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운 Mar 12. 2022

02 과제가 하기 싫으면 벌을 받아야지

플라나리아

※ 주 1회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매주 모여 랜덤으로 주제를 정해 글을 쓰는 모임입니다. 3월 첫째주의 주제는 "플라나리아".

소설은 처음 써 봅니다. 문학을 좋아하질 않아서 잘 읽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늘 하던것만 하면 고이기 마련이니, 소모임을 계기로 새롭게 시도해 봅니다. 습작 퀄리티에 불과할테지만, 지나가며 읽는 분들의 코멘트도 구해보고 싶어서 브런치에도 공유해볼 예정입니다.



유난히 피곤한 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학기 18학점이나 듣는 병수였다. 팀플을 세 개나 해치우고 집에 돌아온 병수가 털썩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늘 그렇듯 학교 포탈 게시판을 확인했다. 새로운 과제가 올라왔다. 작문 과목이었다. 교수가 매주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주면, A4용지 2장 내외의 글을 자유 형식으로 써서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이번 3주차 주제는 플라나리아입니다. A4용지 2장 내외 분량으로 작성하여, 4월 1일 금요일 23:59까지 업로드 바랍니다. 지연 제출시에는 지연 일자마다 2점씩 감점이 있습니다.
작문 형식은 아래아 한글 기준, 폰트는 휴먼명조 11pt, 줄간격 160%, 여백은 아래아 한글 기본 설정.’



병수는 공지를 확인하고 부아가 치밀었다. 늘 교수는 주제랍시고 범상치 않은 놈을 가지고 왔다. 게다가 공지는 오늘 업로드 되었는데 제출기한도 오늘이다. 괴팍한 교수새끼. 꼭 이렇게 마감시한까지 제멋대로란 말이야. 나는 작법을 배우고 싶었지 이런 괴상한 주제로 저당잡혀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고. 이런 괴상한 주제를 받아들고 몇 시간만에 과제로 글을 써내야 하는 학생의 심정이 어떨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아마 없겠지. 괴상한 주제니까 나도 괴팍하게 대답을 해주겠어. 한 시간 동안이나 머리를 싸매며 종이에 글씨만 끄적이던 병수가, 갑자기 노트북을 열고 플라나리아 5행시를 적어 내려갔다.


플: 플레이스테이션을 사고 싶다.
라: 라면도 먹고 싶다. 근데 돈이 없네?
나: 나라가 여기에 보태준 게 뭐가 있냐?
리: 리비아로 이민 가야지. 빌어먹을.
아: 아 맞다. 나 여권이 없구나.



병수는 심술궃게 킬킬대며 저장 버튼을 눌렀다. 썩 마음에 들었다. 생각나는대로 쓴 5행시 치고는 훌륭해 보였다. 그대로 업로드해 제출 버튼을 누르려던 오른손이, 선뜻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가슴팍으로 돌아왔다. 아 그래도 나 이거 A+ 맞아야 되는데. 이대로 낼 수는 없어.

뭔 상관이야? 오히려 괴짜 교수라 좋아할 수도 있지 않아? 주제를 그 따위로 내 주는 교수 눈치 봐서 뭐하게? 너 점수도 괴팍하게 줄 걸?


고민하던 병수가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성의없는 과제를 제출할 순 없어. 최소한 플라나리아에 대해 검색은 해보아야 할 것 같았다. 인터넷 창을 긁적이다 나무위키에 들어갔다.



'플라나리아. 1급수에서만 사는 동물. 좀비처럼 잘라내도 다시 살아난다. 자웅동체로 암수한몸이다.'



좀비처럼 살아나는 것도 이상한데 암수 한몸이라고? 정말 괴상하기 짝이 없네. 정말 알면 알수록 괴상한 동물이란 말이야. 시큰둥하게 창을 닫으려던 순간. 나무위키의 초록색 배너가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노트북이 고장났나? 노트북을 때려보았다. 까맣게 변해버린 배너는 여전했다. 뭐지? 왜 이래?

까맣게 변한 배너가 서서히 화면 전체를 삼켰다. 까맣게 변해버린 창 사이로 무언가가 꾸물대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꾸물거리는 움직임이 점점 커지는 것이 확실히 벌레의 움직임이었다. 움직임은 더욱 더 커지더니 삽시간에 화면 전체를 뒤덮었다. 플라나리아 몇 백 마리가 까만 화면에서 구더기가 들끓는 하수구마냥 용틀임을 해댔다.

“으아아아아악!!!!!”

너무 놀란 병수는 의자 뒤로 넘어가버렸다.


천장 불빛에 눈이 부셔 눈이 뜨였다. 휴대폰을 찾았다. 시계는 00:0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병수는 황급히 노트북을 켰다. 플라나리아를 검색했던 초록색 나무위키 배너가 선명했다. 새로고침을 눌렀다.

'2022년 나무위키 만우절 이벤트는 플라나리아입니다. 매시 39분에 까만색 플라나리아가 화면에서 춤을 춥니다. 화면이 갑자기 까맣게 꿈틀거려도 놀라지 마세요.'



병수는 멍하게 잠시 노트북을 쳐다보다가, 문득 과제가 떠올라 서둘러 포탈에 접속해 과제 제출 상태를 확인했다. 5행시 한글 파일이 19:37에 제출되었다고 떴다. 이대로 제출할 지 고민하던 때 마우스가 실수로 눌린 모양이었다. 아 망했네. 수정할 수도 없다. 교수에게 메일을 써서 찾아가봐야 하나. 정신이 어느 정도 들자 다른 사이트도 들어가 보았다. 노트북은 이상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피로가 가시지 않았던 병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다시 뻗어버렸다.




“손병수 학생?”

“네?”

“자 다같이, 박수.”

어리둥절한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여러분 지난주 금요일이 뭐였죠?”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만우절이라 대답했다.

“지난 수업시간 때 만우절에 장난 한 번 칠 거라고 수업 때 얘기했었죠? 대부분은 데드라인이 당일이고 주제도 너무 뜬금없어서 만우절 장난으로 알아들은 것 같은데. 그런데 손병수 학생만이 과제를 제출했어요. 그것도 5행시로. 여기 다들 잘 보이나요?”

엉망진창 5행시가 한글에 맑은고딕 36pt로 대문짝만하게 나타났다. 꺄르르 웃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병수씨, 이거 쓰는데 얼마나 걸렸어요?”

“한 1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런 게 진정한 창작입니다! 1분만에 나타나는 모티브를 과감하게 캐치해내 과제로 제출하는 패기로움! 여러분들도 청년들답게 독창적이고 패기있는 작품을 많이 제출해 주길 바랍니다! 자 다시 한 번 박수!”

학생들이 멋쩍게 뜨문뜨문 치는 박수소리 사이로, 잔뜩 굳어있던 병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띠었다.





병수의 작문 과목 학점은 C+였다.


2022. 3. 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