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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희 Feb 08. 2022

뒷장에 다시 해봐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미술 시간에 아이들에게 도화지나 색종이를 나눠주고 그리기나 만들기를 할 때가 있다.


그러면 꼭 활동 중간에 나와서 “선생님 저 망쳤어요. 새 걸로 바꿔 주세요”하는 아이들이 있다.


내가 볼 땐 종이 귀퉁이만 살짝 사용했거나, 연필로 몇 번 선을 그은 게 다이다. 그럴 때면


“뒷장에 다시 시작해봐~ 남은 부분을 활용해 봐~” 하고 다시 자리로 돌려보냈다.


물건을 아껴 써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과 누가 더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자원을 공평하게


나눠 써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대답이다.



예나 지금이나 잡다하게 좋아하는 것이 많다.


좀 더 어린 시절에는 잘하고 싶은 생각도, 잘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었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다소 즉흥적으로 달려들고, 또 그만큼 쉽게 빠져나왔다.


그런데, 요즘은 ‘재미있겠다.’ 보다는 ‘잘할 수 있을까?’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좀 더 어른이 되면, 30살이 되면, 다 괜찮아지고 잘하게 되는 줄 알았다. 살아보고 나서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지만 알았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예전에는 조금 부족해도 배려받을 수 있었고, 스스로도 ‘나아지겠지, 더 잘할 수 있을 거야.’하는 기대감으로 크게 속상하진 않았다.


어느덧 40대에 접어드니 집에서나 직장에서 할 도리를 해야 하는 위치에 와 있는데, 달라진 게 없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도움이 된다는 강의를 들어보기도 하고, 좋은 책을 읽으며 다짐도 해 보았다. 그런데 새로운 시작을 마음먹은 순간에 ‘잘할 수 있겠어?’ 하는 생각들이 자꾸 나를 관성의 길로 붙잡는다.


이미 늦은 것 같은 마음, 잘하려고 해도 예전의 부족한 내가 비웃을 것만 같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좋은 글, 좋은 말이 가식같이 느껴지고 와닿지 않는다. 예전의 내 모습을 다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 완전히 다른 내가 되고 싶은 마음. 새 종이에는 더 잘할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감.



새것으로 바꿔 달라던 그 아이가 나에게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가, 거절당한 서운함을 감추고 쓸쓸히 자리로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 새것을 달라고 말했던 아이가 다음번에는 더 대단한 작품을 만들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아이들처럼 주어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뭔가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고 생각했을 뿐.


그런데 정작 나는 늘 새것을 바라고 있었나 보다. 지우개로 지운 자국, 얼룩이 튄 자국, 볼펜으로 그어 지저분해진 자국들. 남아있는 흔적들 때문에 새것이 아니라고 징징거리며 핑곗거리를 찾거나, 망설이기만 한다.


망쳤다고 생각한 예전의 것도 멋있다는 말, 앞으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


그 말을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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