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콘 보다 진묘수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 전시>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인데요.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그 귀한 보물들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 급하게 공주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국립공주박물관 앞뜰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바로 이 녀석이었습니다.
도톰하게 튀어나온 코와 입술은 돼지의 그것과 비슷하고, 거대한 몸통은 하마를 닮았습니다. 머리에는 올록볼록한 쇠뿔이 달려있고요. 옆구리에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날개 문양이, 등에는 갈퀴가 달린 것도 인상적이더군요. 하지만 제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깜찍한 뒤태였습니다. 통통한 엉덩이를 살포시 덮고 있는 꼬리가 어찌나 앙증맞던지 자꾸만 쓰다듬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러야 했죠. 녀석은 진묘수(鎭墓獸),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입니다. 무려 천년이 넘도록 무령왕릉을 수호해 왔다는군요.
진품 진묘수는 전시관 내부에서 유리 벽의 철통 같은 경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야외 석상의 1/7에 불과한 크기지만, 훨씬 더 다부지고 강단 있어 보입니다. 전시관 벽면에는 무령왕릉 발굴 당시,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진묘수의 사진이 붙어 있는데요. '컴컴한 무덤 속에서 홀로 그 오랜 세월을 어떻게 견뎠을까?' 라고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대견하게 느껴지더군요.
1971년 발견된 무령왕릉은 일제의 수탈과 도굴에 난도질당했던 다른 무덤들과는 달리 어떠한 흐트러짐 없이, 침입 흔적도 없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찬란한 백제문화를 보고 감탄할 수 있는 이유, 모두 진묘수 덕분이 아닐까요?
왕의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는 우리나라만의 문화는 아닙니다. 중국의 신선 사상이나 도교 사상, 그리고 중국의 신화에서도 종종 등장하는데요. 중국의 장례풍습이 백제에 전해졌고 이것이 또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국립공주박물관에 비치된 책에서 중국과 일본의 다양한 진묘수들을 볼 수 있었는데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백제의 진묘수만큼 매력적인 녀석은 없었습니다. 귀여움과 위엄을 동시에 갖추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녀석의 매력에 빠져 진묘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수집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녀석의 오른쪽 뒷발이 부러져 있었다는 거예요. 아니 도굴을 당한 것도 아니라면서 왜 진묘수의 다리가 부러져 있었을까요? 설마 왕릉을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와 치열한 전투라도 벌였던 걸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요. 그중 한 가지는 조금 충격적이었습니다. 세상에, 진묘수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렸다는군요. 대체 왜 그랬을까요?
중국 양쯔강 연해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의미가 있는 ‘남경’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기 전까지 중국 남방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도 수많은 진묘수가 출토되었는데요. 모두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도망가지 말고 무덤을 지키라는 의미라나요?
도망갈까 봐 못 미더웠다면 임무를 주지 말았어야 했고요. 일단 임무를 주었다면 믿었어야지요. 아무리 석상이라지만, 왕의 묘를 지키는 존재를 이렇게 하대해도 되는 겁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묘수는 천년이 넘게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끝내 다리까지 부러뜨린 어리석은 인간들을 위해서 세 개의 다리로 왕릉을 수호해 왔죠. 충실하게 임무를 완수한 후에 부러진 다리를 회복했고, 이제는 박물관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해피엔딩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녀석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네요.
국보 제162호이자 고대 동아시아 무덤의 수호신이 된 진묘수, 어떤 이들은 진묘수의 머리에 달린 쇠뿔을 보고 서양의 유니콘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동양의 귀한 문화유산이라고 말합니다. 유니콘 전설을 기반으로 서양의 판타지나 아름다운 캐릭터들을 볼 때마다, 동양에는 저런 멋진 상상의 동물이 없을까? 궁금했던 적도 있었는데요. 이제야 그 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욕심이 하나 생겼어요. 이 매력적인 상상의 동물, 백제의 진묘수로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졌거든요.
어쩌면 눈 밝은 다른 예술가가 어디선가 먼저 작업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멋진 일입니다. 근사한 이야기는 세상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2022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