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가,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연세대학교 수학 영재교육원 선발 시험에 합격했다. 경시 대회라던가 경시 수학이라는 것들의 존재를 모른 채 내신 수학 선행 학습만을 했던 상태에서 덜컥 합격을 해 버린 것이다. 쭈뼛쭈뼛 들어선 강의실에서 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은 다들 서로서로를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교과서 밖의 수학을 처음 알게 되었고, 훗날 고등학교 동창들이 될 몇몇 친구들을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영재원이 참 좋았다. 학교 수학 너머 정말로 생각과 집중이라는 걸 해야 하는 진짜 수학을 만난 것 같았다. 유명한 대학교의 교수님에게 수업을 듣는다는 것도 참 자랑스럽고 설레었다. 나는 교수님의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정말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빼곡히 노트필기를 해 와 복습도 하고 예습도 했다. 중간 중간 시험도 있었는데 경시 대회 수학을 이미 접해 본 친구들 사이에서 제법 나쁘지 않은 성적을 유지했다. 그때의 어린 나를 돌이켜보니 새삼 대견하다. 그때 좀 더 자기 자신을 아껴주었어도 되었는데.
그런데 내가 가장 설레었던 것은 수업도 수업이지만, 영재원 수업을 들으러 신촌으로 향하는 그 길이었다. 영재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생뚱맞게도 이거였다. ‘지하철 타고 다녀야지!’ 언니와 나는 잠실에 살면서 대치동에 있는 학원들을 다녔고 엄마는 모든 학원에 우리를 차로 데려다주었다. 더군다나 학교도 도보 거리에 있어서 나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버스나 지하철을 혼자 타본 적이 없었고 그로 인한 콤플렉스 비스무리한 것이 있었다. 지금은 별천지가 되어버린 잠실이지만, 정아은 작가의 <잠실동 사람들>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재개발 전의 잠실은 빈부격차가 심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에 사는 재벌 3세 친구도 있었고, 신천 뒷골목의 허름한 빌라 반지하에서 어렵게 사는 친구들도 있었다. 우리 집은 아시아선수촌과 반지하 사이의 그 넓은 스펙트럼 사이 정가운데에서 약간 선수촌 쪽으로 더 치우친 그런 어중간한 형편의 집이었다. 삼전동에서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같은 반 친구들이 서로 회수권을 빌리는 것을 보고 내가 순진하게 그게 뭐냐고 물었을 때, 그 친구들은 나를 대중교통을 타본 적이 없는 좋은 동네에서 곱게 자란 아이 정도로 취급했다. 정작 엄마는 언니와 내 학원비를 대느라 생활비가 늘 모자라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우리 둘을 대치동에 라이드 해주느라 얼마나 힘든지를 우리에게 눈치주곤 했다. 영재원은 대치동 학원이 아니니까 나도 친구들처럼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지! 마치 대학생 언니오빠들처럼 나는 신촌으로 지하철을 타고 공부하러 가는 거야! 돌이켜보면 귀여운 중학생의 두근대는 꿈이 있었다.
영재원 수업은 토요일 오후 3시 께에 시작해 3시간 정도 수업을 하고 6시쯤 끝이 났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종합운동장이고 연세대학교는 신촌역에 있으니, 2호선 순환선을 반대로 타도 한 정거장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정 반대에 있어 꼬박 오십여분의 이호선 여정이었다. 지금은 설렐 것이 손톱만큼도 없는 지루하고 나른한 일상의 상징물이 되어버린 이호선 지하철이 그때 나는 너무 즐거웠다. 대학생 때 지겹게 타고 다니던 동안의 지하철은 좋은 기억 하나 남아있지 않은데 희한하게 그 신촌을 오가던 중학생의 지하철은 선명한 낭만의 순간들로 남아있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오후, 합정에서 당산으로 넘어가는 당산철교를 지나갈 때 창 밖의 한강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광활했고 그 위로 드리운 노을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매번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그 시절 지하철 승객들은 각자 책이나 신문을 보고 있다가도 그때만큼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창밖의 노을을 감상했는데 그럴 때면 객차 안에 묘하게 달콤한 유대감의 공기가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못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던 기억도 있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신촌으로 향하는 지하철 구석 자리에서 지난주의 정수론 수업 내용을 필기한 노트에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읽고 있는데, 문득 뒤통수가 따가워 고개를 들어보니 수학의 정석을 들고 있던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언니가 턱이 떡 벌어져 내 노트 필기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중학생에게 별천지가 지하철뿐이었을까, 처음 본 신촌의 벽화터널, 신촌역 번화가의 화장품 매장들과 포장마차에서 흘러나오던 떡볶이 냄새들도 아직까지 나의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러니까 영재원 수업은, 매주 신촌으로 떠나는 나의 작은 여행 비스무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작은 여행에는 훼방꾼이 있었다. 엄마였다. 엄마는 영재원의 첫 수업부터 자신이 신촌까지 데려다주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고 싶은 적도 없었던 대치동 학원에 데려다줄 때마다 매번 데려다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이 학원비가 우리 집에 얼마나 부담인지에 대해 설파했으면서. 그것을 신물 나게 들어온 내가 옳다구나, 신촌에 혼자 다니겠다 선언하자 하자 정작 그것은 반대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토요일 대낮에 우리 집에서 연세대까지 가려면 신촌역 앞 번화가에 꽉 막혀 하염없이 시간을 허비해야 했기에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고, 시간 예상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하철을 타고 가면 우리 집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연세대 강의실 문 앞까지 걸리는 시간을 오차범위 5분 이내로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무슨 마음인지 첫 수업부터 자기가 데려다주어야 한다며, 길이 막혀 2시간도 걸릴 수 있으니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에 오라고 아침부터 성화를 부렸다. 영재원의 수업 시작이 3시이니 1시 전까지 집에 오라고 했다. 12시 20분에 토요일 4교시를 마치고, 1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구나 생각하며 집에 가려고 학교 정문을 나가는 길이었다. 그날 따라 친해지고 싶었지만 몇 번 대화를 나눈 적 없던 반 친구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친구가 말했다. 'OO아, 너는 공부 잘하니까 학원도 많이 다니지? 집에 가면 너희 엄마가 왜 이제 와! 학원 가야 되는데!라고 하는 거 아니야?' 라며 농을 걸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정말 마법처럼 아니 끔찍한 저주처럼 저 앞에서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나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야 이 미친년아, 영재원 늦으니까 집에 빨리 오라고 했어 안 했어, 엄마는 내 손을 낚아 채 나를 끌고 소나타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나는 친구에게 설명하면 할수록 비참해질 것이 명백한 이 개 같은 우연에 망연자실해 친구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엄마에게는 분명히 약속했던 귀가시간이 한참 남았음을 따져보지도 못한 채 차에 올라탔다. 친구는 자신의 예언이 1초 만에 적중한 것에 본인도 놀라 숨 넘어갈 듯 깔깔대며 집으로 향했고 우리는 더 이상 가까워지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엄마가 되었고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가 되어보면 그때의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으니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그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엄마를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자매의 성공은 자신의 성공이자 트로피였고 우리의 실패는 수치이자 망신이었던 조건이 붙은 엄마의 사랑 속에서 아마도 그 영재교육원은 또 하나의 자랑스런 트로피였기에 그 현장에 반드시 자신의 족적을 남겨야 했으리라. 성공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해야 할 길에 우리의 정서나 감수성은 하찮은 걸림돌이었으리라. 그 하찮은 것이 거대한 우울의 뻘이 되어 내 발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해도.
한 때는 내 몸의 일부였던 아이가 내게서 나와 기고 서고 걷더니 저 멀리 뛰어갔다 돌아오기도 한다. 한 살이 되고 두 살이 되고 점점 고집이 생기고 자기주장이 생기고 다양한 감정을 표현한다. 나는 매일 기도하고 다짐한다. 내 사랑에 조건을 붙이지 않기를. 너의 마음과 너의 감정을 충분히 헤아려주기를. 너의 생각과 마음이 커지는 그 공간만큼 너를 내 곁에서 조금씩 밀어내다가 언젠가 완전히 너를 떠나보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