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끄러운 고백, 뒤늦은 편지
선빵 날리기
난 늘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말해서 네가 얻는 게 뭐야? 그냥 가만히 있어도 네가 잘 하는 거 다 알아. 가만히 있는 애들을 왜 먼저 건드리고 다니는 거냐고!”
그 아이의 속마음은 나도 모른다.
‘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가 먼저 상처 주는 것, 내가 공격받지 않기 위해 먼저 공격하는 것’
내가 그렇게 판단했을뿐..
직설적인 아이에게 똑같이 직설적으로 대하면 못된 버릇을 고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고,
학급의 다른 친구들을 다 자기 발아래로 보는 그 아이에게 대항할 힘이 없는 다수의 아이를 대신하여 내가 복수하고 싶었다. 또 아이 못지않게 나도 심술부리고 싶었다.
간단한 퀴즈를 볼 때나 개인 활동을 해야 할 때, 실력이 뛰어난 그 아이는 주어진 시간의 반의반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결했다. 남은 시간 동안 그 아이는 책상에 얼굴을 그린다. 또렷한 눈매와 각진 턱의 카리스마 있는 남자 얼굴,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남자 얼굴, 아이가 그려놓은 만화주인공 같은 얼굴을 보며 가슴 한편이 찌르르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보통은 ‘또 시작이군, 그래서 뭐…. 이렇게 하는 게 네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면죄부라도 되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얼굴에 흉터가 있다.)
나는 그 아이가 거슬릴 때가 더 많았다. 교사는 모든 아이를 공평하게 대하고 사랑해야 한다지만, 솔직히 나는 그 아이가 밉고 불편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매일매일 똑같은 갈등을 처리하고 있다 보면 내 심성도 사나워지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그렇기에 거슬리는 마음, 미운 마음을 최대한 누르고 평정심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도 직업윤리를 한껏 발휘하는 중이라고 위안했다.
한준이는 우리 학교축구부 주전선수이자, 누구에게나 친절한 학급 부회장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다는 것은 칭찬의 의미도 있지만, 짠함의 의미도 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웃는 그 모습이 늘 신경 쓰인다. 다른 친구들을 배려하느라, 아니면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어 언제나 다른 친구들의 말을 먼저 들어주니 모두가 좋아한다. 한준이 어머님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친구들에게 인기 많은 아들을 미더워하기보다, 마뜩잖아하신다. 그 마음이 뭔지는 나도 알겠다. 실제로 어떤 아이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한준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려 하기도 한다. 그럴 땐 한준이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주책스럽게 끼어들어 판을 흐려놓는다. 야단치기도 뭐하고, 외면하기도 뭐할 땐 고스톱판 엎어버리는 아줌마처럼 무작정 끼어드는 게 제일 자연스럽다.
처음에 그 아이가 한준이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했다.
대하기는 만만하고, 인지도는 있는 친구니 친하게 지내면 이득이라는 계산, 자신의 심술을 가려주고 희석해주는 방패막이 같은 존재랄까?
한준이가 사정이 생겨 학교축구부를 그만두고 원래 살던 동네의 학교로 전학 가던 날
얼굴이 일그러지는 아이, 울먹임을 감추려 고개를 책상에 묻은 아이, 벌써 울고 있는 아이….
대부분의 남자아이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그 아이는 그 어떤 아이들보다 슬퍼 보였다. 아니, 슬픔을 넘어서 좌절감이나 막막함이 느껴지는 그런 표정이었다. 저 표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당황스러웠고, 계속 신경이 쓰였다.
우리 반에서 하던 미덕 활동을 토대로, 한준이가 가진 미덕에 대해 언급하며 한 사람씩 편지를 써서 선물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에게는 편지가 읽힐 거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공유하면 좋을 만한 편지 한두 개는 읽어주리라 마음먹었다.
편지를 책처럼 묶기 위해 한꺼번에 걷었는데, 그 아이의 편지가 눈에 띄었다.
항상 모든 학습지나 교과서를 대충 휘갈긴 글씨로 엉망을 만들어 놓곤 했는데, 이번 편지는 뭐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가지각색의 색연필과 사인펜을 사용하며 어여쁘게 꾸민 편지지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 눈에 확 들어왔고, 순간적으로 울컥하여 ‘울지 않고 잘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편지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한준아, 나는 화가 많고 늘 모난 모습이라 이런 내가 싫었는데, 네 곁에 있는 동안에는
너의 따뜻함과 부드러운 기운이 내게도 오는 것 같아 그 느낌이 참 좋았다. 그런 너와 1년 가까이 지내며 내 속의 화도 많이 사그라드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전학 간다고 하니 너무 막막하다.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나를 너의 옆에 있게 해줘서 고마웠고, 처음으로 나도 조금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줘서 고마웠어.
네가 해라면 나는 너의 빛을 받은 꽃이었던 것 같다. 고맙고 사랑한다. ”
아…….
읽다가 눈물이 나서 마지막은 염소 같은 목소리, 할머니 같은 목소리로 읽었다.
누가 잘되는 게 있으면 꼭 끼어들어 비아냥거리는 지호가 이번에도 끼어들었다.
“워~~~겁나 닭살 돋아. 뭐래~~~”
“미안하다. 널 우습게 만드려고 읽은 게 아닌데, 허락도 없이 읽어서 괜한 소리를 듣게 한 것 같다. 미안해”
“아니에요.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동빈이의 목소리도 흔들렸다.
그때가 11월 21일. 우리가 만난지 일 년이 다 될 무렵이었는데, 그토록 진심 어린 대화는 그 날이 처음이었다.
그 편지로 내 잔인한 오해가 박살 났다. 동빈이의 허락 없이 내 마음대로 편지를 읽어내렸듯이, 진심도 모르면서 내 맘대로 잔인하게 순수함을 할퀴고 구겨버렸다. 슬플 만큼 사랑스러운 아이의 진심은 허락도 없이 떠들어 웃음거리를 만들었는데, 잔인하고 부끄러운 오해는 꽁꽁 감춰버렸다. 불쑥 끼어들어 빈정거리는 지호가 얄미웠는데, 지호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내가 동빈이에게 사과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처음 “미안해”라는 말은 지호 때문에 한 사과였지만, 마지막 미안해 앞에는 주어가 빠졌다. 괜찮다는 너의 말을 감히 내가 들어도 되는 거니? 내 멋대로 네 마음을 재단해서 미안하고, 추잡한 속마음을 감춰서 미안하다. 진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