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바로 그걸 해보려고 합니다
"나대라!"
저의 최애 팟캐스트 <여둘톡>의 2024년 첫 번째 에피소드 제목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좀 나대는 편입니다.
나 이거 했어, 저거 했어 자랑하고 다니는 것도 좋아하고요. 할 줄 아는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뭐라도 같이 해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껍데기와 알맹이의 규격이 맞지 않아 곤혹스러운 경우도 있었지만요. (알고보니 깊게 다뤄본 적은 없는 분야였다거나, 그 분야에 대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거나.)
그렇지만 제가 즐겨하는 건 '거짓말'이 아닌 '나대기'입니다. 이에 심각한 문제까지 번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저는 없는 말을 지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있는 말을 소란하게 하는 사람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그 말에 최선의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저는 업무 경험이 짧습니다. 따지고 들자면 이렇게 브런치를 운영하고 있는 것도 기적같이 느껴집니다.
처음 부트캠프를 통해 IT 서비스를 알아가기 시작했을 때는 강바닥을 긁는 심정으로 공부했습니다. 몇십 명의 동기들과 함께 학습하고 있다보니 강점보다는 결점이 보였습니다. 결점을 가리기 위해 더 활발하게, 더 시끄럽게 설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인지 지난 2022년과 2023년에 걸쳐 아래와 같은 직무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 제품의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프로덕트 매니저
― 고객의 목소리를 조직에 퍼뜨리는 CX 매니저
저는 고객과의 최접점을 지키는 사람으로 자기 소개를 해왔습니다. 이 맥락에서 위 두 가지 직무를 선택하긴 했었지만, 실제로 경험해보니 예상과는 빗나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프로덕트 매니저는 조직이 좋은 제품을 선보일 수 있도록 개발자,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잘 만들어진 것을 소개하는, 다시 말해 메이커가 아닌 스피커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고객과의 대화가 고팠습니다. 이런 굶주림으로 CX 매니저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CX 매니저는 고객과 적극적인 소통을 주고받고, 정량적·정성적 인사이트를 도출해 조직에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여전히 저는 CX 매니저의 일이 좋습니다. 저는 언제까지나 어디에서나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대화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사람을 위한 가치를 제공하여 이로부터 업무 역량이 증명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CX 매니저가 이런 지점과 맞닿아 있는 직무인 것은 맞지만, 몇몇 이유로 CX 매니저라는 커리어를 구체화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에 올해 1월 CX 매니저로서의 커리어를 마무리지었습니다.
제가 선택한 다음 스텝은 세일즈였습니다.
사실 제가 선택했다기보다는 세일즈가 저를 선택한 것에 가까웠긴 하지만요.
저는 궁극적으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손 내밀어 상황을 살피고 해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문제', '사람', '상황' 등의 각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할 테죠.
프로덕트 매니저를 선택했을 때는 잘 만들어진 제품을 통해 이를 실현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프로덕트 매니저는 큰 그림을 파악하고 작은 그림을 조정하는 업무를 무리 없이 해내는 사람인데, 저의 문제는 프로덕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흥미도 이해도 쉽게 길러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 내가 꼭 함께 해야만 하나?", "더 잘하는 사람들이 제품을 만드는 게 맞지 않나?"라는 의문이 거듭되었습니다. 배우고 익히고 일하면서도 프로덕트 매니저로서는 발전보다는 한계에 자주 부딪혔습니다. '잘 만드는 것'과 '잘 파는 것'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저는 후자에 훨씬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도 이때 깨달았고요.
CX 매니저로 방향성을 바꾸었을 때는 훨씬 만족스러웠습니다. 고객 경험을 관리해서 비즈니스에 대한 만족도를 높이는 직무였기 때문에 '잘 파는 것'의 기초를 닦을 수 있는 직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 없던 안착감도 들었습니다. 제품 관리자에서 고객 경험 관리자로의 커리어 전환은 고객을 최전선으로 두었을 때 최후방에서 최전방으로 걸어나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는데요. 이제야 어렴풋했던 고객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고객과 직접 대화하는 사람이 되어 제품의 좋은 점을 소개하고, 아쉬운 점을 달래고, 개선을 기약하는 모든 과정에서 전에 없던 활력을 느꼈습니다.
모임 플랫폼 문토를 거쳐 농산물 정기 배송 서비스 어글리어스에서 CX 매니저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저를 만나러 오는 고객들에게 최선의 이익을 주고 싶다는 욕심이 컸어요. 그것이 고객도, 조직도, 저라는 개인도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었으니까요. 특히 어글리어스에서의 시간은 고객의 문제를 통계적으로 파악하고 연구하고 공유하면서 근본적인 해결까지 이끌어내는 진정한 의미의 CX를 실현할 수 있어 의미가 컸죠.
그렇지만 동시에 해소되지 않는 갈증도 있었습니다.
첫째, 고객에게 말을 걸 수 없다.
고객과 가장 많이 대화하는 사람인 CX 매니저가 고객에게 말을 걸 수 없다니, 이게 무슨 모순인가 싶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느꼈습니다. 어글리어스의 경우, 적게는 6시간에서 많게는 8시간 동안 매일 고객센터로 들어오는 문의들을 실시간으로 해결하는 CS가 당시의 주업무였음에도요. '고객에게 말을 걸고 싶은데 걸 수가 없다'는 한계와 맞닥뜨리곤 했어요.
제가 경험했던 업무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CX 매니저가 고객에게 직접적으로 선사할 수 있는 고객 가치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는 어글리어스가 제공하는 서비스, 즉 산업군이 끼치는 영향도 있었겠지요. 어글리어스는 매 주 다른 구성의 신선 식품을 정기 배송하는 D2C(Direct to Consumer) 기업이에요. 그러다보니 고객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품질 문제, 즉 고객센터의 상담원을 거쳐 해결해주어야 하는 문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고객에게 품질 문제에 대한 사고 보상을 해주기 위해서는 문제 상황을 물어보고, 물품 사진을 확인하고, 산지와 소통하고, 유관 부서에 확인 받는 과정이 꼭 필요했기에, 이를 간단하게 효율화해 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더군다나 고객센터에는 하루 약 100명의 고객들이 방문했습니다. 채팅 또는 전화를 통해 고객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너무 짧은 호흡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문제였습니다. 한 명의 문제를 해결하면 수많은 고객이 기다리고 있었죠. 지금 내 눈 앞의 고객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저 자신을 발견했고, 고객을 대하는 태도에 스스로 실망하는 일이 잦았어요. 고객과 적극적으로 소통을 하면서 숨겨진 니즈를 파악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단서도 얻어보고자 했지만 고객들이 그걸 원치 않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앞서 말했던 서비스의 특성상 고객센터를 찾는 대부분의 고객들은 불만스러운 현상황에 대한 보상을 빠르게, 정확하게 받는 것이 목적인 일반 구매자들이었기 때문이에요.
둘째, 늘 고객에게 미안하다.
일을 직접 해보니 CX 매니저는 '문제가 없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인 것은 맞는데, 울퉁불퉁한 지면을 갈고 닦는 평탄화 작업과 비슷한 업무를 담당하는 직무였죠. 저는 새로운 땅을 찾아나서는 개척자 유형에 가까웠는데 말예요. 오히려 고객에게 더 나은 가치를 선보이는 일은 브랜드 경험을 제공하는 팀이나, 상품을 기획하고 판매하는 팀 등 타 팀들에서 담당하고는 했어요. 물론 고객 만족에 네 일 내 일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항상 고객의 기쁨에 간접적인 영향밖에 줄 수 없는 상황에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또한, 고객센터는 '지금 당장' 달래주어야 하는 고객들의 감정이 넘실대던 공간이었습니다. 문제보다는 감정을 해결해주는 사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던 때가 제가 CX 매니저로서의 커리어적 한계를 체감했던 순간이었어요. 고객을 대할 때 보람보다는 미안함을 느끼는 순간이 더 많았죠.
누군가에게는 CX 매니저가 분명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커리어겠지만, 이처럼 저에게는 한 사이즈 잘못 맞춘 수제화처럼 어딘지 불편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몇 달 전에는 제가 CX 매니저로서 노력하여 바꿀 수 있는 상황과 바꿀 수 없는 상황을 찬찬히 구분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의 방향성 상 바꿀 수 없는 상황, 즉 어글리어스가 신선 식품 정기 배송 서비스라면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하는 CX 매니저의 업무들에 있어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고요.
뿐만 아니라 당시 저는 CX와 연관된 업무들 외에도 정산, 상품 관리, 입출고 등의 업무도 담당하고 있었고, 아직 완전히 안정화되지 않은 운영 프로세스 전반을 지원하는 일도 맡았기에 고객 경험 관리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비스의 몸집은 커져갔고, 고객의 불만도 함께 늘어났죠. 늘어난 불만 고객을 잠재우기 위한 노력을 팀내외에서 기울이고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액션이 서비스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반복되기도 했고요. 매 주 정기 배송은 돌아왔고, 예측불허한 이슈도 돌아왔습니다. 이렇듯 갑자기 늘어난 고객 수와 급변하는 환경으로 발생한 이슈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정비하며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더더욱 깊어졌던 것 같아요.
아쉬움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CX 매니저로 일하는 동안 눈 앞의 고객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이 고객이 원하는 바를 제공하는 가장 적합한 방법은 무엇인지 포착하는 능력이 쌓여 있었고, 앞서 말한 대로 고객을 마음으로도 숫자로도 바라보는 시각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해 본 사람이 되어 있었죠. 그렇지만 CX 매니저가 제가 앞으로 계속해서 가야 할 길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게 됐어요.
CX 매니저로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이미 충분히 터득한 데다가, 저의 다음 스텝이 눈 앞에 아른대는데 그 길로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저는 '잘 만드는 것'과 '잘 파는 것' 중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깨달은 상태였고, CX 매니저라는 이름으로 계속 일을 하게 된다면 '잘 팔기 위한 기반을 닦는 것'에 역할이 국한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까요. 고민의 시간은 길었지만 이에 대한 확신이 들자 CX 매니저로서의 커리어는 이만 마무리지어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
결국 저는 제가 고객과 더더욱 밀접하게 소통하며, 직접적이고 확실한 임팩트를 가져오며 일하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깊은 고민 끝에, 여전히 고객 경험과 가치를 지켜내면서도 고객과 조직의 성공에 확실한 어드밴티지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잘 파는 것'을 잘해야 하는 커리어로 챕터를 넘길 때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건 바로 세일즈였습니다.
세일즈는 직무명부터가 판매,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조직인 기업 입장에서는 사랑 받는 직무일 수밖에 없죠. 동시에 성과에 대한 부담도 가중되다보니 세일즈는 장단점이 확실한 직무, 적성에 맞기 어려운 직무, 스트레스가 심한 직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간 업무 중 만났던 세일즈 담당자분들로부터 배운 점과 스스로 세일즈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바를 종합해보니, 저라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세일즈라는 직무에 얽혀 있는 아래와 같은 제약이 달갑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세일즈라는 직무에 대해 내렸던 정의 중 하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고객과의 팀 플레이'였습니다. 영업직은 타 직무에 비해 유관 부서와 협업하는 일이 많지는 않은데, 다른 누구도 아닌 고객과 합이 가장 잘 맞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고객을 모르는데 이 제품이 고객에게 가서 어떻게 유용하게 쓰일지 알 수 있겠어요. 게다가 저는 언제나 마주대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이므로, 고객과도 짧게 만났다가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세일즈는 클로징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계를 넘나들며 액션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다만, IT 기업 여성들을 위한 커리어 워크숍 <웬즈데잇>에서 채널톡 양효진님으로부터 이때의 액션은 개인기나 기교가 아니라 묵묵하게 쏟아부은 노력에서 비롯한다고 배웠어요. 고객에게 제품을 안내하고 판매하려면 고객보다 높은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어야 하겠죠. 프로덕트 매니저로, CX 매니저로 일하면서 복잡한 제품을 빠르게 공부해 고객을 비롯한 다양한 유관자들에게 해설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노력이 고객의 구매라는 고부가가치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저는 효율화, 안정화를 넘어 고객에게 진정으로 유용한 인사이트를 주고 싶었습니다. 인풋 없이는 아웃풋도 없다는 믿음에 바탕해서요.
알아가다보니 세일즈 만큼이나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일이 그 누군가와 나에게 모두 성공을 가져다주는 직무가 또 없더라고요. 물론 CX 매니저로서 고객 한 명 한 명의 문의사항에 도움을 줄 때, 고객에게 발생하고 있는 문제를 데이터로 파악하고 해결할 때 고객의 불편을 돕고 있어 보람을 느꼈죠. 그렇지만 고객의 '성공'을 돕고 있다는 느낌을 얻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업무 환경 자체가 고객의 성공을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곳으로 저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위 정의를 내리는 데 제가 들었던 아래의 강연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해 1월부터는 CX 매니저로서의 커리어를 매듭짓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시간을 보내게 됐죠. 커리어 패스를 재정비하는 데는 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 뉴그라운드에서 일요일마다 진행했던 체크아웃 타임이 큰 도움이 됐어요.
뉴그라운드의 체크아웃 타임은 일요일 저녁마다 온라인에 모여 각자 회고 문서를 작성하고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다양한 여성들과 모여 일주일 간의 일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때 제가 겪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과 용기를 얻었어요. 작년에 첫 번째 시즌을, 올해에 두 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는데 회고 외에도 케이팝 댄스 배우기, 만두 빚기 등 일과 일 사이의 쉼도 가질 수 있는 모임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올 상반기 내 완수하고자 하는 일들로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기동력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저에게는 운전 면허가 없습니다. 제가 세일즈에서 기대하고 있는 것은 고객과 시장을 찾아나서는 경험이기도 한데요. 물론 반드시 운전 실력을 갖춰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고객과 조직에 제공할 수 있는 가치, 그리고 제가 내릴 수 있는 선택지를 넓히고 싶었습니다.
둘째로는 저의 세일즈 능력을 시험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세일즈라는 직무를 본격적으로 고려하게 되면서 저는 '이 제품만은 이 사람이 제일 잘 팔지'의 '이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단기적인 목표로 삼게 되었는데요. 사실 그동안 일상 생활 속에서 제가 숱하게 들어왔던 말이 있기는 했습니다. "너 때문에 이 물건 샀어"였죠. (유사한 말로는 "너 때문에 이 작품 보게 됐어", "너 때문에 이 음식 먹게 됐어" 등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커리어적으로 세일즈 능력을 펼쳐본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에 '잘 파는 것'에 대한 불씨가 있다는 것은 확실했는데요. 이를 스스로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 직접적인 세일즈에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될지 안 될지 모르더라도요.
요즘은 세일즈의 바이블이나 마찬가지인 『세일즈 클로징』을 읽고 있어요. 평생 동안 물건을 팔고 서비스를 제공했던 작가 지그 지글러는 영업 사원의 능력이 극대화되는 순간은 그 영업 사원마저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제품을 판매할 때라고 하더라고요. 회사 바깥에서 어떤 제품을 팔아야 최대한의 시너지로 세일즈 역량을 펼쳐볼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오랫동안 간직해온 숙원 사업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독립 출판이었죠.
이전 글에서도 말해왔듯 저는 대학교에서 글 잘 쓰는 방법을 공부했었습니다. 결국 그걸 잘하지 못해 작가가 아닌 길을 걷는 중이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만큼은 분명했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결과물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이걸 언제 한 번 쯤은 묶어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는데요. 2024년이 되어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 썼던 소설, 에세이, 시라는 세 가지 장르의 글을 앤솔로지(작품집) 형태로 출간해보려고 합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누구에게나 거짓된 모습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거짓된 나'에 한 눈이 팔려 진짜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것도,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며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것도요. 저 역시 한때 '리리카'라는 '거짓된 나'를 앞세우고 뒤편으로 숨어들곤 했고, 그때의 경험과 마음을 14편의 원고에 서툴리 담아 보기로 했습니다. 과제 마감일에 허덕이며 써내렸기는 해도 결국 돌이켜보니 꼭 써야만 했던 글이더라고요. 왜냐하면 여전히 저는 리리카와 더부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시절과는 전혀 다른,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어가고 있죠.
우선 책까지 내겠다고 결심한 데는 이런 글이 세상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읽히면 좋겠다는 열망이 컸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저의 글쓰기를 믿고 응원하는 가까운 사람들의 힘이 말로 다할 수 없는 힘이 되었습니다. 동네 책방을 오랫동안 드나들면서 주변에 좋은 독립 출판 작가님들과 소통할 기회가 많았던 것도 용기가 되어 주었고요.
이에 올 상반기 동안에는 독자들의 일상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글을 짓고 엮어 독립 출판물이라는 '제품'으로 만들고, 이 제품의 '가치'에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며, '고객'에게 자신 있게 권해보고자 합니다.
누군가 저의 책을 내주겠다고 제안한 적도 없지만 제가 내고 싶어 내는, 말그대로 독립 출판이다보니 바닥에서부터 혼자 시작해야 했습니다. 요즘은 내지 편집을 하고 있는 중인데요. 그전까지 출판 기획도 하고, 판매 전략도 세우고, 표지 디자인 계약도 체결하고……. 이전 업무 경험과 주변인들의 도움에 기대어 하나씩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 경험이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제품을 자신 있게 소개하는 사람이 되는 마중물이 되어줄 거라고 믿어요. 오히려 제가 직접 쓰고 만든 책을 판매하는 프로젝트가 제가 앞으로 세일즈로 쌓아가게 될 커리어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 거라고 예감합니다. 세일즈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면 '잘 만드는 것'을 잘하는 사람들이 만든 제품을 팔게 될 테니까요.
그럼 다음에는 책 출간 소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책의 이름은 『리리카 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