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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희 May 09. 2022

꼬이는 순간은 늘 절묘하다

정상이 아닐 때는 말을 아껴야 하는 법

마지막 발행된 글이 3월 2일, 딱 이틀 후인 3월 4일 저녁... 작은 아이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2월 말경 확진 판정을 받아 개학 후에도 등교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반별로 3~4명은 있었다.

'말로만 듣던 대유행이 이런 거구나' 싶어 퇴근길에 약국에 들러 성인용, 어린이용 영양제를 두 손 가득 사서

퇴근하던 날.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그 영양제가 예방이 아니라 와병 후 몸보신용으로 쓰이게 될 줄이야..


자정을 지나며 큰 아이, 둘째 아이 모두 고열로 넘어가 아이와 함께 방을 쓰는 친정엄마, 두 아이까지

모두 자가진단 키트를 했다. 결과는 모두 두 줄..


왜 불길한 예감은 늘 딱 맞아떨어지는 것일까?


마지막 발행 글의 말미에 엄마에 대한 염려와 감사한 마음을 늘어지게 써 놓았는데,

그 마음이 대부분은 거짓이었음이 3월 코로나로 밝혀졌다.

그 거짓된 마음을 인정하기 어렵고, 나 조차도 이해가 안 되어 한 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내 입에서, 내 손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글이 다 가식과 기만 같아 고통스러웠다.


고열로 벌게진 얼굴을 하고 숨을 할딱거리는 아이들, 아이들과 한 방에서 지내시느라

어느 하루 편히 주무시지 못했던 엄마..

세 사람이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부끄럽게도 엄마와 내 자식이 아닌 학교를 걱정했다.

'복직한 지 일주일도 안되어 대형사고치는 나... 어쩌지?'

'앞으로 일 년 내내 학급 아이들과 학부모님이 병균 보듯 날 대하면 어쩌지?'

예나 지금이나 남들에겐 관대하면서 나와 내 가족에겐 한없이 박하고 야멸찬 나..

남편은 지금 그걸 걱정할 때냐고 어이없어했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그것"만" 걱정되었다.

'마음 편히 외식한 적도 없는데...?'

'여행이란 걸 언제 가봤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도대체 왜? 나한테..? 우리 가족한테..?'

인정할 수 없었고, 견딜 수 없었다.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 남편이 계속 말려도 나는 자꾸 근원을 따지려 들었다.


새벽 4시 교감선생님과 보건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고, 출근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선별 진료소로 갔다.

작은 아이는 전날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여러 차례 코를 뚫려 선별 진료소에서는

코에 면봉을 넣지도 않았는데 선지 같은 피가 쏟아져 나와 검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키트 반응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복직한 이후로 일나 가서 돈 벌어 오는 엄마의 역할만 수행하는 나는

아이들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기에 당연히 "음성"이었다.

엄마인 내가 "양성"이고 외할머니인 친정엄마가 "음성"이어야 하는데,

나는 "음성", 친정엄마는 "양성"

선별 진료소에서도 우리는 서는 줄이 달랐고 자연히 두 아이를 챙기는 것도 친정엄마의 몫이었다.


남편은 2월 말부터 재택근무여서 따로 조치를 취할 것이 없었고,

엄마가 원하시는 대로 엄마를 친정에 모셔다 드리면서

병원에 들러 엄마, 아이들 약, (곧 나에게도 닥칠 코로나를 대비하여) 내 약을 처방받아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선별 진료소, 친정집, 병원을 거쳐 집에 돌아온 후

나와 아이들의 학교, 아이들 학원에 전화를 돌리며 상황을 전하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나도 곧 격리될 예정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하여 슈퍼와 정육점을 돌며 잔뜩 장을 봐왔다.

(코로나로 후각, 미각이 맛이 가서 이때 잔뜩 본 식자재나 군것질거리들은 격리 해제날까지 그대로 있었다.)


감염병 관련 법에 따르면 개인정보는 공개하면 안 되지만,

원래 학교에서는 교사의 인권보다 학생과 학부모의 알 권리가 강조되기 때문에

우리 집과 내 상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교감선생님께서는 아무리 코로나가 유행이어도 담임 가족이 확진인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니

그냥 "건강 이상"이라고만 전하라고 하셨다.

이 코로나 상황에 "건강 이상"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싶은 마음과 나는 그래도 "아직까지는"확진이 아니라는

결백함(?)을 증명하고 싶어 학급 밴드에 선별 진료소에서 받은 신속항원검사 키트 음성 사진을 올렸다.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글과 함께..

"음성"이어서 그런지,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요즘 같은 때에는 특별할 것도 없으니 주말 잘 쉬고 오라는 응원의 댓글들...

댓글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마음의 짐도 하나씩 늘어갔다. 왜냐하면 나도 곧 "양성"이 될 예정이기에..


마스크를 쓰고 조심하기엔 이미 어제 밥도 같이 먹었고, 애들이 아파서 곁에서 보살피느라

나는 이미 괜찮지 않음을 직감했고, 그렇다면 빨리 확진이 되어 격리 해제 일자를 앞당기는 게 최선이었다.   

동학년 단톡방에도 남편만 마스크를 쓰고 나는 마스크 벗고 애들이랑 같이 생활하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확진 판정을 받고 빠른 시일 내에 출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글을 남겼다.

동학년 선생님들도 그 마음이 뭔지 알기에 "그래라, 그러지 말라"라고 하지 못하고 그냥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음성"이고 증상도 없어서 "양성"의 의미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슬슬 밤부터 기침이 시작되고 목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토요일 아침 아이들의 확진 판정 문자를 받고, 동거인인 나와 남편은 다시 선별 진료소로 갔다.

남편은 가장 끝방에서 혼자 마스크를 쓰고 독상을 받는 감옥(?) 살이를 하는 중이어서 선별 진료소에 줄을 서면서도 서로 대화 없이, 최대한 멀찌감치 서서 검사를 받았다.

난 증상이 이미 "양성"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은 편했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점심때쯤 확진자 동거인은 사전투표시간이 다르다는 안내 문자가 왔다.

서서히 올라가는 열, 심해지는 인후통, 출산 이후 열만 났다 하면 동반되는 전신 근육통

집에서 밥차 릴 사람은 나 밖에 없는데,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밥을 하고, 6시가 될 무렵 소파에서 자던 남편을 깨웠다.

아이들 보호자를 나로 지정하여 확진자 동거인 투표시간 안내 문자가 나한테만 왔다는 걸 몰랐다.

남편은 투표 마감시간이 다돼가는데, 굳이 자는 사람을 깨워 나가자는 나를 이상한 여자 취급했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집을 나섰다.

울컥했지만, B형 남자의 그것이라고 애써 위안하며 투표소에 갔는데, 엄청난 줄을 보고 다시 주눅이 들었다.

자기는 음성인 데다가 사전투표를 할 생각이 없는데 왜 굳이 이 시간에 오자고 고집을 부리냐며 기다리는 내내 투덜거려서 계속 남편 눈치를 보았는데, 나중에 개표상황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지고 헛고생을 했나 싶은 마음에 속이 상했다.


아파서 그런 건지, 아플 때 알아주지 않는 남편한테 서운한 건지, 연초에 애들이 확진이라 앞으로 친구관계는 어떨지,, 복직해서 잘하고 싶었는데 일주일도 못돼 학교에 폐를 끼쳐 그런 건지,

앞으로의 내 직장생활이 꼬일 것 같아 불안해서 그런 건지....

가 아니고 이 모든 근심과 걱정, 서운함이 한꺼번에 밀려와 토요일 저녁부터 심사가 꼬이기 시작했다.


일요일 저녁나절, 복직해서 다닐만하냐는 친구들의 안부인사에 엊그제 애들이 확진 판정을 받아 격리 중이라 하니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친구들은 그동안 우리 집 식구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잘 알기에 "이젠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구나"하면서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여행도 잘 다니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친구들도 잘만 피해 가는 코로나를 내가 왜 걸려야 하는지 억울했고 그 꼬인 마음을 감추느라 말을 줄였다. 다음날 친구 한 명이 아픈데 밥 차리지 말고 시켜먹으라며 배달의 민족 5만 원 쿠폰을 보내주었는데, 전날 꼬인 마음으로 투덜거리던 속내를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장 월요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이 무거워서 일요일 저녁이 늦어질수록 괴로웠다. 금요일에 "음성"이었던 증거사진을 올렸으니 이제 "양성"이라고 해도 크게 나쁘진 않겠지? 싶은 마음과 아픈데도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는 내 상황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남편은 그런 것을 눈치 보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며 안쓰러운 마음 반, 답답한 마음 반으로 옆에서 훈수를 두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괜찮으신지 전화를 했는데, 놀랍게도 아버지가 아직도 검사를 받지 않으셨단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 왜? 금요일에는 아버지가 집에 늦게 들어오셔서 검사를 받지 못하시고, 토요일에는 아버지 친구분들을 만나러 나가셨다가 침 맞고 오니 또 시간이 늦어 받지 못하셨다는 이야기였다. 맙. 소. 사... 동거인이 확진인데 어떻게 검사를 안 받을 수가 있냐고 죄 없는 엄마께 화를 냈지만, 엄마는 "언제 아빠가 내 얘기 듣냐..?"란 말씀만 하셨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일관되게 본인만 챙기는 아빠의 모습에 너무나 화가 났다. 격리기간 동안 먹을거리나 필요한 생활용품을 사는 것도 아니고, 엄마 영양제나 약을 챙기는 것도 아니고...

친구를 만나고, 본인 침을 맞으러 아무렇지 않게 외출을 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어서, 말문이 막힌 채 전화를 끊었다.


사전투표를 했던 토요일에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가 추웠는데, 그 때문에 증상이 악화되었는지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는 계속해서 열이 39도였다. 너무너무 아프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는데, 약을 먹어야 해서 식사시간 -1에 알람을 맞춰놓고 알람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해서 밥을 차려먹고 약 먹고 자는 것을 반복했다.         


 전교에서 담임 중 확진자는 내가 처음이라, 교감선생님께도 동학년 선생님들께도 너무 죄송했다. 다행히도(?) 수요일에 선거가 있어서 그나마 보결수업이 하루 빠지게 되었다. 그 사실 하나가 격리기간 내내 크게 위안이 되었다.

확진자의 통증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되지도 않았고(나도 걸리지 전까진 오미크론이 이런 것인 줄 몰랐듯),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학년초에 담임 공백을 메꾸느라 정신없을 선생님들께 내 힘듦까지 늘어놓을 주제는 못되기에 계속해서 오는 카톡과 전화연락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실시간 대응을 했다. 아파 죽겠는데 밥 차리랴, 업무연락에 대응하랴 정신없는 내가 너무 짠하고 이런 힘듦 따위는 1도 생각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갑자기 미웠다.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엄마와 아이들이 자가 진단키트를 했을 때 굵고 선명한 엄마의 두줄과 두줄인지 한 줄인 지 애매해 보이는 아이들의 두줄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3월 1일 저녁 우리 집으로 오실 때 계속해서 잔기침을 하시던 엄마 모습도 생각났다. 아빠가 기침을 심하게 해서 꺼림찍하다며, 우리 집에 오신 뒤에 한참동안이나 마스크 벗기를 망설이시던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문제의 근원이 아버지 같았다.

 핸드폰을 찾아들어 무작정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빠 검사받으셨어요?"

"응, 오늘 받고 왔다."

"아빠, 금요일에 엄마가 두줄이 나와서 pcr검사받고, 토요일에 확진 문자가 왔는데.. 어떻게 금요일도, 토요일도 넘기고 오늘에서야 검사를 받으실 수가 있어요.? 친구도 만나고 한의원도 가셨다면서요? 사람들 만나고 병원 갈 때 거리낌이 없었어요? 아무렇지 않았어요?"

점점 격앙된 목소리로 마구 쏘아붙였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언제나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이런 목소리로 쏘아붙인 적은 없었다. 큰 목소리에 남편이 작은방에서 일하다 말고 안방으로 달려왔다.

"왜 그래...? 하지 마~~~" 라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아버지, 저는요 사는 내내 아버지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동네 사람들이나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

제 앞에서 아버지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고, 자존심 상할 만한 행동을 해도 그거 일일이 아버지한테 전하면서 탓하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제가 엄마한테 하듯이 아버지를 챙기지 않고, 따뜻한 말 한마디 안 한다고 서운해하시지만, 저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 아버지 때문에 받았던 상처,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 들먹거리면서 저한테 무례하게 하던 것을 전하지 않고 눌러 삼키는 게 아버지한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효도예요.. 아시나고요!!

저는 아버지 때문에 구비구비 힘들 때가 많았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이래요? 가족들이 코로나 때문에 다 고통스러워하는데 어떻게 검사도 안 받고 하던 일을 다 해요? 그것도 다 아버지를 위한 일이잖아요. 아버지 친구 만나 노시는 것, 아버지 아픈데 침 맞는 거. 엄마를 위하거나 저를 위한 게 하나라도 있어요? 엄마나 저나 아무것도 못하고 2년을 살았는데, 아버지 같은 사람이 막 돌아다니면서 저희처럼 엉뚱한 피해자 만드는 거라고 생각 안 해 보셨어요?"

너무너무 화가 났고, 마음속에 불이 났다. 옆에서 입모양으로 말리던 남편도 폭주하던 나를 말릴 수 없었는지 그냥 전화를 빨리 끊으라고만 했다.

"지금 이 상황이 장인어른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갑자기 전화해서 소리를 질러?"

이성적으로 물어보던 남편도 꼴 보기 싫었다.

"그냥, 아버지가 검사도 안 받고 친구 만나고 침 맞으러 가는 게 너무 우리 아버지 같아서 갑자기 화가 났어.

 나는 아픈 데도 내 할 일 다 해야 하고, 아마 엄마도 집에서 엄마가 하시던 일 다 하실걸? 집안일 걱정, 직장일 걱정 하나 없이 식구들이 아프든지 말든지 자기 생활하는 아버지가 너무 아버지스러워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소리라도 질러야 살 것 같았어. 그래서 전화했어."

"지금 이 상황 어떻게 수습할 거야?"

"몰라"

월요일 오후 그렇게 와다다다 미친듯한 전화통화를 마치고 약을 먹고 드러누웠다.


그렇게 화요일을 맞이하고, 선거날이었던 수요일부턴 증상이 많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담임이 없는 생활도 이틀을 넘어가니 적응이 되었는지, 학교에서 오는 연락도 전에 비해 확연히 줄었는데,

그러다가 한 어머님께 아이가 확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와는 관련이 없을 일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했다. 감사하게도 어머님께서 "요즘 같은 때는 누가 걸려도 이상할 게 없어요. 마음 푹 놓으시고 몸조리 잘하시고 쉬세요." 하는 문자를 보내주셨다. 금요일에 "음성"이라는 공지를 남겼을 땐 응원의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는데, 개인 사정으로 일주일간 출근을 못하게 되었다는 글에는 댓글도, 표정도 아무것도 없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혹시 담임이나 다른 학부모에게 오해를 살만한 말과 행동일까 조심스러워서 그랬을 것이라 위안했지만, 냉혹한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 같아 혼자 주눅이 들었던 차였다. 음성과 양성이라는 것만 다를 뿐인데, 너무나 다른 반응이 상처가 되었다. 그렇지만, '출근도 못하는 주제에 댓글이랑 표정 따위가 뭣이 중헌데?' 하는 생각에 그런 마음들은 그냥 넣어두고 있었다.     

 죄인 같은 마음으로 월, 화, 수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 학부모님이 보내주신 "마음 푹 놓으라는"문자가 그때까지 꽁꽁 언 마음을 한 방에 녹여주었다. 그 문자를 받고 펑펑 울었다. '나는 누군가 잔뜩 마음을 졸일 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있었나?' 싶은 후회와 오늘부터는 진짜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다는 마음.. 누가 나를 욕해도 한 사람은 괜찮다고 해줬으니, 진짜 다 "괜찮아"지는 느낌이었다. 금요일부터 수요일까지 5일은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어서 안 하면 안 되는 일만 꾸역꾸역 하면서 나머지 시간에는 불 꺼진 방에서 누워만 있었다. 그러다가 목요일에 그 문자를 받고 나선 음악도 듣고, 책도 읽었다. '그래도 될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지고 살만해지자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그렇게 확진자(?)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3월이 이렇게 지나가나 싶었는데, 이 묵은 응어리들은 4월을 진정한 Cruel April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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