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가 필요한 순간
밤새 눈이 내린 다음 날을 좋아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거든요. 건물, 나무, 자동차, 화분, 심지어는 쌓아놓은 쓰레기 더미까지, 세상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해 윤곽만 남아 있어요. 그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 혹시 지금 내가 다른 차원으로 공간이동을 한 것이 아닐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 적도 있었습니다. 화선지 같은 눈길 위로 발을 내디딜 때는 달 표면에 인류의 첫 번째 발자국을 새긴 닐 암스트롱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었죠.
수소 두개와 산소하나로 이루어져 물과 같은 성분이지만, 독특한 결합구조로 인해, 손에 쥘 수도 있고, 꾹꾹 누르면 뭉쳐져 뭔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눈의 매력입니다. 어린 시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 날은 많은 아이들이 예술가로 변신했죠. 뭉친 눈덩이를 땅 위에 굴리면 점점 커지잖아요. 그렇게 눈덩이 두 개를 만들어, 큰 덩이는 아래에 놓고, 그 위에 작은 덩이를 올리면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눈사람, 다들 한 번쯤은 만들어 보았겠죠?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었지만 같은 눈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표정을 만드는 부재료는 다 달랐거든요. 나는 외투의 단추를 떼거나 솔방울, 나뭇가지를 모아 눈, 코, 입을 만들곤 했는데요. 그쯤 되면 눈사람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목도리를 둘러주거나 장갑을 양보하기도 합니다. 양동이로 모자까지 만들어주면 패셔니스트가 따로 없었죠. 그렇게 정성 들여 친구를 만든 날은 잠도 오지 않았어요. 녀석이 아침까지 무사할까 걱정이 되었거든요.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마당으로 나가 눈사람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만든 눈사람을 보기 힘듭니다. 옛날보다 눈이 많이 내리지 않는 탓도 있고, 설사 눈이 온다 해도 염화칼슘을 뿌려 제설하기 바쁘죠. 눈 내린 직후가 아니라면 눈을 만지는 것도 조금 꺼려집니다. 그렇다고 눈 오는 날 아무것도 안 하면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드는데요.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신기한 도구를 가지고 나오더군요. 긴 집게, 혹은 전지가위처럼 생겼는데, 끝부분에 오리 모양의 거푸집이 달려있어요. 거푸집을 눈 속에 파묻고 집게를 열었다 닫으면 앙증맞은 눈 오리가 완성됩니다. 이런 걸 스노볼 메이커라고 하더군요. 오리뿐 아니라, 미니 눈사람, 곰돌이, 공룡, 펭귄, 우주인 등 거푸집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손에 염화칼슘 묻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몇 번 집게 질을 하면 귀여운 눈사람이 뚝딱 만들어지니 꽤 편리한 도구죠. 아이 있는 가정의 겨울 필수품이라는군요.
올해 설 연휴에는 전국에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공원이나 강변에 아이들 손 잡고 눈 구경하러 나온 가족들이 많더군요. 다들 기다란 집게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요. 그 덕분에 길 곳곳에서 눈 오리, 눈 공룡, 눈 곰돌이, 눈 펭귄, 미니 눈사람을 원 없이 만났습니다. 처음엔 ‘귀엽네’ ‘앙증맞네’, ‘재밌나 보네’ 하며 웃음이 나왔는데요, 나중엔 ‘또?’ 라며 심드렁해졌습니다. 틀로 찍어내 똑같은 모습을 한 녀석들이 어디에나 있으니 그 풍경이 조금 지루하기도 했고요. 눈사람이란 자신만의 개성과 손맛으로 만드는 일종의 창작물인데, 이런 도구가 아이들 창의력을 퇴보시키는 게 아닐까, 오지랖이 넓어지더군요.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다 공원 한쪽에서 손으로 빚은 눈사람을 만났어요. 둥글게 굴려서 만든 눈덩이를 잘 쌓아 올리고 풀잎과 나뭇가지로 눈, 코, 입을 만들어놓았죠. 머리에 꽂은 사철나무 잎사귀와 감각 있게 장식해 놓은 낙엽 목걸이 덕분에 멋진 예술작품처럼 보였는데요.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겨울의 낭만이란 바로 이런 눈사람을 만나는 것!” 혼잣말을 하며 온갖 호들갑을 떨던 바로 그때, 근처에서 수상한 눈더미를 발견했어요. 치우려고 모아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 보였는데요. 정체를 확인하러 가까이 다가가 보았습니다.
덕지덕지 쌓아 올린 눈더미, 그 사이사이로 스노볼 메이커로 만든 미니 눈사람들이 장식되어 있었어요. 머리로 추정되는 곳에는 눈, 코, 입이 있는 듯 없는 듯, 느낌만 내고 있어 시크한 분위기를 풍겼는데요. 괴이하기도, 발랄하기도 한 그것은 분명 눈사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듣고 또 만들어왔던 눈사람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스노볼 메이커를 갖고 있었던 어느 꼬마작가가 탄생시킨 21세기 눈사람이 분명했어요. 마치 현대미술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계적인 현대 미술가 제프 쿤스의 작품 ‘플레이 도우’도 생각났어요. 아이들이 편리한 도구 때문에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요? 도대체 나는 왜 그런 꼰대 같은 생각을 했던 걸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셨습니다. 라테는 다름 아닌 이럴 때 찾는 음료더군요. 굳이 눈덩이를 굴려 쌓아 올릴 필요도 없고요. 나뭇가지나 돌을 이용해 인위적인 표정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눈을 쌓아 몸통을 만들고, 도구를 이용해서 찍어 낸 미니 눈사람을 느낌 있게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이 완성됩니다. 새로운 예술은 고정관념을 부순다더니, 우연히 만난 괴랄한?(괴의하고 발랄한) 예술품 덕분에 눈사람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은 스르르 녹아버렸습니다.
설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카페라테 한잔이 그렇게 고소할 줄이야, 금방 기분이 좋아졌어요.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도구를 이용해 전에 없던 무언가를 뚝딱 만들어내는 아이들, 이런 친구들이 만들어갈 미래가 기다려지더라고요. 봄이 오기 전에 한 번 더,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네요. 오랜만에 눈사람을 만들어보려고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스노볼 메이커든 뭐든, 새로운 도구를 찾아 써보려 합니다. 과거만 돌아보고 추억하며 멈춰있기보다 현재를 적극적으로 즐기고 미래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는 삶을 살고 싶거든요. 전에 없던 엉뚱한 눈사람을 만들어보는 일, 어쩌면 그게 시작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2022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