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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운 Feb 03. 2022

졸업

제11회 변호사시험(22.1.15.)

때때로 청춘을 과하게 예찬하는 사람들이 있다. 젊은 학생들을 보며 부러워하고 지나간 젊은 시절을 추억한다. 젊음을 탐하는 사람들이다. 청춘을 과하게 깎아내리며, 자신의 젊은 시절 경험의 잣대로만 세상을 바라보며 훈계하는 이들도 있다. 꼰대들이다. 둘 모두, 나도, 세상도, 전부 변했는데도,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나간 시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같다. 변화가 지나간 자리에는 지나간대로 의미있는 것이 남는다. 조금은 치기어려도 좋으며 다양하게 부딪혀도 괜찮은 젊음의 특권 대신,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나름의 셈법과 노련함이 생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하다못해 사람의 기준도 그렇다. 사람은 무언가를 선물할 때 자신의 기준에서 가장 값진 것을 준다. 유치원에서 아이가 색종이로 꼬깃꼬깃 접어 만든 카네이션은 그 아이에게 가장 값지고 예쁜 꽃이다. 색종이 카네이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아이는, 자라나 학교에 가서 더 아름다운 꽃을 알게 되고, 어느 순간 종이 카네이션 대신 생화를 사게 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카네이션을 접던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마음이 드러나는 방식이, 서는 곳과 보이는 곳의 풍경이 달라져서 드러나는 방식도 달라진 것뿐이다.




나에게는 기록벽이 있다. 어느 곳에 가서든 사진이든 글이든 집착처럼 남긴다. 잊어버리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자 집착이다. 더 정확히는, 늘 마음놓고 기댈 수 있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집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변하는 것은 기댈 수 없지만 기록처럼 변하지 않는 것들은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틈틈이 공부했던 과정을 기록해 두었다. 삶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좌충우돌의 시행착오가 그냥 사라지는 게 아까운 마음도 있었다. 나의 시행착오가, 나도 처음 시작할 때 그러했듯, 깜깜한 방 안을 헤매는 것 같이 막막할 후배 누군가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도움 정도라도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변호사시험 종료 후 합격자 발표때까지 1학년 버전을 완성했다. 완성하고 보니 30페이지는 족히 되었다. 발표 직후 훈련소에 입대해야 했으니, 임관하고 나서 3학년 버전까지 완성을 하겠다고 다짐도 했다.


9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임관 후에 완성을 위해 다시 컴퓨터에 앉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사이의 일이었는데도 그랬다. 몇 줄 쓰다가 말아버렸다. 이 상태라면 기록을 남겨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11회 변호사시험이 끝난 날 다시 광주를 찾았다. 1년 사이에 학교가 정말 많이 변해있다. 작년 변호사시험 끝나고 신촌에 갔을 땐 이곳 저곳 변한 곳을 찾아가며 라떼를 팔기에 바빴다. 이번에는 그저 묵묵히 둘러보았다. 강박적으로 찍어대던 사진도, 일부러 더 이상 찍지 않았다. 변하는 건 그렇게 놀라운 일도,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어 아쉬운 일도 아니고, 그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임을 어렴풋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에게 30페이지짜리 수험 기록은, 학생인 나에게 가장 값진 것이었다. 그 기록은 이제 서는 자리가 달라졌기에 더 이상 쓸 수 없다. 매년 트렌드가 바뀌는 시험의 변화 속에 그 기록은 케케묵은 무언가가 되어, 더 이상 도움도 되지 않고 값지지도 않을것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남겨주고 기억하고자 했던 마음만큼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 생겨나 새로이 손에 쥔 무언가를 다시 찾아서 주면 된다.



시험이 끝나 합격증과 졸업장이 생긴 작년에도, 광주를 종종 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찾을 때마다 나는 학생에 머물러 있었다. 때로는 상처받고 때로는 방황하고 때로는 추억이 된 로스쿨 학생에 머물러 있었다. 1년이 지나 돌아보니, 놓아줄 수 없던 그 때의 기억을 뒤늦게라도 놓아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심정적으로 졸업하는 기분이다. 힘든 터널을 뚫고 지나 이제는 마음 졸이며 결과를 애타게 기다릴, 후배들의 무탈한 졸업을 기원하며.


2022.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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