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집 주방 창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간판은 봄날스터디카페입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쬘 것 같은 봄날과 스터디라, 뭔가 부조화하기는 하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봄날을 맞이하는 의미로 붙인 이름일 테지요. 그래서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찾아와주는 봄날의 햇살과 가을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마냥 감사할 따름입니다.
길고도 길었던 2024년 여름이었습니다. 올해 봄날이 있었던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건 3월의 추위와 4월과 5월의 너무 일찍 찾아온 여름 같은 낮과 여전히 초봄의 싸늘함을 지닌 밤들을 보내야 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면서 오늘도 어제와 같으리라 기대하며 맞이하는 일상의 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되짚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전 빔 벤더스 감독 영화라는 이야기만 듣고 영화관을 찾았던 기억이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퍼펙트 데이즈(2023, Perfect Days)’라는 영화였는데, 영화관을 들어서는 순간 상영관을 잘못 들어왔나 싶어 나가서 확인하고 다시 들어왔죠. 도쿄의 허름한 집에 일본의 유명한 배우인 야쿠쇼 코지가 나왔기 때문이죠. 알고 보니 이 영화는 일본에서 벤더스 감독에게 연출을 의뢰한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그 흔한 사건, 사고, 타임슬립, 출생의 비밀 따위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에서 청소부를 하는 ‘히라야마’의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여줄 뿐입니다.
도쿄의 2층짜리 허름한 집에 사는 히라야마는 언제나 이웃집 할머니의 비질에 눈을 뜨고 출근 준비를 하고 가장 햇살이 잘 드는 방안 가득한 화분에 물을 주고 나면 정해진 곳에 놓인 열쇠 꾸러미를 챙겨 집을 나옵니다. 그러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집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같은 커피를 뽑아 들고는 청소도구로 가득한 오래된 봉고차에서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십니다.
CD도 사라져가는 지금 시대, 그는 늘어진 테이프 줄을 조여 가며 카세트테이프로 애니멀스(Animals)의 ‘House of the rising sun’, 니나 시몬(Nina Simone)의 ‘Feeling Good’ 등의 올드팝송을 들으며 도쿄 시내를 질주하며 출근합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새벽 시간, 시부야의 공공화장실들을 직접 제작한 청소 장비들을 활용해 꼼꼼히 청소합니다. “어차피 더러워질 텐데”, “뭐 그리 열심히 청소하냐”는 동료의 푸념에도 그의 손길은 한결같습니다.
청소가 끝나면 늘 같은 공원 한편에서 우유와 똑같은 샌드위치를 사서 마십니다. 지루하게만 보이는 일상을 보내는 히라야마지만 잠시의 그 휴식시간, 그는 매일 다른 공기를 느끼고 커다란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는 햇살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릅니다. 결코 어제와 같지 않은 햇살, 어디에도 없는 그 순간이 각인되는 순간입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져 내려오는 햇살을 일본어로 ‘코모레비(木漏れ日komorebi)’라고 합니다. 나무 사이에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햇살이라는 의미입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 소박하기만 한 점심을 먹으면서도 히라야마는 매일같이 가장 햇살이 아름다운 시간에 나뭇가지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햇살을 만끽합니다.
바쁜 일상 가끔은 잃어버렸던 감성은 엄청난 사건으로 깨어나기 보다 갑자기 추워진 차가운 바람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는 순간,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구름 한점 없는 화창한 햇살이 눈이 부실때 '아 살아있구나'라는 실감을 합니다. 하지만 공기도 햇살도 살아숨쉬고 있구나 하고 느껴지는 순간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버리는 기억의 파편처럼 나의 삶의 한 순간에만 있다가 사라져버립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하루를 사는 히라야마를 카메라는 각도를 달리하며 보여줍니다. 어느날은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메모를 발견하고도 합니다. 그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햇살의 차이를 카메라에 담습니다. 그러다 또 어느 날은 그냥 두면 밟혀 죽을 것 같은 아주 작은 화초를 발견하고는 집으로 데려오기도 합니다.
일이 끝나면 히라야마는 자전거를 타고 언제나 변함없는 후지산 그림이 걸려있는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빨래방에서 빨래하고 단골 술집에 가서 술 한잔을 마시고, 헌책방에서 산 소설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그의 일상은 변함없이 이어집니다. 그런 그의 일상에 직장동료, 갑자기 찾아온 조카, 단골 술집의 마마가 작은 파동을 일으키면서 그의 하루는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그의 삶은 그 자리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충실히 살아갑니다.
영화의 제목이고 OST로 쓰인 루 리드(Lou Reed)의 Perfect Day, ‘퍼펙트 데이’라는 거창한 영화 제목과 달리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래서 완벽한 하루 일 겁니다. 타인에게 인정도 받지 못하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묵묵하게 해내는 거야 말로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 날들 속에서 찾아보는 작은 행복들. 그런 것들이 쌓여 나의 일상이 만들어지는 건데,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내리쬐는 그런 순간들을 흘려보내며 엄청나게 퍼펙트한 날들을 기다리며 허송세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가을날입니다.
나의 코모레비는 정말 뭐였을까요. 아니 지금 나의 코모레비가 되어주는 건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