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틀에 들어간 삼각형 밥
단편선 7개가 모여 있는 이 작고 짧은 소설에는 “도시”라는 주제가 흐른다. 하지만 도시라는 단일한 주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같다. 도시는 바쁘고, 부조리하고, 욕망이 흘러넘치고, 편리한 공간이다. 도시의 편리함과 빠름에 사람들이 매료되어서 몰려들지만 그들 앞에 놓인 삶은 대단히 퍽퍽하다. 사람은 많지만 소통하지 않고, 서로를 의심하며 돕지 않는다.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이 소설들 속에서 도시에 대한 진부하고 일반론적인 접근 외에, 발전되거나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소설은 없었다.
작가들은 모두 도시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도시에서 살아야만하는 인간의 고통과 벗어날 수 없는 무기력함, 그 사이에서 살아남아보겠다고 치는 발버둥의 어느 지점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들이 겪는 모든 사건의 이유는 정말 도시인가. 물론 공간 즉 환경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무척 크다. 하지만 결국 사람의 문제가 된다. 시골에 조그마한 마을에 들어가면 소통이 되는가. 그 곳은 편한가. 오히려 그 외진 공간이 더 외롭게 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것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이 많기 때문에 마음이 열리면 소통이 더 자유롭고, 다양한 문화가 모이며,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차라리 신문기사를 읽으면 더 이해되었을 것 같은 소설 몇 편은 나에게 불편함을 선사했다.
조금 더 특별한 불편함은 정용준 작가의 <스노우>에서 받았다. 상상 가능한 공상 과학의 기반에는 언제나 현실이 있어야 한다.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서 접근해야만 그 막막함이 더 크게 이해되고 해결방법이 더욱 극적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3021년으로 가는 것보다 2027년쯤의 미래에서 일어나는 일이 더 재미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 가지고 있는 불편에 대한 아주 기발한 해결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도심이 무너졌는데, 종묘 재건 안하냐는 주인공의 투정은 문화재청에 대한 이해도, 도시의 생리에 대한 이해도 뭣도 없는 철부지 떼쟁이의 비명 같았다.
한국의 오늘을 살아가는 30대로서, 미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도심에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심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함을 나 역시도 겪고 있다. 이 소설 작가들은 나와 같은 선상에 놓인 일반인 같았다. 한 발을 더 내딛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몰려드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