이었던 내 본분에 충실했지만

그때 찍었던 가족사진은

평생 내 족쇄가 되어 나를 따라다닌다.

한창 미모가 오를 대로 올랐던 40대 중반의 엄마.

엄마는 탤런트 박원숙보다 더 예쁘고 고상해 보였다.

심지어 농염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 눈에는 영락없는 영화배우였다.

그랬기에 그 가족사진은 늘 우리 집 거실 한 중앙에 지금도 걸려있다.


성인이 되어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다니던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이 나에게 glamorous 하다며 칭찬을 해줬다.

평생을 a컵으로도 유지되던 내가 glamorous 하다니

기가 찰 일이었다.

계속되는 거짓 찬사에 마음이 무거웠던 나는

급기야 영어사전을 찾아보았다.


glamorous -especially attractive and exciting, and different from ordinary things or people.


사람에게 쓰이는 glamorous라는 표현은 매력 있고 당당하다는 뜻이었다.


부모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나는 언제나 당당했고 자신감이 넘쳤다.

키도 크고 목소리도 컸다.

지금의 169.8cm의 키는 중학교 때의 키다.

당당하고 기죽지 않는 기질은 엄마에게서 왔다.

엄마는 교회, 동네, 내가 다니는 학교, 동창회 등등 가는 곳마다 회장직을 맡았다.

마트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도 30분 이상의 대화를 이어가며

어딜 가나 소통과 화합에 힘쓰는 리더의 기질은 1936년생 외할머니에게서 왔다.

지금도 외할머니는 넘치는 사랑으로 증손주들에게 넘치는 용돈과 사랑을 주신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개를 키우게 되었다.

강아지가 아닌 개 두 마리.

사람이든 개든 나이와 체력은 '반비례'하는 법이다.

그러나 나이와 체력이 '비례'하는 유일한 생명체가 있다.

바로 양몰이 개  보더콜리.

파리 단 한 마리로도 하루종일 집 안에서 뛰어다니며 유익한 시간을 보내는 보더콜리와 사냥개 출신 골든레트리버.

이 두 마리를 키우며

재시민의 숲을 내 집 삼아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 당시 학원 강사였던 나는 출근 시간이  오후 5시였다.

매일 아침 10시부터 3시까지

우리(골든 레트리버)와 우주(보더콜리)

두 개들과 뜀박질을 했다.

1년 남짓 되었을 무렵

난 평균몸무게가 아닌 그토록 원하던 미용몸무게를 달성했다.


남편을 만났다.

남편의 어린 시절

남편은 엄마를 포함 이모들의 두꺼운 종아리를 보며 놀렸다고 한다.

그런 이모들은 질세라 반격했다.

"너도 커서 하체비만인 여자 만나서 결혼해라!"


그래서 나를 만난 것일까?

내 종아리는 발목 없이 매끈하게 두껍다.

심지어 휘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의 남편과 이모들의 장난 섞인 대화를

그저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는

왠지 모르게 씁쓸하다.


남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귀한 선물

첫째가 찾아왔다.

나는 임신을 하며 물만 먹어도 과연 살이 찔까? 의 가설이 사실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임신 기간 동안 과식이나 야식을 거의 하지 않았음에도

심지어 막달에는 수박과 물만 조금씩 섭취했음에도

78kg까지 몸무게가 느는 기이한 현상을 체험했다.

출산 후 원래 몸무게로 돌아가지 못한 채

둘째를 가졌다.


임신 기간 동안 체중계를 멀리했다.

화만 날 뿐 큰 의미가 없었다.

둘째를 출산하러 병원에 입원 한 날

간호사는 내 팔에 항생제 주사를 맞히며 동시에 내 몸무게를 측정해 주었다.

그리고 옆 동료에게 내 몸무게를 크게 말했다.

그 동료는 영혼 없이 차트에 내 몸무게를 적었다.

87kg

내 생에 최고의 몸무게를 찍었다.


둘째를 출산하고 한 달이 지났다.

갑자기 걸을 때마다 새끼발가락에서 풍선 터지는 소리가 나길래 병원진찰을 받았다.

그 결과는 바로

병명도 발음도 어려운

'족저근막염'

치료법을 물으니 살을 빼란다.


매일 아침 6시

산후조리 중인 친정부모님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에서

87kg에서 단 4킬로만 빠져버린 무거운 몸으로

열심히 운동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실

헬스장에는 왜 날씬한 사람들만 있는 것일까?

"저기요... 다들 어디 계신 거예요?"


내 발가락과 똑 닮은 발가락을 가진 큰아들

아빠 종아리와 똑 닮은 종아리를 가진 둘째 아들

87kg 내 몸무게가  피크일 때도

루에도 수십 번 예쁘다 말하며

내 얼굴을 보며 감탄을 자아내던

스윗  남편

난 모든 것을 가졌지만 힘들었다.


수십 년이 넘는 시간을 늘 함께 해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갈길 잃고 헤매는 여분의

특히 허벅지 너....


내 평생소원은 핫팬츠와 미니스커트를 입어보는 것이다.

사실 더 큰 소원은 바로 White Jean

새하얀 화이트 진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다.

하체비만인들은 허벅지가 쓸리는 그 느낌을 너무 싫어한다.

나 역시 그랬다.


20대 때부터 롱치마를 즐겨 입었다.

옷장을 열면

대외용, 대내용, 레저용, 홈웨어용 등등

계절 평균 10개가 넘는 롱치마가 있다.

늘 치렁치렁 늘어진 길이를 자랑하며

옷장 안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덕분에 롱치마가 패션의 완성이지  '치부의 가림막'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다행히 하체보다는 조금은 날씬한 상체와

엄마를 닮아 긴 목이 내게 위안을 주었다.

날씬한 곳은 자랑스레 내놓고

무거운 곳은 교묘히 가리기에 바빴다.

하체가 날씬해 보이는 '착시현상' 코디법에 늘 주목했다.


미용몸무게까지 내려갔다가

내 인생 최고의 몸무게로 피크를 찍었던 나는

외로웠지만 조금은 당당하게

육중한 내 몸을 이끌고 헬스장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아 산후조리를 끝내고

18개월 50일 아들 둘을 독박육아 하며 열심히 살았다.

퇴근을 해 집에 돌아온 남편이 짠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여보, 밥은 좀 차려먹었어?"

밥을 '차려서'먹다니?

내게는 낯설고 생소한 단어였다.


독박육아맘은 보통 밥을 서서 먹는다.

나는 배고픔을 못 참는 성격이기도 해서

배가 고프면 밥솥으로 직행한다.

밥솥을 열고 주걱으로 밥을 퍼서 고민 없이 입에 넣는다.

김이라도 먹을 여유가 있는 날에는 김 3-4장을 한꺼번에 놓고 그 위에 밥을 올려 먹는다.


큰 아이가 24개월이 되었고 어린이집에 갈 시기가 되었다.

교회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맡을 '선생님'은 있는데 '아이'가 없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아이가 등록을 한다고 해서 교회 권사님이시자 보육교사 자격증을 갖고 계신 선생님을 뽑았는데

어떠한 사정으로 아이가 등록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참 고마운 그 권사님의  한마디.

"그럼 노아라도 오라고 하면 어때요?"


난 그렇게 독박육아 6개월 만에 진정한 자유부인이 되었다.


아이 둘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친한 교회 권사님과 함께 집 앞 헬스장에 등록했다.


지난 세월

늘 헬스장에 가면 걷기만 했다.

내가 좋아하는 티브이를 보며 한없이 걷기만 했었다.

원래 땀이 잘 나지 않는 체질이었던 나는

"제발 샤워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헬스장에 무조건 와야 한다."

말하는 헬스장 관장님의 말에 공감이나 자극이 되지 않았다.

'헬스장 가서 샤워라도 하자'의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한 시간을 걸어도 땀이 안 났다.


그런 체질을 가진

내 눈에 들어온 스피닝 수업의 광경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말로만 들어보던 싸이키조명

클럽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나

드라마나 영화씬에서 보던 화려한 음악과

휘황찬란한 조명이

조금은 많이 움츠러들게 했다.

그렇게 전례 없는 광란(瀾)의 장소와 조우(遭遇)했다.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스피닝 강사와 1열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좀 노는 언니들 같이 보이는

스피닝 고수들괴성 같은 기합과 함께

슬슬 시동을 건다.

5분 정도 지났을까?

36년간 내 안에 잠들었던 본능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생 굳게 닫혀있을 것 만 같았던

내 온몸의 땀구멍도 한순간에 깨어났다.


시작한 지 10분 만에 땀줄기가 폭발했다.

170~190 bpm의 음악

접해본 적도

즐길 줄도 모르던 나였는데

나는 그 비트에 온몸을 맡겼다.

나와 교회권사님을 포함 아줌마들 15명은

흥건한 땀과 각 잡힌 칼군무

전쟁터에서나 나올법한 괴성을 지르며

30분간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스피닝 수업이 끝나고

페달에서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잘 서있지도 못했다.

1열 고수언니들이 뒷자리로 와서 인사해 준다.

처음 봤는데 마치 오래 알던 사이처럼 애틋하게 서로를 본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전우애'를 느꼈다.

난 그렇게 부축을 받으며 GX룸을 나왔다.


스피닝은 고강도의 유산소 운동이자 무산소 운동이다.

1987년 남아공의 한 철인 3종 경기 선수

임신한 아내가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선수는

집에서 훈련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그렇게 스피닝바이크가 세상에 나왔다.


엄청난 체력을 요하는 고강도 운동이기에

스피닝이 끝난 직후 밀려오는 후폭풍에 대비해야 한다.


평생 다이어트의 노예가 될 것인가.

36년째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다이어트에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


난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적절한 식단과 스피닝으로 나는 5개월간 23kg을 감량했다.

결혼 전보다 더 건강하고 날씬한 몸이 되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매일 10분에서 20분 정도 스피닝을 탄다.


애써 굶주리고 절제하며 통제했던 

지난 세월이 한탄스러웠다.

나는 이제 식단에 자유롭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원 없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즐겁고 행복한 것이 없다.

뭘 먹던지 스피닝 10분이면 칼로리 소비가 된다.

맛있게 먹으면 0kcal가 아니라

(진짜) 맛있게 먹고 (10분이면) 0 kal가 되는 것이다.

모든 다이어터의 평생고민인 변비에게도 아듀!! 를 외쳤다.


그렇게 나는

수십 년 간

날 옥죄고

먹을 때마다 자책감을 주었던

이어트에서 해방되었다.


물론 지금도 방해요소는 도처에 들끓는다.


빼박 40대가 된 후로

그리고 4년 전, 2번 연속 유산이 되었는데

'뱃속 6주 딱풀이'를 보내며 겪었던 소파수술 이후

스피닝 운동량은 변함이 없지만

6kg이 늘었다.


호르몬.

이는 설파할 필요성이 없는 '창조주'의 영역이다.



비만인가?

스피닝바이크 위에 오르자.


다이어트를 고민 중인가?

스피닝바이크 위에 오르자.


수없이 반복되는 '효과 없는' 다이어트와 운동에

진절머리가 나는가?

스피닝바이크 위에 오르자.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싶은가?

170~190 bpm의 음악을 들으며

스트레스와 여분의 살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곳으로 보내자.

그러니 제발 스피닝바이크 위에 오르자.


나는 스피닝 예찬론자이다. 

어딜 가나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스피닝을 권유한다.

9세 7세 아들 둘은 어렸을 때부터 스피닝을 탔다.

특히 태어난 해부터 엄마가 스피닝 타는 모습을 지켜봤던 둘째는 요즘

스피닝에 푹 빠졌다.


어린 시절

엄마는 내 몸무게를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워낙 솔직한 스타일이어서 그런 건지

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런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본의 아니게 몸무게가 공개된 나는

그런 상황에 닥칠 때마다

내 나름대로 침착하게 응수했다.

"저희 아버지는 늘 저에게 장군감이라고 말씀하시죠."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예쁜 딸이라는 말보다

"우리 영주는 장군감이지."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나는 그 표현을 아버지의 사랑이라 느꼈다.

나 스스로가 즐기며 농담까지 했으니 말이다.


4.2kg으로 태어난 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엄마가 지인들에게 내 몸무게를 말할 때마다

내 나름대로 '반항'하며 '속으로' 던졌던 질문이다.


4.2kg으로 태어난 것은

탓도

엄마 탓도 아니다.

2살 오빠를 키우며 만삭의 몸으로 나를 품어줬던

우리 엄마.

얼마나 힘들었을지 두 아들을 키워보니 알겠다.

 


4.2kg으로 태어났기에


1. 나는 감사하게도 '건강'하다.

2. 나는 감사하게도 '건강한 음식'을 '정말' 좋아한다.

3. 나는 감사하게도 어릴 적부터 운동을 하고 내 몸을 '관리'했다

4. 나는 감사하게도 3.26kg, 2.06kg 아들 둘을 '건강'하게 낳았다.

5. 나는 감사하게도 출산 외에는 '단 한 번도' 입원한 적이 없다.

5. 나는 감사하게도 17개월 차이 아들 둘을 독박육아하면서도 체력부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

온통 감사한 일뿐이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평균몸무게는커녕 영양실조로 쓰러지던 때가 있었다.

풍족을 넘어 과잉의 시대에 접어든 지금

외모가 스펙의 한 카테고리가 되었다.

잘못된 다이어트로 인한 거식증, 폭식증 같은 정신질환이 만연하다.

국내 다이어트 시장이 조 단위가 되었다는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잘못된 방식으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다이어터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부모님이 어떤 유전자를 주셨던

감사하며 관리하자.


다이어트는 장기전(長期戰)이자 전면전(全面戰)이다.


천천히

오랜 시간 동안

내 몸 구석구석을 잘 살피고 사랑하자.


우리 모두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다.

열심히 몸도 가꾸는 만큼 마음도 가꾸자.

그렇게 외모도 중심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당당하고 멋지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자!!


지금 이 순간에도

잘못된 다이어트로 외롭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다이어터가 있다면

You are not ALONE!!

나를 포함

천오백만 명의 다이어터가 늘 함께 한 다는 것을 기억하며


신나는 190 bpm 음악에 맞춰

오장육부가 흔들리는 희열을 느끼며

심장 bpm을 최대치로 끌어올리자!!

그저 살아 숨 쉼이 감사한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고 싶은 열정이

불타오르게 될 것이다.


하루에 딱 10분!!

스피닝바이크에 오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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