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하오천 Sep 24. 2015

그리움마저 잊다 #4

꽉 막힌 길에 갇힌 차는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쉬니엔은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고 몸을 내밀어 앞차들의 동태를 살핀다.

시계를 보는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난다.  


"많이 늦었어?”

마음 급한 그녀와는 다르게 양이는 느긋하게 앉아서 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쉬니엔은 대꾸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다. 한 번씩 곁눈질로 양이를 슬쩍 볼 뿐이다.


“아니면 그냥 지하철 탈래? 저 앞에 지하철역 있네!”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Subway’간판을 가리킨다.  


“저건 샌드위치 가게잖아.”


쉬니엔은 기가 막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칭화대 이름에 먹칠을 하는구나.”


“칭화대가 온 세상 샌드위치 가게 이름을 다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 칭화대가 너네 샤먼대처럼 그렇게 글로벌하지 않아서 말이지.”


양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쉬니엔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운다.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한참을 침묵하던 쉬니엔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아파서 시험 망친 게 아니었어. 너와 같은 대학에 가고 싶어서 배점 높은 두 문제를 일부러 안 풀었던 거야. 그런데 네가 그렇게 시험을 잘 볼 줄 누가 알았겠어? 칭화대에 들어가다니. 이런 걸 두고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는 건가? 우린 원래부터 그렇게 떨어져 지낼 운명이었나 봐.”


***


합격 통지서가 나왔다. 루왕은 상하이로 갔고, 쉬니엔은 남쪽에 있는 샤먼으로, 양이는 북쪽에 있는 베이징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이 커플의 생이별보다도 모두를 놀라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샹위안이었다. 샹위안은 대입시험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광저우의 명문대에 입학했다. 그녀가 부정을 저지른 건 아닌지 의심을 하던 차에, 뒤늦게 그 명문대 이사장이 그녀의 아버지임을 알게 됐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몇 년 동안 내내 붙어 다니던 4인조가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쉬니엔이 샤먼으로 출발하던 날, 양이는 공항리무진 밖에 서서 쉴 새 없이 당부했다.


“매일 전화해야 해.”

“남자들이 작업 거는 거 조심하고.”

“몸 잘 챙겨.”


그렇게,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뜨거운 태양 아래 서서 쉬니엔 곁을 지켰다. 양이는 출발 전 쉬니엔의 손목에 끈 팔찌를 하나 묶어줬다. 그리고 버스가 출발하자 뒤쫓아 뛰기 시작했다.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전력을 다해 뛰었다.


내내 뒤를 바라보던 쉬니엔은 빨개진 눈으로 몸을 돌려 바로 앉았다. 양이가 묶어준 팔찌에는 “영원한”이라고 새겨진 진주가 달려있었다. 양이는 이 팔찌를 반 학기 내내 책상 밑에 숨겨두고 몰래 하나하나 엮었다.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나중에는 팔찌 만드는 꿈마저 꿀 정도였다.


입학 후 양이는 칭화대의 킹카가 됐다. 스무 살 양이는 한층 성숙해졌고 멋있어졌다. 오랜 시간 농구를 해 온 덕에 몸도 좋았다. 두 팔을 번쩍 올리는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꿈틀대는 그의 성난 근육에 쓰러지는 여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2 때 쉬니엔에게 잘 보이려고 배워놨던 기타 실력으로 기타 동아리도 만들었다. 그때처럼 양이를 따르는 친구들이 아주 많아졌다.

대학에 갓 입학한 친구들의 관심사는 온통 야동과 게임, 아니면 여자에게 잘 보이는 것이었다. 양이는 그런 비천한 욕망들을 비웃으며 고고하게 기타를 매고 쉬니엔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그의 뒷모습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듯했다. 이 형님은 야동 같은 거 안 본다, 여친님이 계시니. 이 형님은 소싯적에 이미 그 게임들 다 마스터했다, 그때 너희들은 고작 슈퍼마리오나 하고 있었을걸. 굳이 안 꾸며도, 이 형님은 아침에 거울 볼 때마다 놀란다, 너무 잘 생겨서.


2학년에 올라간 뒤 양이는 부쩍 바빠졌다. 각종 활동과 행사 때문에 쉬니엔에게 보내는 문자는 확연히 줄었고, 자기 전에 통화할 때도 “잘 자”만 서둘러 말하고 끊기 바빴다. 가뜩이나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거리에 있는데, 그나마 문자와 전화 통화로 그 마음을 견디고 있는데, 그마저도 마음껏 할 수 없게 되자 쉬니엔은 혼란스러워졌다. 게다가 뭐든 확실하게 해야 하는 쉬니엔의 성격상, 손에 닿지 않는 남자친구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만 멀어지자 머릿속으로 혼자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감정은 조금씩 곪아갔다.


그러다 결국은 곪은 게 터지고야 말았다.

어느 날 양이는 과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술이 과했는지 여자 동기에게 기대 잠이 들었다. 친구들은 장난으로 사진을 찍어 QQ공간에 올렸는데, 그걸 쉬니엔이 어떻게 타고 들어가서 보게 된 것이다.


양이네 과에는 서른을 조금 넘긴 굉장히 재미있는 여자 조교 선생님이 있었는데, 강의할 때마다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상황을 설명하곤 했다. 그날도 스핑크스에 대해 강의하다가 인도식 영어 발음과 재미난 동작으로 학생들을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양이만은 무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전방 12시 방향에, 뭔가 굉장히 바보 같은 물체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업 내내 핸드폰이 울렸다. 쉬니엔이 보낸 스무 통이 넘는 문자는 모두 그 사진에 관한 것이었다. 문자로 얼마나 쏘아댔는지 그 내용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전화로 싸우기 시작했다. 강의실을 나와 식당을 거쳐 기숙사 방에 들어갈 때까지, 오후 다섯 시에 시작한 전화 통화는 밤 열한 시까지 이어졌다. 말싸움 스킬로는 쉬니엔을 이길 수 없었지만, 싸움의 기세를 몰아가는 건 양이가 우세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외친 한 마디, “그래, 나 원래 여자 끌어안는 거 좋아해!”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쉬니엔은 얄미울 정도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럼 오늘 이후로, 넌 네 갈 길 가라. 난 지금 운전 중이라서 이만.”

가볍게 끊은 전화 뒤 쉬니엔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었다.


열한 시 반이 되자 평소와 다름없이 기숙사 전체가 소등됐다. 베이징에 와서 배운 욕이란 욕은 죄다 하나씩 내뱉으며 양이는 반복해서 손가락으로 휴대폰 액정을 밀었다. 화면이 밝아졌다가, 몇 초 후 꺼지고, 다시 밝아졌다가, 꺼지고…… 휴대폰 불빛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져있었다. 순간 배터리가 다 됐는지 전원이 꺼졌다. 액정 화면이 꺼짐과 동시에 화면을 밀어 넘기던 손도 멈췄다. 그리고는 갑자기 뭐가 떠올랐는지, 급히 방을 뛰쳐나갔다.


기숙사 전기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조작하지만, 각 층마다 두꺼비집이 따로 있긴 했다. 그러므로 자기 층의 두꺼비집을 열어 전원을 켜면 그 층은 다시 전기가 들어온다는 의미다. 하지만 두꺼비집 열쇠는 기숙사 관리 선생님에게 있었다. 아이들은 종종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몰래 열쇠를 빼내오기도 했다. 하지만 바른 생활 이미지의 양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잘생긴 사람은 그런 짓 안 한다.” 하지만 사실은 걸릴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매일 밤 기숙사 소등 후, 옆 동 기숙사 애들이 환한 불빛 아래 신 나게 노는 모습을 부러워하며 바라보기만 했었다.


마음이 급해진 양이는 후다닥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관리 선생님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소화기로 내리쳐서 두꺼비집을 부쉈다. 전기가 들어오자 다시 방으로 뛰어 들어가 충전 케이블을 꽂았다.


그리고 12시 정각, 쉬니엔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한참 울린 뒤에야 비로소 “왜.”라는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양이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생일 축하해.”


두 사람은 화해했다. 여자들은 그렇다. 남자친구를 괴롭게 만들려고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지만, 정작 괴로운 건 자기 자신이다. 반면 남자는 여자친구가 정말로 싫어진 게 아닌 이상, 아무리 싸우고 헤어지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졌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날 부서진 두꺼비집의 범인으로 양이가 지목됐다. 학교는 양이에게 책임을 묻고 학칙대로 처분할 것이라고 했다. 하마터면 자백할 뻔했으나 조교 선생님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양이가 평소에 얼마나 성실하고 멋진 학생인데요, 그런 무식한 행동을 했을 리가 없잖아요. 다들 양이가 범인이라고 생각해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양이는 의아했다. 그저 소녀 같은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머리도 별로 안 좋으신가?

그런데 며칠 뒤 조교선생님이 양이를 불렀다.

“그날 식당에서 여자친구랑 싸우는 거 다 들었어. 다음부터는 소화기 같은 것 말고 공구를 사용하도록 해. 아무도 못 알아차리게 말이야. 양이 학생, 밤에 힘들게 충전해 가며 전화할 생각하지 말고, 낮에 여자친구한테 자주 전화해.”

양이는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양이 인생에 이렇게 좋은 선생님은 처음이었다.


4학년이 되자 모두 취업 준비에 돌입했다. 쉬니엔은 베이징에 있는 외국계 기업에 취업하는 것을 목표로 준비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외국계 기업이 튼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베이징으로 가서 양이와 함께 지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한동안 잠잠했던 양이의 중2병이 또 도졌다. 갑자기 무슨 연예인이 되겠다며 상하이에서 열린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지원한 것이다. 하지만 심사위원 얼굴도 구경하지 못 하고 예선에서 떨어졌다. 너무 밋밋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떠나려던 길에 예선 접수를 하고 있는 루왕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팀을 결성해서 다시 지원했다. 양이는 기타를 연주하고 루왕은 노래를 불렀다. 햇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남자와 우울한 매력으로 휘감은 남자가 이룬 조합은 여성 팬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네 명의 심사위원은 두 사람이 함께 쓴 자작곡에 합격 버튼을 눌렀다.

“이 곡은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쓴 곡입니다.”


루왕의 멘트에 깜짝 놀란 양이는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물었다.

“졸업하고 샹위안과 연락한 적 있어?”

“어쩌다 한 번씩.”

“샹위안이 무슨 말 안 해?”

 루왕은 고개를 저었다.


양이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땐 그렇게나 친했는데, 떨어져 있던 몇 년간 형식적인 안부나 주고받는 관계가 됐다. 샹위안의 비밀은 영원히 비밀로 묻어둬야겠다. 가슴에 품은 모든 것이 현실이 될 수는 없으니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가는 것, 그런 사랑.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니까. 부족한 듯, 아쉬운 듯, 그런 게 인생이니까.  


결과적으로 본선 무대에는 올라가지 못 했다.


그리고, 긴장감에 꽉 쥐어 구겨진 예선 합격 카드는, 양이가 쉬니엔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 됐다.




한국에서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단편 소설 <그리움마저 잊다>를 브런치에 연재 중입니다.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