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하오천 Sep 21. 2015

그리움마저 잊다 #3

눈 깜짝할 사이에 고2가 됐다. 학업 스트레스는 이전과 비할 바가 못 됐다. 양이는 더 이상 농구와 게임을 하지 않았다. 대신, 기타를 시작했다. 한창 인기를 끌었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기타 연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천추셩’을 쉬니엔이 유독 좋아했던 데다가, 반에서 기타 잘 치기로 유명한 녀석마저 쉬니엔에게 고백을 하자 질투심이 폭발한 양이는 급식비를 털어서 기타를 샀다. 매일 저녁 자율학습을 빠지고 기타를 배우러 다녔고, 대신 이른 새벽까지 잠을 안 자고 모의고사 문제집을 풀었다.

그렇게 자신을 들들 볶더니 결국은 아침 조회 때 운동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의사는 저혈당에 과로까지 겹쳤다며 2주 정도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것을 두고 전화위복이라 하는가 보다. 입원 한 바람에 수업을 들을 수 없었기에 쉬니엔이 매일 오후 병실로 와서 공부를 도와준 것이다.


사실 학생들의 연애 장소라고 한다면 다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학교 운동장이 아니면 기숙사, 그도 아니면 병실 정도. 한 병실 안에서 서로 기대어 있다 보니 기름을 조금만 부어줘도 감정이 급물살을 타게 마련이다. 양이의 고백도 병실에서 이뤄졌다. 그날 쉬니엔은 사과를 깎다가 칼에 손을 베었다. 연애를 드라마로 배운 양이는 순간적으로 상처 난 손가락을 자기 입에 넣었는데, 그만 흐르는 피에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민망한 듯 손가락을 빼서 다시 티슈로 감싸는 양이의 눈빛은,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나란 인간은 매번 왜 이러는지 몰라. 장난칠 때마다 담임한테 안 걸리는 적이 없고, 시험 답안지도 맨날 잘못 써내고…… 하다못해 좋아하는 애한테는 고백 하나 제대로 못 하니……”


쉬니엔은 괜히 모르는 척, 평소처럼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 여자도 참 운이 나쁘다.”


단순한 양이는 울듯 소리쳤다.

“너잖아, 너! 나의 여왕님!”


양이는 그날 저녁 바로 퇴원했다. 그리고 반창고를 손에 쥐고 쉬니엔 집으로 달려갔다. 쉬니엔 방의 창문까지 던져 보려고 했지만, 3층까지 올라가기에는 반창고가 너무 가벼웠다. 가방을 열어 집히는 대로 종이 몇 장을 꺼내 돌을 넣고 뭉쳐서 던졌는데 결국은 2층 창문을 깼고, 양이와 쉬니엔은 변상을 위해 한 주치 급식비를 털었다. 두 빈털터리는 루왕과 샹위엔에게 빌붙어 매일 점심을 만두로 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웃음이 날 수가 없었다.

시험지 냄새로 찌든 고2 때,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했다.


***


꽃집.

“넌 언제부터 날 좋아했어? 설마 병원에서 내가 고백했던 그날부터는 아니지?”

쉬니엔의 뒤에 선 양이가 묻는다.


“백합으로 할까, 국화로 할까?”

양이 물음에는 대꾸하지 않은 채 쉬니엔은 꽃 고르는 데에만 열중이다.


“계속 대답 안 하면 그냥 첫눈에 반했다고 생각할 거다! 역시 전학 첫날부터 이 오빠의 잘생긴 얼굴에 빠진 것이었군!”


“국화로 하자. 아무래도 네 수준에는 국화 정도가 딱인 것 같다.”


“치, 네 수준에나 딱이거든!”


계산을 마치고 나가던 쉬니엔은 멈춰 서서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한다.

“어떤 책에서 그러더라. 자꾸만 원인을 캐다 보면, 아름다웠던 결과마저 퇴색되는 법이라고.”


양이는 못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

열일곱 살의 쉬니엔도 무슨 뜻인지 몰랐을 거다. 그녀가 알고 있던 것이라고는, 대입을 앞둔 시기에 양이와 사귀는 것이 일종의 모험이라는 것, 하지만 포기하기엔 이미 양이가 너무나 소중해졌다는 사실 뿐이었다. 미래의 어느 날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난 학창 시절에 이런 연애도 해 봤어!


***

고3에 올라온 뒤로 양이는 공부에 무섭게 매진했다. 쉬니엔과의 연애는 공부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자극제가 됐다. 그가 가슴에 품은 우주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대입은 고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다, 그리고 반드시 쉬니엔과 같은 도시에 있는 같은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 하지만 학교라는 곳은 원래 학생 하나하나의 사정을 알아봐 주는 곳이 아니다. 마치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옷의 부속품처럼, 정해진 원칙에 따라, 정해진 길을 가야 했다. 예를 들어, 매 교시 모든 학생은 같은 시험지를 기계적으로 풀어야 했다. 문제지가 얼마나 많았는지 눈 운동하는 시간조차 고개를 박고 문제만 풀었다.


양이와 쉬니엔의 교제 사실을 알고 있던 담임은 걸핏하면 두 사람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려 했다. 하지만 두 번째 모의고사에서 보란 듯이 쉬니엔이 전교 5등을, 양이가 전교 13등을 차지하자 담임도 더 이상은 간섭할 수 없었다.

무릇 고3이란 성적만 좋으면 뭐든 용서되는 시기이다. 양이 역시 성적 좋은 학생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자기 책상과 쉬니엔 책상만 교실 뒤로 옮겨 둘만의 자습 공간을 만들었다. 한 술 더 떠서 담임과 “세 가지 금지조약”까지 체결했다. 전교 20등만 유지하면, 모든 과목 선생님은 시험지 푸는 것을 강요하지 않고, 두 사람의 연애에 간섭하지 않으며, 수업 시간에 틈틈이 자는 것을 허용해 줄 것. 어떤 선생이 봐도 노발대발할 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담임은 의외로 쉽게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명문대에 들어갈 만한 학생이 몇 명 없었으므로 그저 모른 척 눈감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입 시험을 백 여일 앞두고, 누군가가 매일 쉬니엔에게 초콜릿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박스도 핑크색이었다. 양이는 또 다시 질투로 불타올랐다. 하고 많은 초콜릿 중에 네가 위스키봉봉을 좋아하는 것을 그 자식이 어떻게 아느냐며 펄펄 뛰었다. 쉬니엔은 그런 양이를 살살 놀렸다. 다른 남자애들은 이렇게나 센스가 넘쳐요~ 머리에 김이 난 양이는 일주일치 용돈을 털어 하겐다즈 초콜릿 한 박스를 사 왔다. 자, 이게 모두 널 향한 내 사랑이야. 결과적으로 일주일 내내 초콜릿만 먹고 다닌 덕에 양이의 얼굴만 번지르르해졌다.


루왕은 집에 쌓여 있는 위스키봉봉을 홧김에 한꺼번에 다 먹었다. 그렇게 알딸딸한 상태로 쉬니엔을 찾아가 따졌다. 그렇게나 많이 보냈는데 죄다 돌려 보내다니, 열심히 풀어낸 수학 문제의 답이 제시 보기에는 없는, 그런 허망함이었다. 오랫동안 좋아했다. 어차피 안 될 거란 걸 알면서도 그 감정을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졸업하면 영원히 잃을 것만 같았다.


사실 루왕의 고백에 쉬니엔은 적잖이 감동했다. 이런 고백 앞에 안 넘어갈 여자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명확했다.


"초콜릿 돌려보낸 건 내가 아닌데... 난 그거 벌써 다 먹었거든. 그렇지만 무슨 특별한 의미를 두고 먹은 건 아니었어. 중학생 때부터 위스키봉봉을 제일 좋아했으니까. 앞으로도 누군가가 위스키봉봉을 선물해준다면 고마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겠지."


드디어 대입 시험이 끝났다. 교실은 엉망으로 나뒹구는 책과 공책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책들 틈에서 양이는 아무도 모르게 쉬니엔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약속했다. 언제나 네 옆에 있을게.


졸업 전 가진 굿바이 파티에서 네 사람은 모두 취했다. 루왕은 주사 하나 없이 얌전히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쉬니엔은 고함을 지르며 옛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고, 양이는 옆에 앉아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내내 흐트러짐 없던 샹위안마저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샹위안은 반쯤 남은 술병을 양이 눈 앞에서 흔들며 말했다. 우리 넷은 평생 헤어지기 없기다! 서로 절대 잊으면 안돼!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루왕 집으로 돌아왔다던 그 초콜릿, 실은 내가 보낸 거야. 중학교 학생기록부에 위스키봉봉을 좋아한다고 적혀있는 걸 봤거든... 난 너랑 쉬니엔이 참 부럽다. 좋아하는 마음도, 미워하는 마음도, 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니까. 난 그저 우정이라는 명분으로만 루왕을 사랑할 수 있겠지. 이거 비밀이다! 비밀 꼭 지켜줘야 해!"


취해서 어질어질하던 양이도 그 순간에는 샹위안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래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그 마음을 대신했다. 샹위안은 남은 술 반 병을 다 마셔버리더니 말했다.

"비밀 하나 더 있는데, 중3 때 원어민 선생님한테 대들어서 징계받았잖아. 그때 담임이 쉬니엔 뒤에 앉아서 공부하라고 한 거, 그거 쉬니엔이 담임한테 가서 그렇게 하겠다고 한 거야. 쟤 정말로 너 많이 좋아해."



한국에서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단편 소설 <그리움마저 잊다>를 브런치에 연재 중입니다.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