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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e Jan 03. 2023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글을 쓰고 있는걸까

나이가 들어 처음 해외 생활을 시작하면 가장 그리운 것이 고향의 음식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나는 캐나다에 온 후 희한하게도 음식보다도 유달리 고향의 말과 글이 그리웠다. 한국 유학생과 이민자가 많은 곳이니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영어 한마디 안 하고 한국어로만 대화하며 살 수도 있지만, 그런 일상 대화보다도 소설 속에서 시골 마을의 풍경과 별별 들꽃의 내음을 묘사하는 서정적 은유들이 절실하게 그리웠다. 그 이유 중 일부는 아마도 연구실에서 영어로 나의 생각과 주장을 논리적이면서도 적당한 문학적 비유를 섞어가며 멋지게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한국어로 하는 만큼 되지가 않으니 분해서 생긴 억하심정일 것이다. 너희들은 영어가 모국어라서 참 좋겠다, 그런데 그거 아니? 한국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희들이 쓰는 말로는 번역할 수도 없는 다양하고 섬세한 표현이 넘치는 아름다운 언어란다, 하는 소심한 반감의 애국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하게도 전자책으로 웬만한 소설은 이역만리 캐나다에서도 바로 다운받아 읽을 수가 있는 시대에 나는 살고 있는 것, 박완서, 오정희, 박경리를 크레마에 다운받아 읽으며 일찍 눈이 떠지는 날에는 코에 새벽 공기를 한 번 가득 밀어 넣고 필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별안간의 애국심만으로 시작되었다고 보기에는, 책은 나에게 그 이상의 존재, 그러니까 오랜 시간 동안 존재를 잊고 지내다 다시 만나도 금방 친해져 버리는, 그런 어린 시절 단짝 친구 같은 존재와 같다.


어릴 때 나는 늘 책을 읽는 어린이였다. 측두엽에 저장된 나 자신의 가장 어린 순간의 기억은 그림책을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청소년기와 이십 대는 그리 책과 가깝지 못했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글을 곧 잘 써서 글쓰기 대회마다 기대 이상의 상을 타오는 어린이였다. 하지만 유년기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던 책읽기와 글쓰기는 학창 시절의 지나오며 어느새 어려움을 넘어 서 급기야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 배경 중 하나에는 나의 원가족에게 여느 공산당 이념서적보다도 불온한, 지금까지도 언급조차 금기시되는 나의 초등학교 졸업 기념 문집 사건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졸업을 기념해 6학년 담임 선생님들이 학년 문집을 발행하기로 계획하시고 아이들에게 글을 하나씩 써오도록 하였다. 나는 당시에 학원을 대여섯 군데 다니고 있었다. 물론, 내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엄마가 짜 준 학원 스케줄이었다. 글을 곧 잘 쓰는 초딩이었던 나는 몇 개의 학원에 다니고 있는지, 학원에 앉아있는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싫어하는 학원에서는 멍하니 앉아만 있다 오는 그 시간들이 얼마나 지루한지에 대한 글을 써서 제출했다. 국어 담당이던 당시 담임 선생님은 나의 글이 어른들은 모르는 어린이들만의 생각과 애환을 재치 있게 잘 표현했다며 가장 잘 쓴 글로 선정하여 교지의 맨 앞에 실어주셨다. 나는 집에 돌아와 학년에서 최고의 글쓰기로 꼽혔다는 자랑스러움으로 교지를 엄마에게 내밀었다. 엄마는 글을 읽으며 얼굴빛이 실시간으로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교지를 내동댕이치고는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엄마의 날카로운 칼 같던 말들은 이러했다. “너는 엄마를 학원을 뺑뺑이 돌리는 악독한 계모로 만들었다, 너 같은 불효자식은 어디에도 없다, 이 글로 우리 가족은 동네에 개망신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시골로 야반도주를 해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엄마가 원했던 이상적인 우리 모녀의 모습은, 고상하게 최소한의 사교육만을 추구하려는 엄마의 의지에도 불구 공부 욕심이 많은 둘째 딸이 하도 학원에 보내달라 성화를 부려 어쩔 수 없이 학원에 등록해주고 알아서 늘 일등을 차지하는, 그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엄마의 트로피였다. 그런데 내가 교지 지면을 통해 사실은 엄마가 만들어놓은 연극의 정반대라고 만천하에 까발려버린 것이었다.


엄마는 며칠이 지나도록 나에게 극도로 화가 나있었고, 나는 그동안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엄마의 눈이 두려워 내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간신히 화장실만 왔다 갔다 하며 밥도 언니가 방문을 두드리면 엄마의 경멸의 눈을 피해 간신히 몇 숟가락만 먹고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서른이 넘은 지금의 내게 누군가가 학원 좀 그만 다니고 싶다는 피노키오 동요의 가사 같은 초등학생의 귀여운 투정이 온 가족이 야반도주를 해야 할 죄악이라 우긴다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코웃음을 치고 넘길 것이다. 그러나 나를 위해 헌신하는 엄마를 계모로 몰아버린 자신의 악랄함, 그런 죄를 저지른 줄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교지를 엄마에게 내밀었던 자신의 멍청함을 깨달은 열두 살의 소심한 어린이는 그렇게 방에 숨어 마음속 텃밭에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씨앗을 정성스레 심고 열과 성을 다해 물을 주고 있었다. 어른이 된 후에도 가슴이 무너지는 이별과 뼈아픈 배신의 순간들마다 나의 영혼이 찾아가는 나만의 우울의 고향,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거대한 나무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고향은 그때 나갈 수 없는 방문을 꼭 닫고 침대에 누워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의 작은 방 그곳이다. 교지는 당연히 쓰레기통에 처박혔고 집안에서 그 누구도 나의 졸업을 축하해줄 수는 없었다. 밤새도록 울어 퉁퉁 부은 얼굴과 눈으로 찍힌 졸업 사진은 못났을뿐더러 그때 겪어야 했던 괴로움을 상기시키기에 나는 졸업앨범을 두 번 다시 열어보지 않은 채 곧 버려버렸다. 학원을 여러 군데 다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면 애초에 왜 학원에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발칙한 반문은커녕 생각조차 품었다가는 발가벗겨 쫓겨날 것만 같아 나는 그저 내 죄를 깊이 뉘우칠 뿐이었다. 그 후 엄마는 동네 아주머니들을 마주치면 자신은 안 보내려고 하는데, 내가 계속 학원을 보내달라고 조른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서 그렇게 말을 하면 엄마의 기분이 풀어질까 싶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곤 했다.


아빠는 아빠대로 문제였다. 아빠는 늘 내 일기를 훔쳐 읽고는 내용이 유치하다며 놀리는 것이 취미였다. 발을 동동 구르며 일기를 읽지 말아달라고 아무리 신신당부해도, 일기장을 다른 책에 안 보이게 꼭꼭 숨겨두어도, 아빠는 꼭 일기를 꺼내 읽었다. 안 읽은 척을 하다가도 술에 거나하게 취한 날이면 전두엽이 마비되어 탈억제가 되는지 가족들 앞에서 그 내용을 읊으며 놀리곤 했다. 결국 포기한 나의 일기는 부모님이라는 독자를 향해 쓰는 일기가 되어버렸다. 어차피 비웃음을 살 것을 알기에, 더 깔깔 웃으라고 일부러 과장된 중이병스러운 문구를 골라 적기도 했다. 그렇게 일기는 더 이상 일기가 아니게 되었고 성적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자연히 일기와 글은 내게서 멀어져갔다. 일상 생활에서도 나의 생각이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늘 두려워하며 표현에 극단적으로 소극적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말이던 글이던, 어디서나 이쪽도 저쪽도 거슬리지 않을 것 같은 애매모호한 중립적 의견을 선호했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발설이 서른이 넘어서도 못 고친 중이병을 온 세상에 까발려 비웃음을 사게 될까 걱정했다.



그 동안 나는 엄마의 트로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나의 이상을 엄마의 이상과 착각하며 인생의 도장깨기에 성실히 임했다. 대학과 사회에서 늘 특출 나려고 뒤에서는 기를 쓰면서도 앞에서는 재능으로 쉬이 이뤄낸 것인 양 포장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서른이 넘고 아이를 낳고 교수가 되고 아무리 도장 깨기를 해도 인생은 끝없이 다음 라운드로 넘어갈 뿐, 행복이 무엇인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당연히 우울증은 디폴트, 우울증 약은 스무 살 때부터 산후우울증까지 늘 함께해온 친구였다. 엄마가 분명히 '너도 니 애 낳아보면 엄마가 얼마나 고마운지 알 거다'라고 했는데, 아이를 낳아보니 더더욱 그때의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울과 의문들은 아무리 덮어두려 해도 찔끔찔끔 흘러나왔고 그럴 때마다 부모님에게 듣는 말은 '넌 너무 예민해'였다. 어엿한 중산층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으면서, 미디어에 나오는 끔찍한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의 피해자도 아니면서, 감사할 줄도 모른다는 자기 검열이 다시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부르는 악순환이었다. 탈출구가 필요했던 무의식이었을까, 직장 문제를 핑계 삼아 홀린 듯이 외국행을 추진했다. 그 와중에 언니에게 심리 상담을 추천받았다. 상담을 받으면서 자신의 성장 배경을 하나씩 되짚어보게 되었다. 교지와 일기, 두 작은 일화로만 소개하기에는 아쉬운 부모님의 많은 행동 패턴들이 나르시시스트의 그것과 유사함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혼자 울다가 분노했다가 용서했다가 이해해보려 애쓰다가 다시 울기를 반복하고 있다. 상담 선생님은 꾸준히 일기를 쓰며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을 추천했다. 향수에서 시작된 요상한 애국심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고르던 중에 고수리 작가의 <마음 쓰는 밤>을 읽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써도 된다는, 한겨울 핫초코처럼 시종일관 따뜻한 작가의 글에 잠자는 아기 옆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에버노트와 노션과 원노트 여기저기에 흩어진 메모와 자투리 글들을 모아 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를 데리고 혼자 떠나 온 캐나다에서, 뜬금없이 미라클 모닝을 실천하며 글을 쓰고 있다. 아무도 과거의 나를 모르는 곳에 와 새로이 적응을 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켜켜이 쌓아 올려진 역할들에서 조금은 벗어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나는 어쩌면 책과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보다. 감수성과 뇌가소성이 뛰어날 십 대 후반과 이십 대에는 책과 글을 멀리했던 만큼 지금도 글쓰기는 서툴다. 난해한 소설은 읽기 힘들다. 글은 유려하지 못하다. 아빠가 나의 일기를 놀렸듯이 사람들이 나의 글에 비문이 넘쳐나고 내용은 유치하다 비웃을까 두렵다. 왜곡된 반응이라는 것을 이성으로는 알아도 사람들은 나의 글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도 자율신경계에 각인된 반응은 쉬이 고쳐지지가 않는다. 언젠가 나의 생각과 감정이 그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정제가 된다면 어딘가에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그러한 정제의 순간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서서히 직감했다. 그래서 써보려고 한다. 고수리 작가님이, 먼저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들이, 글쓰기는 치유라고 한다. 쓰다 보면 달라진다고 한다. 잘 쓸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들의 말을 믿고 나도 한번 쓰고 나누어보려 한다. 다른 이들의 평가를 떠난 나를 위한 글쓰기를. 그리고, 교지에 투고했던 글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고 기억에서도 애써 지워버렸기에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시공간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열두 살 어린 나에게 글을 정말 잘 썼다고, 기특하다고 전해주고 싶다. 초등학교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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