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이주한 원주민
10년 전 오늘,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수학능력 시험이 끝난 그날. 무슨 정신으로 시험을 치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 날 너무 긴장한 탓에 병원에서 링거까지 맞고 왔다. 이렇게까지 긴장할 일인가. 그동안 봤던 수많은 모의고사는 별로 도움 되지 않았나 보다. 아득한 정신을 부여잡고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해서 고사장으로 향했다. 고사장 앞의 수많은 현수막들이 장관이다. 후배들의 시끄러운 응원 소리는 내 머릿속을 더욱 어지럽게 할 뿐이었다.
매년 그랬듯이 오늘도 수능 한파로 뼛속까지 시렸다. 엄마가 아침부터 만들어준 반찬으로 점심 도시락을 먹었다. 긴장했던 탓인지 잘 넘어가지 않았다. 교실 안은 금세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고 아무도 환기시키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창문을 열었다. 시린 바람이 온 신경세포를 곤두서게 했다. 교실에서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 가볍게 인사를 했다. 중학교 때부터 늘 까불 거리던 한 친구는 수능 보는 당일 날에도 여전했다. 어제 내가 링거까지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좋은 놀림거리가 될 것이다. 내 뒷자리에 앉은 재수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흔들어대는 다리가 시험 내내 거슬렸지만 시험장 분위기가 흐틀어질까 싶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끝까지 참았다.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영어 듣기 평가 첫 문제부터 잘 들리지 않아 순간적으로 정신줄을 놓을 뻔했지만 이내 부여잡고 시험을 치렀다. 수능이 끝나고 그날 저녁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한껏 움츠리고 있던 빗장이 풀리자 더욱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학교 풍경은 가채점 결과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전교 일 등은 한 문제 틀린 것 때문에 수능 만점자가 되지 못했다며 난리 법석을 떨고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PC방으로 노래방으로 시험 스트레스를 마음껏 해소했다. 벌써부터 술까지 마신 아이들도 있는 모양새다. 교실에서는 영화도 보고 그동안 못 보았던 만화책도 실컷 읽었다. 고3 내내 없앴던 휴대폰도 다시 살렸다. 그렇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면접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소개서를 수십 번 고치고, 면접 모의테스트를 일주일 내내 준비했다. 1주일 후 나는 원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서울살이만 하던 나에게 원주로 향하는 길은 작은 설렘으로 다가왔다.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이라지만 모든 순간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인생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수능이 끝나니 마음도 말랑말랑해졌나 보다. 앞으로 대학 생활을 이곳에서 할 수도 있었기에 막연히 이 도시가 좋은 곳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여느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학교로 가는 버스 노선을 검색하고,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인상 깊은 곳은 없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건물들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고 드문드문 논과 밭이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 근처에 도착했을 때 눈에 보이는 풍광은 마음에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학교 규모가 컸고, 주말이라 그런지 지역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킥보드를 타는 아이들, 공을 차는 부자, 비눗방울 놀이로 즐거운 사람들, 돗자리를 펴고 쉬고 있는 아기와 엄마. 그 모든 것이 좋았다.
면접을 보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여기가 서울이야!’라고 친절히 알려주는 매연과 서로에게 무관심한 수많은 인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낮에 보았던 모습들과는 대조적으로 오버랩되었다. 이런 온도차를 느끼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서울 생활의 복잡함보다 원주에서의 여유로움을 느끼고 싶다고. 간절하게 합격을 바라게 되었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날.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발표 문자가 오기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기다리던 합격 축하 문자가 도착했다. 응시했던 대학 중에서 세 곳이나 합격했다.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나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선택하기로 했으니. 등록을 마친 뒤 가벼운 마음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았다. 첫 아르바이트는 운수 회사였다. 시내버스가 운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동전통을 걷어서 정산하는 일이었다. 두 번째 아르바이트는 손세차장이었다. 춥고,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다른 곳 보다 보수가 좋아서 견뎠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입학할 날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오리엔테이션을 포함한 안내 메일이 왔다. 추후에 지하철까지 연결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과 상의 끝에 첫 학기는 통학을 하기로 했다.
원주는 서울과 1시간 30분 거리이고, 통학버스도 잘 되어 있었다. 교통에 관해서는 큰 불편함 없었다. 하지만 학기가 지날수록 친구들의 자취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잦아졌고, 오고 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원주 시가지를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일장인 ‘풍물시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시장 안에서 파는 핫도그와 호떡을 먹으며 구경했다. 특히 ‘자유시장’이라고 하는 오래된 상가가 있었는데 그곳 지하에는 친구의 최애 분식집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했다.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양에 검증된 맛까지. 이곳에서 오래 장사를 하고 계시는 사장님께서 대부분 이십 년 넘는 단골손님이 많다고 하셨다. 친구도 중학생부터 단골이라고 했다. 학생이 어른이 되고, 후에 가정을 이루어 아이와 다시 찾는 곳. 시장만이 주는 정서일 것이다. 가슴속에서는 알 수 없는 마음이 일렁거렸다. 늦은 점심을 먹고 근처에 ‘강원감영’에 들렀다. 이곳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 업무를 수행했던 곳이다. 다른 지역들의 감영과는 다르게 강원감영은 원래 위치에서 이동을 안 했기 때문에 관련 문화재들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서 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니 돌담과 함께 야경이 아주 근사했다.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라 아쉬움이 남았지만, 도심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문화재가 주는 특별함이 있다.
첫 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 오리엔테이션부터 신입생 환영회, 학년별 간담회, 동아리 및 과행사, 리포트까지,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느라 공부는 등한시했었는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선배들은 중간고사 기간이 연애하기 딱 좋다고 하던데, 그도 그럴 것이 벚꽃이 피고 날이 좋아지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현실은 도서관에 자리를 잡기 위해 눈치싸움을 하고, 시간 없다는 핑계로 씻지 못한 기름진 머리를 모자로 눌러써 감추며, 에너지 음료로 잠을 이겨내는 신세 일 뿐이다. 여의도 벚꽃 축제는 왜 꼭 중간고사 기간에만 하는 건지. 한 번을 못 가본다.
호르몬과 부드러운 봄바람의 영향으로 하자. 학기 초부터 함께 어울렸던 동기에게 고백을 했다. 시험이 끝나고 기다리던 답이 왔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는 긍정으로 해석이 가능한 대답. 중간고사는 이미 끝났고 결과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약속 장소는 터미널 앞이었다. ‘원주에도 CGV가 있다니 너무 시골이라고만 생각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자 친구가 도착했다. 영화가 끝난 뒤 바로 옆 단계동으로 이동했다. 맛집들이 꽤 많았는데 눈에 띄는 것은 밥집보다 더 많은 유흥업소들이었다. 그곳에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그렇게 첫 연애가 시작되었다.
대학생활에서 가장 기대가 됐던 것은 동아리 활동이었다. 사진 동아리에 들어 함께 출사도 다니고 사진전도 관람하러 다녔다. 제일 많이 한 것은 단연코 술자리였지만, 자주 어울리며 선한 영향력을 받으니 사진에 대한 열정 또한 커지게 되었다.
첫 학기를 마무리하고 종강 날 과대표로부터 MT 공지를 듣게 되었다. 장소는 ‘치악산’이라고 했다. 치악산은 등반이 힘들어 이름에 ‘악’ 자가 들어간다고 준비를 잘하고 가야 한다고 했다. 미리 치악산에 대해 검색해보니 구룡사, 상원사 등 유명한 사찰도 많고, 어렸을 때 책에서 읽었던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의 배경도 치악산이었다.
드디어 MT 당일이 되었다. 치악산 입구 아래쪽에 잡은 숙소로 향했다. 숙소 앞에는 산줄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서 맑고 깨끗했다. 발도 담그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첫 날을 보냈다. 다음 날 새벽 모두 일찍 산행을 시작했다. 전 날의 숙취와 피로로 숙소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새벽 산행을 하는 일행 쪽에 속했다. 이른 새벽이라 등산객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지는 고수들 같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 정도를 오르니 치악산 정산인 ‘비로봉’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보는 일출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각인되어있다. 소원을 빌고 산 아래 전경을 바라보니 마음이 탁 트이고 전 날의 숙취도 씻겨지는 것 같았다. 이 맛에 사람들이 등산을 하나보다. 그래도 여전히 등산은 별로다. 올라갔다 바로 내려올 산을 왜 힘들게 올라가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내려오는 길은 훨씬 수월했다.
군대는 일찍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여자 친구에게는 차마 기다려달라고 말하지 못해 이별을 선택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훈련소를 마치고 배정받은 자대가 원주였다. 원주는 군사도시로 유명한데, 1군 사령부를 비롯한 많은 부대가 이곳에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헤어지지 않는 건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대 배치를 받고 첫 휴가 날, 바로 서울로 올라가 부모님과 함께 이틀을 보내고, 남은 휴가 기간 동안은 원주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기적이지만 보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어 여자 친구에게 연락했고, 그렇게 우리 둘은 다시 만남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주말에 면회 오면 외출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군 생활과 함께 데이트를 하게 되니 원주의 구석구석을 알게 되었다.
제대를 하고 바로 복학을 결정했다. 학교 앞에서 자취하던 것을 조금 더 시가지 쪽으로 옮겼다. 시청이 옮겨 오면서 발전된 곳인데 다른 신도시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부모님께서 타시던 차를 물려주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원주는 자차가 있어야 편한 곳이다. 대중교통도 잘 되어 있는 편이지만 버스노선으로만 이동하는 데에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환승을 비롯 해 불편한 점도 많았다. 주차도 무척 불편했지만, 주차단속은 참 활발히 이루어졌다.
원주는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해 너무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해갔다. 차가 있어 기동성이 좋아지니 더 많은 곳을 다닐 수 있어 그 변화들을 좀 더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가장 좋았던 곳은 ‘간현유원지’였다. 여름에 술 마시고 물에 몸 담그기 좋은 곳이었다는데 지금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출렁다리’, ‘레일바이크’, 각 종 먹거리가 어느 유원지 못지않게 잘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소금산 출렁다리’는 산악 보도교 중에서는 국내 최장, 최대 규모라고 한다. 최근에는 ‘나오라쇼’를 운영하고 있다. 천연 암벽에 야간경관과 음악 분수도 볼 수 있다. 천연 암벽 맞은편에는 아이들을 위한 ‘네트어드벤쳐’가 있다. 그물망으로 되어 있는 놀이공간으로 아이들이 꽤 많이 놀고 있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유원지 내 수련원에서 전통혼례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원할 줄만 알았던 연애는 오래가지 못하고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후유증이 오래갔지만 마음을 다잡고 학교 생활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조별 과제로 지역 문화 공간에 대한 조사를 하던 중에 ‘뮤지엄산’에 가보게 되었다. 그곳은 도시에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산과 자연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심신을 치유하고 자유과 휴식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각종 광고 촬영지로도 유명할 만큼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난데,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찾아와 안정을 얻어가는 나의 힐링 장소이기도 하다.
과제를 위해 ‘길카페’라고 불리는 행구동으로 향했다. 연애시절 이따금 와 보았던 곳인데 오랜만에 와 보니 맛있게 먹었던 식당은 이전을 했고, 새로운 것들이 많이 들어섰다. 개인 카페가 대부분이었던 곳에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도 들어섰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이곳도 이제는 차분히 원주 시내를 바라보며 차 한잔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로 변했다.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길카페도 서서히 지금의 원주에 맞춰 변화하는 중이리라.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교통체증이 심각했다. 퇴근시간이라고 감안해도 너무나 막혔다. 알고 보니 ‘댄싱카니발’ 때문에 도로 통제가 됐던 것이다. 댄싱카니발은 퍼레이드가 가능한 퍼포먼스로 거리와 무대에서 자유로운 공연이 이루어지는 원주의 대표적인 문화 축제 중 하나라고 한다. 오늘은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어서 거리에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있었다. 참가자들과 시민들이 함께 즐기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들 또한 이렇게 시작되었으리라.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가 아쉬워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대학생활을 마친 뒤 동 대학에서 대학원을 수료하고 지금은 취업 준비 중이다. 새로운 터닝 포인트가 되는 시기라 진로에 대한 고민을 꽤나 심각하게 해 보았다. 다행히 원주가 혁신도시로 선정되어 각 종 공공기관의 본사가 이전해 있어 선택지가 한 결 가벼워졌다. 게다가 지역대학 출신에게 가산점을 비롯한 각종 혜택도 있기에 원주에 정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요즘 들어서 내가 왜 이곳에 정착해서 살아가려고 하는지 더 깊이 그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서울 특유의 갑갑함과 삭막함, 건조함 뭐 그런 것들이 아닐까 했는데, 그보다는 지방의 작은 도시가 가지고 있는 원주만의 정서가 나를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 따뜻함이 좋았고,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원주도 예전과 같지만은 않은 듯하다. 아니 많이 변했다. 많은 것이 변해도 원주만이 갖고 있는 정서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어느덧 원주 살이 10년이 넘었다. 이제는 자신 있게 원주민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잘 적응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곳에 삶의 터를 잡는 것이 훨씬 수월 할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의 ‘원주 살이’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