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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운 Feb 13. 2022

웅크린 고슴도치들에게

<나의 아저씨> 리뷰


<나의 아저씨>는 애어른과 어른아이가 벌이는 일종의 소동극이다. 곁다리로 끼워넣은 조연들의 러브라인과 넣지 않았어도 좋을 코믹씬을 배제하면, 결국 주된 이야기는 결국 애어른 이지안과, 박동훈 부장을 비롯한 어른아이 회사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남는다.



이지안은 거침이 없다. 어른들이 채워줬어야 마땅했을 보호장구조차 장착하지 못한 채 세상에 맞부딪힌 여린 아이들은, 보호장구 없이 감내하기 어려운 상처들을 그대로 받아내며 본능적으로 정글의 생존 법칙을 그대로 답습한다. 절도, 사기, 끔찍한 폭력은 그렇게 생존의 법칙으로 자연스레 용인된다.


어른아이 회사 정규직들은 파견직 청년 이지안에게 능숙하게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는양 행세하지만, 실은 모두 불안함을 감추고 있다. 청년 이지안에 비해 손에 쥔 것이 훨씬 많아서, 행여나 잃어버릴까 불안하다. 손에 쥔 것이 정당하지 못할수록 더욱 불안하다. 애어른들이 아무리 웃자랐다 한들 어디까지나 미숙하고 서툰 아이일 뿐이다.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어른아이들은 애어른들의 미숙함을 빼먹으며 나의 것을 지키려 한다. 뇌물, 불법청부도 그렇게,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며 자연스레 용인된다.





그럼에도 <나의 아저씨>의 어른아이들은 이지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싸움은 본디 남의 것을 뺏는 것이라, 얻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쥐구멍 없이 코너에 몰린 쥐는, 이를 악물고 뒤도 없이 덤빈다. 잃을 것이 전혀 없는 이지안도, 잃을 것이 많은 어른아이들을 아주 쉽게 제압한다. 판타지에 가까운 이지안의 각개격파는, 그렇게 개연성을 얻는다.


잃을 것이 없다는 의미는, 물질적 빈곤만이 아니라 내면의 정서적 빈곤까지 포함한다. 이지안이 그렇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온갖 불법을 용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질적 빈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고슴도치는 웅크릴수록 가시의 날이 선다. 4번 이상 잘해준 사람이 없었다며 톡 쏘아붙이는 말은, 도와주는 이들에게 호의와 기대를 품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가면 상처받았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날을 세웠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제때 받았어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하고 보호장구 없이 온몸으로 상처를 다 받아낸 애어른들의 결핍은 쉽게 채워지지 못한다. 이지안은 일단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차곡차곡 빚을 갚았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숨길 수 없이 공허하다.


사실 이지안이 어른아이들을 쉽게 겁박하고 제압해 얻은 돈조차도, 정당한 보상이 아니다. 그래서 이지안도 불안함을 숨긴다. 그렇게, 애어른도, 어른아이가 된다. 어른아이들도 실은, 손에 쥔 것이 있다뿐 하나같이 인생은 엉망진창이다. 삶이 지옥이라 할만치 위태롭기 짝이 없다. 어른아이들도, 자신의 공허와 상처를 숨기려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채, 날을 세우고 있는 건 애어른과 같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박동훈 강윤희 부부가 처음으로 자신들이 손에 쥔 것을 내어주자고 선언하는 순간이다. 청년 이지안을 지키고자, 어른들은 자신들의 허물을 드러내고 책임을 진다. 스스로 변호인이 되고, 운 좋게 얻었던 상무직도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순순히 내려놓는다. 비로소 이지안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이제는 잘 하고 싶어졌습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배 세대가 후배 세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얘기를, 선배 세대의 의무로만 설파하곤 한다. 그래서 잘 지켜지질 않는다. 대부분의 현실 속 어른아이들은 <나의 아저씨>의 어른아이들보다 훨씬 노회하고 야비하게, 애어른들의 미숙함을 빼먹으며 버틴다. 그러나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울어본 적 없는 박동훈 부장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이지안의 손을 맞잡고서야 비로소 자신을 위해서 울 수 있었다.



삶은 지옥과도 같다. 어른이든 아이든 늘 상처받을 수 밖에 없다. 어른들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기 위해선, 먼저 자신이 손에 쥔 것을 내어주고 아이들의 손을 맞잡아야 한다. 치유는 일방의 시혜적인 행위가 아니다. 상호간의 역동이다. 어른은 아이에게 먼저 쥔 것을 내밀고, 어른의 손을 맞잡은 아이는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내 어른으로 자란다. 그렇게 자란 어른은, 다시 그 어른을 치유하고, 새로운 아이를 치유한다.


날을 바짝 세운, 웅크린 고슴도치는 굴러갈수록 세상 곳곳에 상처를 남긴다. 웅크린 모든 고슴도치들이, 웅크린 몸을 펴고 서로의 손을 맞잡길 바라며.




2022.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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