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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오천 Sep 15. 2015

그리움마저 잊다 #1

샤워를 마친 쉬니엔이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걸어 나온다.

암막 커튼을 젖히자 파랗고 쨍한 하늘이 드러난다.


베이징에 온지 어느덧 4년이 됐다.

졸업과 동시에 이곳으로 온 뒤 지금껏 한 외국계 기업의 경영팀에서 일하고 있다.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계약과 자금 문제를 확실하게 처리하는 그녀를 사장은 두텁게 신임하고 있다. 어느 회식 자리에서였나, 사장은 집값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골라보라는 말까지 했었다.


물론 지금 이 집은 그녀 스스로 마련한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회사 사장의 호의를 함부로 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남자의 말은, 모두 믿을 게 못 된다.


쉬니엔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스물여섯. 피부는 아직 괜찮은 편이고, 팔자 주름이 옅게 보이긴 하지만 뭐 이 정도면 셀카 찍은 후 보정이 가능한 수준이다. 스물다섯을 기점으로 노화가 시작된다던데, 한번씩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다는 것 외에 아직 다른 특이 사항은 없다.

그녀는 커피를 내린 후 옷장 깊은 곳에서 검은색 코트를 꺼내 입었다. 2년 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사온 이 한정판 코트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가오나시’ 같다는 주변의 혹평 덕에 바로 옷장 신세가 됐다.

일 년에 딱 한 번, 이날만 꺼내 입는다.


옷 매무새를 가다듬던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열쇠의 감촉에 미간을 찌푸렸다. 곧 무엇에 이끌리듯 서랍장을 향해 걸어가더니 서랍 깊숙한 곳에서 하트 모양의 상자를 꺼낸다. 열쇠를 꽂아 뚜껑을 열자 가장 위에 올려져 있던 생일 축하 카드 한 장과 오디션 합격 카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아래로는 편지 한 뭉치와 게임팩, 카세트 테이프가 상자를 꽉 채우고 있다.


“또 옛날 생각이야?”

문득 남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쉬니엔은 관자놀이에 통증을 느끼며 뒤를 돌아본다.

양이가 바나나를 입에 물고 방문 앞에 서있다. 헐렁한 후드티를 입고 후드티에 달린 끈을 손가락에 칭칭 감고 있는 그는, 큰 키에 마른 체격, 세상 무서울 것 없다는 듯한 자신감 충만한 표정, 중학생 때 모습 그대로이다.


“밖에 커피 내려놓은 거 아니야? 다 식겠어.”

그가 웃으며 말한다.


허겁지겁 상자 뚜껑을 덮는데 팔찌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다.  

‘영원한’이라고 새겨진 진주가 달려있는 미완성 끈 팔찌.

이 팔찌에 담긴 이야기는 2003년부터 시작된다.


***


중학교 2학년 때 전학을 온 쉬니엔은 하필이면 성적이 가장 나쁜 꼴찌반에 배정받았다. 교생 선생님도 울고 나갔다는 그 반에서 주로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는 양이와 루왕, 두 남학생이었다. 양이의 이름에 들어 있는 불 화(火) 자 네 개를 두고, 친구들은 ‘불처럼 타오르는 막강 괴롭힘’이라고 생각했지만 양이 본인만은 ‘불처럼 타오르는 최강 미모’라고 해석했다. 또 다른 문제아인 루왕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이였다. 멋있는 척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잘생기고 멋진 외모였는데, 또 신기하게도 모범생 같은 얼굴을 해가지고는 양이와 어울려 다니며 말썽을 일으키곤 했다.


얌전히 공부나 하고 싶었던 쉬니엔은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 했다. 쉬니엔의 질문이 길어져서 쉬는 시간을  잡아먹기를 몇 차례, 결국 그녀는 반 전체의 적이 됐다. 처음에는 별로 심하지 않았다. 지나가다 마주치면 눈을 흘기는 정도였다. 하지만 점점 그 강도가 세졌다. 어느 날은 의자에 본드가 가득 발라져 있었고, 어느 날은 교과서에 발로 짓누른 자국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쉬니엔은 신데렐라처럼 그 모든 것을 묵묵히 견뎌냈다. 그 모습은 마치 태양계에서 버림받은 명왕성처럼 외롭고 가엽기 그지 없었다.


한 번은 할로윈을 맞이해서 양이가 반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담임이 갑자기 파티를 금지하며 전원 자율학습을 명령했다. 기대했던 파티가 무산되자 잔뜩 화가 난 양이는 바로 담임을 골려 줄 계획을 짰다. 날이 어두워지며 선생님들이 모두 퇴근하자 교무실로 가서 담임 책상 위에 죽은 쥐 한 마리를 올려놨다. 그리곤 몰래 숨어서 담임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들어온 담임이 혼비백산하며 소리를 지르는 순간에는 교무실 불까지 꺼버렸다. 어둠 속에서 문을 찾아 뛰어 나가던 담임은 설상가상으로 문 앞에 길게 붙여져 있던 스카치 테이프에 얼굴마저 붙어 버렸다. 물론 양이가 사전에 설치해놓은 것이었다.


신나서 달아나던 양이와 루왕은 하필이면 복도에서 쉬니엔과 마주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코가 퉁퉁 부은 채로 나타난 담임은 바로 범인을 색출해냈다. 벌로 운동장을 열 바퀴나 뛰며, 분명히 쉬니엔이 일러바친 거라고 양이는 확신했다. 그날 이후로 쉬니엔을 향한 양이의 본격적인 괴롭힘이 시작됐다. 쉬니엔의 자전거 바퀴가 펑크 났고, 도시락 통에서는 바퀴벌레가 나왔으며, 화장실에 갇히기도 했다. 어딘가에 숨어있는 교과서와 필기도구를 찾아다니느라 쉬니엔은 매일같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무시하듯 참아내던 그녀도 바닥에 내팽개쳐진 책가방과 그 옆에 두동강이가 난 비취를 본 순간에는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 비취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긴 유품이었던 것이다. 쉬니엔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조용히 교단으로 올라갔다. 몇 초간 정지된 화면처럼 서있던 그녀는 갑자기 양이를 향해 분필을 집어 던졌다. 입을 비튼 채 거만하게 앉아 쉬니엔의 항복을 기다리던 양이는 기습 공격에 깜짝 놀라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하지만 더 강하게 교탁을 내리치는 쉬니엔의 기세에 슬그머니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꽃보다 남자를 대체 얼마나 본 거야? 네가 구준표냐? 남을 짓눌러야 자기가 돋보인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거 오산이야. 어렸을 때 많이 당해봤나 보지? 귀찮아서 상대 안 하려고 했더니 갈수록 가관이네. 그리고 너, 루 뭐시기, 넌 쟤랑 쌍둥이야? 아니면 마누라야? 꼴같잖은 것들이 머리에 똥만 차서는! 파리가 앉았다가 다 미끄러지겠다! 그러고 다니다가 감방까지 같이 가겠어? 엄마 뱃속에서는 안 붙어있었나 몰라?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는데, 한 번만 더 건드리면 이 비취랑 같이 우리 아빠 옆에 묻어 버릴 줄 알아!”


예상치 못했던 쉬니엔의 반격에 교실에 있던 아이들 모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이날 이후로 쉬니엔은 독설의 여왕이 됐다. 신데렐라처럼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당당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 앞에 남학생의 절반이 무릎을 꿇었다. 쉬니엔을 따르는 아이들 숫자가 금세 양이네와 맞먹는 수준이 됐다. 심지어 반에서 가장 예쁘다는 샹위안마저 쉬니엔과 친구가 됐다. 쉬니엔의 화끈한 성격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양이의 독재를 막아줘서 고마운 마음이었다.


이렇게 해서 쉬니엔과 양이의 피 터지는 싸움이 시작됐다. 양이는 뭘 하든지 간에 쉬니엔을 이기려 들었다. 어린 혈기에 외국 록 음악만이 최고라 여겼던 양이는 쉬니엔이 좋아하는 주걸륜 같은 국내 가수는 무시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쉬니엔의 등장 이후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주걸륜 노래를 합창하다시피 불렀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양이는 결국 방송반 친구를 매수해서 쉬는 시간에는 무조건 린킨파크 음악을 틀라고 시켰다. 그리곤 보란 듯이 교단에 서서 빗자루를 들고 기타 치는 흉내를 냈다. 또한 그때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창 유행이었는데, ‘샤먼킹’, ‘이누야샤’ 같은 소년 만화에 빠져있던 쉬니엔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대작 애니메이션을 좋아한 양이 사이의 신경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진정한 애니메이션이 과연 소년 만화냐 아니면 대작 애니메이션이냐를 두고 반 전체가 두 편으로 나뉘어 싸우기까지 했다.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양이는 무협 소설을 좋아했고 쉬니엔은 로맨스 소설을 좋아했다. 하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문 실력을 지닌 쉬니엔을 보며 배알이 꼬인 양이는 밤을 새워 그녀가 좋아한다는 궈징밍 작가의 소설을 다 읽어냈다. 구시렁거리면서도 자존심을 꾹꾹 눌러 가며 주요 문장을 달달 외워버렸다.


하다 못 해 농구로도 쉬니엔과 경쟁했다. 양이와 루왕은 농구를 좋아하긴 했지만 농구팀에 들어갈 실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쉬니엔과 샹위안이 농구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면 마치 강백호쯤 되는 기세로 ‘우리 팀’ 운운하며 들으란 듯이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어느 날 쉬니엔이 평소처럼 농구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갑자기 농구공이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원래는 피하려고 한 것인데 어쩌다 보니 손바닥으로 공을 내리쳤다. 그래서 그냥 다시 던져줬을 뿐인데, 그게 단번에 골대로 들어가 버렸다.

농구부는 쉬니엔을 스페셜 멤버로 임명했다. 열 번을 던지면 여덟 번을 성공시키는 쉬니엔을 보며, 양이와 루왕은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농구를 해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넣느냐고 묻자, 이게 다 ‘보글보글’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대결은 게임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번에는 양이와 루왕이 가장 잘하는 ‘몽환서유’에 쉬니엔이 도전하기로 했다. 쉬니엔이 이길 경우 앞으로 그녀 말에 다 따르고 공부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결과적으로 ‘몽환서유’에 이어 웬만한 게임은 다 붙어 봤지만, 게임이라고는 몇 번 해 본 적도 없는 쉬니엔이 언제나 이겼다. 양이와 루왕은 속임수 운운하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쉬니엔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게임이라는 건, 들인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이 머리의 문제거든.”


***


2014년.

조수석에 앉은 양이가 룸미러에 달린 장신구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때 루왕 고백은 왜 거절했어?”

옆에서 보니 양이의 속눈썹이 굉장히 길다. 쉬니엔은 대답 없이 운전만 하고 있다.


“루왕처럼 말수 없는 애가 고백까지 했는데, 그걸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냐.”

“그 얘긴 왜 꺼내는데?”

이제야 입을 연다.


“그냥 그렇다고……”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잠시 멈췄다가 말을 잇는다.


 “......그냥 루왕 고백을 받아주고 싶네.”


길고 긴 침묵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단편 소설 <그리움마저 잊다>를 브런치에 연재합니다.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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