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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연 Jun 05. 2022

뒤늦은 건조기 예찬

의류 건조기를 구매한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모든 가전을 들이면서도 건조기는 구매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에어컨, 세탁기, 냉장고, 식기세척기, 제습기, 공기청정기, 무선청소기 등등

크고 작은 많은 가전제품을 선택하고 장만하는 과정에서 건조기만큼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처럼 외면해왔다.


각각의 가전들은 그것이 가진 특성만큼 나에게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청소기는 청소를 해주고, 에어컨은 나를 시원하게 해 주고 세탁기는 빨래를 해주고 전자레인지는 음식을 데워주었다.

그러나 빨래가 된 옷들을 말리는 건 건조기가 아니라 건조대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사는 이곳은 서향의 집이라 제법 길게 해가 들어온다. 세탁기에서 세탁이 마쳐진 옷들을 꺼내 해가 제일 잘 들어오는 베란다 쪽에 위치한 건조대에 차분히 하나하나 빨래를 널어본다. 나중에 편하게 개기 위해서 수건은 정 가운데가 건조대에 걸리도록 각 맞춰서 정렬을 맞춘다. 어차피 옷걸이에 다시 걸어야 하는 셔츠는 탈탈 털어 어깨의 재봉선에 맞춰 옷걸이를 걸고 가지런하게 건조대 끝에 걸쳐 놓는다. 부피가 작은 속옷과 양말들은 건조대 틈 사이사이에 숨바꼭질하듯이 위치시켜 놓는다.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이틀 정도면 웬만한 빨래는 다 말라있다. 손으로 건조 상태를 가늠해보고는 건조대에 널어져 있는 옷들을 걷어내서 수건부터 개기 시작한다.


제때 집안일을 하는 바지런한 성격이 아니기에 건조대는 어느새 옷을 널어놓은 서랍장이 되어 외출을 할 때마다 필요한 옷들만 집어 들어 입는다. 손이 잘 안 가는 옷은 하염없이 건조대에 매달려 들어오는 햇볕의 양만큼 바싹바싹 마르고 있다. 내 손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옷들이 건조대에 매달려 있는 동안 새로운 빨래를 세탁기가 열심히 세탁을 하고 있다. 세탁이 다 끝난 옷들을 건조대에 널기 위해 가지고 가면 전에 널어놨던 옷들과 지금 도착한 새로운 옷들이 정겹게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건조대의 옷들을 싹 걷어내어 정리하고 방금 세탁이 마쳐진 옷들을 널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내오면서 큰 불편을 느낀다거나 건조기의 필요성을 못 느껴왔다.


물론 건조기를 써보진 않았지만, 주변 지인들의 건조기 사용후기를 듣고 나면 사용하진 않았어도 머리에 그려지는 장점들이 있었다.

당연히 빨래를 널고 걷는 행위가 사라짐에 따라 집안일의 시간이 단축될 것이고, 옷이나 이불에서 나오는 먼지도 잡아줄 것이다.(그것이 먼지일 수도 있고, 옷감이 건조기에서 돌아가는 과정에서 닳아지는 섬유라는 말도 있지만 일단 먼지라고 하겠다.) 그리고 옷이 수축하고 빨리 상한다는 단점도 있으나,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장점이 더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급하게 빨래를 해야 하는 일은 없었고, 빨래를 널고 걷는 걸 크게 힘들게 느끼거나 스트레스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건조기는 정말 나와는 상관없는 가전제품이었다.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 한겨울에도 하루 이틀 정도의 시간만 더 들이거나, 정 안되면 제습기를 돌리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건조기의 필요성을 못 느꼈었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건조기 예찬론자가 되었다.

머릿속으로만 인지하는 장점과 그것을 내가 몸소 느끼는 장점은 설사 그 내용과 결과가 같다고 할지라고 내가 몸소 겪느냐 안 겪느냐에 따라 그것이 나에게 주는 깊이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

머릿속으로 그려본 장점은 막연한 것이지만 내가 직접 겪어본 장점은 온몸으로 와닿는 체험이면서 오감과 함께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안일은 당연히 단축된다. 이것은 건조기 사기 전에도 알고 있었던 내용이기 때문에 크게 와닿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나에게 빨래라는 것은 최소 2일 이상이 소요되는 집안일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건조기가 들어오면서

같은 시간대에 건조가 끝난 옷들을 각자의 자리에 위치 시키기까지 4~5시간이면 충분하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베란다 한쪽을 차지하는 건조대가 가끔 답답해 보일 때도 있었다. 옷이  마르기 전까지 걷어내지 못하는 건조대가 치워지니 베란다도 한층  넓어지고 여유공간이 생겨났다.

옷에 붙어 미처 털어내지 못한 먼지를 털거나 테이프로 따로 떼어 낼 필요가 없다. 건조기를 사기 전부터 들었던 수건의 뽀송함도 몸소 느꼈고, 거실 한편에 깔아 둔 러그의 털은 풍성해졌다. 어쩌다 샤워를 마치고 건조기에서 갓 꺼낸 옷을 입으면 따끈한 감촉에 푹 빠져버린다.


혹시 누군가가 건조기 좋은지 물어본다면 정말 정말 끝내주게 좋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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