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풍경
교육이랄 게 필요 없는 영유아 한 명을 집에 계신 엄마께 맡기고 가까운 학교에 버스 타고 출근해 본 적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라도 한참 달랐다.
7살, 4살짜리 남자아이 둘을 데리고, 막히지 않을 때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처음 근무해 보는 학교로 복직을 하려니 심란했다. 뭘 걱정해야 하고 어떤 대비를 하는 게 맞는 건지조차 정리가 안 될 지경으로 그냥 막막했다. 교사라면 2월은 누구나 싱숭생숭하기에 이 느낌도 그런 맥락으로만 생각하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지만, 출근 전 한 타임, 출근, 퇴근 후 한 타임 인생을 3배속으로 살게 될 다가올 3월이 두려웠다. 두려움은 예민함으로 튀어나와 남편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 하나가 다 거슬려 함께 집에 있는 시간마다 사사건건 부딪히고 다퉜다.
그 해 나는 새벽에 일어나 차 안에서 아침으로 먹일 주먹밥과 과일 도시락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마친 뒤 자는 아이들에게 인형 옷 입히듯 억지로 옷을 끼워 넣어 눈곱도 떼지 못한 아이들을 데리고 출근을 했다. 어린이집 가방, 유치원 가방, 내 가방을 한 팔에 끼워 둘째를 어깨에 들쳐 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둘째는 거의 매일 내 어깻죽지에 침을 흘리며 잠을 자고, 순한 큰 아이는 멍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게 우리의 일상이었다. 7시 30분은 출근 피크 타임인지 늘 아저씨들로 자리가 꽉 찼다. 7시 30분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면 출근길 주황 신호에 무조건 달려야 하기에 어떡해서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늘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하며 그 시간대 출근하는 우리 동 아저씨들과 서로 얼굴을 익혔다. 학교 다닐 때 만원 버스에서 매일 보는 다른 학교 학생 같은 느낌이랄까? 매일같이 꼬맹이 하나를 어깨에 둘러매고 굴비 엮듯 끼운 가방 한 보따리와 서서 자는 아이 한 명을 데리고 나가는 아줌마가 딱했나 보다. 꽉 찬 엘리베이터를 아쉬운 표정으로 보내려 할 때마다 이름 모를 출근 동지들이 “여기 자리 있어요. 이리 들어오세요. 얘, 아저씨 옆으로 와” 하면서 가방을 받아주기도 하고, 큰 아이를 감싸 불편하지 않게 해 주시기도 했다. 어떤 때는 그분들이 남편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사 와서 이 동네 아줌마들은 하나도 못 사귀었지만, 우리 동 아저씨들만큼은 내가 제일 많이 알 거라며 남편한테 큰 소리를 친 적도 있다. 언젠가 한 번은 우리 부모님 또래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말씀하셨다.
“아유, 요즘 애들은 엄마가 바빠서 애들이 고생이네.. 딱하지.. 쯧쯧..” 할머니 말씀에 틀린 말 하나 없고, 무슨 의미로 하는 말씀인 줄 머리로는 이해되었지만, 몸도 마음도 지친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터라 ‘나는 지금 내가 제일 딱한데..’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던 할아버지께서 “아니, 바쁜 아침에 살림에 보탬되겠다고 애들까지 챙겨 나서는 애 엄마가 제일 고생이지, 쓸데없는 말 하지도 말라”라고 할머니의 혀 차는 소리를 막으셨다. ‘할아버지 옳소!’ 하면서 할아버지는 지금 일하는 딸이 생각나신 걸까? 일하는 며느리가 생각나신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어느 주말,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서 놀다 들어오더니 이런 말을 했다.
“여보, 어떤 아저씨가 우리 애들 보고 아이고 707동에서 제일 부지런한 형제들이구나! 이러시더라? 자기 이 동네에 아는 아저씨 있어?”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지금까지 장거리 출퇴근에 늘 지쳐있는 사람이라 나도 시시콜콜 내 힘듦에 대해 늘어놓지 않는 편인데, 나 대신 내 고단한 아침을 광고해주는 출근 동지들이 고마웠다. ‘아 동지여~~~~~’
“내가 이 동네에서 아저씨들 제일 많이 알걸? 나 우리 동 아저씨들 엄청 많이 알아. 나 없이 애들 데리고 다니면 자기 보고 저 양반이 마누라 고생시키는 그 양반이구나- 할지도 몰라. 혹시 31층 사시는 분이야? 애들한테 부지런하다고 말해주시는 아저씨면 그분일 것 같은데? 그분은 제일 자주 마주치는 분인데, 늘 우리 애들 챙겨주고 어려서부터 이렇게 부지런하니 크게 될 사람이라고 볼 때마다 칭찬해주셔” 하며 우리들의 아침 풍경을 읊어주었다. 실제로 그랬다. 31층 아저씨는 만날 때마다 우리 애들에게 덕담을 해주셨는데, 어느 날은 내 직업이 궁금하셨는지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시기도 했다. 공무원이라고 얘기하니, 이렇게 부지런한 공무원이 있으니 대한민국 잘 되겠다며 웃어주셔서 그날은 정말 하루 종일 피곤하단 느낌 없이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냈다.
언젠가 한 번은 31층 아저씨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그분의 아들, 우리 삼 모자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저씨는 나무랄 데 없어 보이는 훈남 아들에게 “야, 인사해. 아빠랑 맨날 같이 출근하는 형제들이야. 대단하지? 707동에서 제일 부지런하고 착해. 진짜 멋쟁이들이지. 너도 아기들한테 그런 부지런함 좀 배워라” 하셨다. 한창 크는 아이들의 꿀잠을 억지로 깨워 데리고 나서는 일상에 나는 마음 한구석이 늘 불편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그런 내게 만날 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응원해주시는 31층 아저씨의 존재는 남달랐다. 추운 날에도 아침잠을 푹 못 잔다며 혀를 차는 할머니의 걱정보다 우리 아이들의 고단함을 헤아려주시고 부지런하다는 말로 북돋아 주시는 31층 아저씨의 따뜻한 마음이 그 어떤 말로도 표현 안 될 만큼 참 감사했다. 오랜 휴직 후의 복직이라 그 사이 많이 바뀐 일들이 낯설고 어려웠다. 유난히 힘든 날 아침에는 31층 아저씨가 타고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도 했다.
퇴근할 때 늘 마주치는 퇴근 동지들도 있었다. 출근 동지들이 주로 40대 아저씨들이라면 퇴근 동지들은 50대에서 60대 아저씨들이었는데, 그중에서 음악전공자로 추정되는 아저씨 한 분이 계셨다. 베토벤 같은 꼬불꼬불한 단발머리에 주로 서양음악사 개론, 음악교육의 이해 같은 전공서적을 들고 타는 분이셨다. 만날 때마다 엘리베이터 벽에 머리를 기대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시는 분이어서 ‘우리 학교 음악과 남자 교수님들도 대부분 저런 스타일이신데, 이분도 음악과 교수님이신가 보다.’ 하며 지나쳤다. 내가 먼저 말을 건 적도 없고, 그분도 먼저 알은체를 하신 적이 없어 역시나 통학버스에서 매일 보는 학생 같은 느낌으로 지나치던 어느 날 “아유~ 매일 아이들 데리고 고생이 많으시네요.” 해서 깜짝 놀랐다. 누가 먼저 말을 트나 했는데, 저런 유니크한 캐릭터의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거시다니! 내가 그랬듯, 그분도 나를 꾸준히 관찰하셨나 보다. 퇴근하며 장을 볼 때가 종종 있었는데, 슈퍼에서 라면이나 과자를 잔뜩 사는 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애들은 그런 거 먹이면 안 좋아~” 하시고, 어쩌다 생협에서 장을 보는 날에는 “그래, 애들 어릴 땐 좋은 거 맥여야지.”하시며 훈수를 두는 그 음악인 아저씨가 정겨웠다. 그 아저씨는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는 누구와도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내게는 늘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셔서 뭔가 특별대접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느 날은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양복을 입은 중년의 신사가 꽃다발을 들고 계시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 누군지 몰라요?” 해서 보니 음악인 아저씨였다. 머리를 자르셔서 못 알아뵈었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 같이 타고 있던 다른 아주머니들이 “이 사람들 뭐지?”하며 약간 신기해하던 표정이 선하다. 알고 보니 그 음악인 아저씨는 유일하게 친분이 있었던 우리 동 아주머니의 남편분이셨다. 두 분이 부부인 줄 모르고 아주머니께 먼저 인사를 하니 “아니, 우리 누님을 아세요?” 하며 짓궂은 얼굴로 장난을 치셨다.
“아우 이 냥반이 또 짜증 나게 하네. 우리 아저씨 알아요? 우리 아저씨 낯가림 있는데 신기하네?”
두 분 다 좋은 분이셨는데, 두 분이 부부 사이라는 걸 알고 나니 뭔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또 다른 퇴근 동지는 18층에 사시는 할아버지시다. 한창때 사장님이거나 교장선생님이셨을 것 같은 느낌의 중후한 할아버지셨는데, 애들이랑 성당 얘기를 하다가 대화를 트게 되었다. “아우 천주교 신자 시구나.” “아.. 예... 신자는 신자인데, 지금은 냉담 중이에요.”
“아우, 저런.. 우리 자매님 꼭 다시 성당 나오셨으면 좋겠어요.” 만날 때마다 늘 정겹게 말 걸어주셔서 뵐 때마다 따뜻한 분이셨다. 언젠가 한 번은 놀이터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애들이 다급하게 불러서 따라가니 그 할아버지께서 서 계셨다. “왜? 무슨 일이야?”하니 “엄마랑 친한 할아버지잖아.”해서 그 할아버지도 웃고, 나도 웃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지나가시는데 우리 애들이 다급하게 “잠깐만요.” 하고 붙잡아서 멈추셨다고 하셨다. “애들이 나를 알아봐 줘서 고맙네요.”하시며 웃으시는데, ‘저렇게도 말할 수 있구나’ 싶기도 하고 나도 저렇게 말하는 할머니가 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집에 살면서는 계속 일을 해서 이렇다 할 이웃을 사귀지 못했다. 2020년 이삿짐을 챙겨 집을 떠날 채비를 하는데 ‘5년이나 살았는데 특별히 인사 나눌 이웃조차 없구나.’ 싶어 좀 서글프기도 했다. 결혼하고 살면서 살림에 맞추어 이사 다니고, 일하며 애 키우느라 특별히 연락하고 지내는 이웃이 없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올 때는 코로나 때문에 원체 교류가 없던 때라 주욱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다.
결혼 이후 내가 가장 힘들었던 때는 2016년이었는데, 출퇴근 동지들이 있었기에 너덜너덜한 몸과 마음을 붙잡고 일을 할 수 있었다. 고단한 일상에서 늘 마음을 달래주시던 소중한 출퇴근 동지들이 요즘 들어 문득 생각난다. 동지들이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고, 덕분에 여전히 잘 살고 있다고, 언제나 감사하다고 말씀 전하고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 힘을 주고 웃음을 주는 동지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