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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오천 Sep 17. 2015

그리움마저 잊다 #2

중학교 3학년 2학기, 쉬니엔을 향한 루왕의 고백은 양이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했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쉬니엔이 계속 자기를 신경 썼으면 싶었다. 웬만한 건 다 겨뤄봤기에 더 이상 그녀와 붙어볼 종목도 없었다. 그러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경쟁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냈다. 성적. 고등학교에 자동 진학하더라도 반 배정은 성적에 맞춰 새로 하게 될 테니 정신 바짝 차리라고, 담임이 엄중하게 경고한 날이었다.


처음 시도했던 작전은 늘 그랬듯 어리바리하게 실패했다. 공부 잘하는 쉬니엔의 노트를 훔쳐다가 베꼈는데, 노트가 반 전체로 퍼져서 모두 같은 답을 써낸 바람에 결과적으로 쉬니엔까지 담임에게 혼났다. 또 잔머리를 굴려서 참고서의 기출문제 정답만 달달 외우는 방법도 써봤지만, 객관식은 어떻게 해결했어도 주관식은 풀 수가 없었으니 역시 실패였다. 그 외에도 온갖 방법을 생각해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하다 못해 커닝 마저 잘못 베끼거나 발각되기 일쑤였다. 결국 성적은 여전히 밑바닥에 머물렀다. 성적표를 고쳐서 집에 가져가면 늘 엄마에게 발각됐고, 담임은 인심을 써서 50점 이하를 호명하지 않았으나 성적표를 받으러 나가는 쉬니엔에게 늘 점수를 들키곤 했다. 남자의 자존심은 그렇게 무너졌다.


그랬던 양이의 성적에 변화가 생긴 건 순전히 ‘해리포터’ 때문이었다. 영화 개봉 당시 중국 전역에 마술 바람이 불었는데, 평상시 양이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한 명이 영화에 심취한 나머지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가겠다며 기차역 플랫폼 벽에 돌진했다. 이 이야기는 순식간에 학교 전체로 퍼져나가 웃음거리가 됐다. 어느 날 영어 시간에 원어민 선생님은 무슨 비유를 하다가 이 이야기를 꺼냈고, 친구를 감싸주고 싶었던 양이는 영어로 더듬더듬 반발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Fuck”이라고 외쳤다. 화가 난 선생님은 양이에게 분필을 던졌고, 양이는 그대로 달려 나가 선생님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이 사건으로 학교는 그의 고등학교 진급을 불허했다. 루왕을 부둥켜안고 눈물, 콧물 다 빼며 울고 있는 양이에게 담임이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남은 한 학기 안에 반 석차를 10등까지 올리면 담임 재량으로 고등학교에 자동 진학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다. 자리까지 쉬니엔 옆으로 옮겨 주며 마음 단단히 먹고 모범생이 시키는 대로 잘 해 보라고 했다.

“제가 쉬니엔의 공부를 방해할 거란 생각은 안 하세요?”

담임은 비웃듯 대답했다.

“네놈이 어디 그럴 수나 있을지 한번 보자.”


담임 말이 맞았다. 독설의 여왕 앞에서 양이는 기도 못 펴고 움츠러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자체 발광하는 찬란한 외모’라고 자화자찬하던 우월감도 쉬니엔 앞에서는 이상하게 열등감으로 변했다. 쉬니엔은 막중한 책임을 느꼈는지 양이의 학습 계획을 굉장히 타이트하게 짰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계획표를 받아 들고 양이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에야 말로 진짜로 쉬니엔을 눌러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온갖 것을 다 질문해서 쉬니엔이 공부할 시간을 뺏어 버리자. 진짜 열심히 해서 이번에는 꼭 쉬니엔을 이겨 보자. 그래서 당당하게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거다.


***


“고1 때 말이야, 시험 볼 때 항상 제일 먼저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갔잖아. 왜 그랬던 거야?”

핸들에 몸을 기댄 채 앞 차들의 붉은 브레이크 등을 멍하게 바라보는 쉬니엔의 눈에 나른한 졸음이 서려있다.


“간지 나잖아!”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며 양이가 대답한다.


“야, 똑바로 말 안 해?”


“일종의 훈련인데, 문제 푸는 시간을 점점 줄여 나가는 거야. 특히나 그 망할 놈의 물리나 화학 같은 과목은 제한 시간을 타이트하게 잡아야 더 열심히 공부하게 돼 있거든. 안 그랬다면 나 같은 애가 어떻게 너랑 같이 이과에 갈 수 있었겠어? 나 원래 숫자만 봐도 토하는 인간이잖아.”

양이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왠지 눈 앞이 뿌예지는 것 같아서 쉬니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양이만 바라본다.

문득, 눈을 감고 있는 양이의 얼굴 뒤로 꽃집이 보인다.

일렬로 서 있는 차들은 여전히 움직일 기미가 없는 듯하다. 쉬니엔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린다.


“잠깐 가서 꽃 사오자.”


***


고등학교 1학년 2학기가 되어 문과와 이과로 나뉠 때 샹위안과 루왕은 문과로 갔고 양이는 쉬니엔을 따라 이과로 갔다. 그리고 그때 즈음 양이는 처음으로 야동을 접했다. 원래는 정말로 왕자위 영화를 빌리러 간 것이었는데 대여점 사장님이 DVD를 잘못 준 듯했다. 신세계의 문은 그렇게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양이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쉬니엔을 떠올릴 때마다 아랫도리에 반응이 왔기 때문이다.


분명 쉬니엔과 대결한답시고 너무 붙어 다녀서 이런 거라고, 일종의 후유증 같은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청소 당번일 때는 자기도 모르게 쉬니엔 자리만 빙빙 돌며 걸레질을 하고 있었고, 작문 시간에 여자 인물 설정을 할 때는 이상하리만큼 쉬니엔만 떠올랐다. 쉬니엔 뒷자리에 앉는 주에는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지만, 한 주가 지나 자리를 바꾸는 월요일이 오면 죽는 고통이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마음이 쓰라렸다. 심지어 쉬니엔이 텔레비전이나 선풍기 아래에 서있기라도 할 때면 행여나 텔레비전과 선풍기가 머리 위로 떨어질까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욱신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한 병에 걸린 것 같았다.


어느 날 샹위안이 잡지를 가져 와서 심리테스트를 해줬다. 양이는 C타입, ‘지켜주는 사랑’으로 나왔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당신은 겉보기엔 강해 보이나 실제로는 자신감이 결여돼 있습니다. 그녀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서 괜히 강한 척 하는 것이지요. 사랑도 미움도 마음속에 꽁꽁 숨겨놓는 이런 성격 때문에 정작 아름다운 인연을 놓칠 수도 있답니다. 그러니 어서 용감하게 고백하세요!’


가벼운 병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양이는 고백할 타이밍을 찾기 시작했다.

학교 전체가 정전됐던 어느 날, 어둠을 헤치며 조심조심 밖으로 나오면서 쉬니엔의 손을 살짝 잡았다.

“이런, 너무 깜깜해서 내 얼굴이 안 보이겠네.”

사실은 얼굴이 빨개졌다는 것을 이렇게 돌려서 말한 것인데, 쉬니엔은 재수없다는 듯 손을 홱 놓으며 말했다.

“너 그러는 것도 병이야, 왕자병!”

또 한 번은 영어 시간에 양이를 포함한 몇 명이 불려나가 칠판에 받아쓰기를 했다. 이번 기회에 두 눈 딱 감고 제대로 고백해보자고 생각한 양이는 본래 이렇게 적을 생각이었다. “I love you, 쉬니엔!” 그러나 긴장한 탓인지 어이없게도 love의 스펠링이 헷갈리는 것이다. o가 먼저인지 v가 먼저인지 한참을 서서 고민하다가 결국 고백도 못 하고 선생님이 시킨 것도 못 적어서 단어 백 번 쓰기 숙제를 해야 했다. 크리스마스에는 멜로디 카드를 주면서 고백을 하려고 했는데, 카드를 받아 든 쉬니엔이 카드를 열자 황당하게도 캐럴이 아닌 생일 축하 노래가 흘러나왔다. 무한 반복하는 생일 축하 노래에 맞춰 “메리 크리스마스”까지는 말했지만 그 뒤에 이어 말하려고 했던 “좋아해”는 차마 입에서 꺼내질 못 했다. 쉬니엔은 혀를 차며 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마야, 병원에 좀 가 봐야 하는 것 아니니?”


양이는 필시 하늘이 자기를 갖고 논다고 생각했다. 진작부터 양이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던 샹위안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이미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놨어. 사랑할 운명이라면 어떻게든 이어지겠지만, 그 반대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안 이루어질 거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뭔가 의미심장하다.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남자들이 줄줄 따르는 얼짱님이, 어떻게 이런 걸 다 간파했지? 샹위안이 말했다. 사실 나 루왕 좋아하거든. 그 애는 날 안 좋아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단편 소설 <그리움마저 잊다>를 브런치에 연재 중입니다.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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