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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연 Jul 10. 2022

나는 우울할 때 블라인드를 걷어올린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난 휴일.

아무런 외부 자극이 없음에도 나에게 다양한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매 순간 매 초마다 감정 하나하나를 체크하고 세세히 구분하고 인지할 수는 없지만

막 눈을 떴을 때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비슷한 거 같지만 농도와 깊이가 다른 감정들이 매 순간 나를 휘어감 싸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가끔 이유 없는 우울감에 의욕이 떨어져 하루 종일 소파 위에 누워있을 때도 있고

알 수 없는 화가 갑작스럽게 나는 것과 동시에 그런 감정에 불을 지피는 과거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떠올라 나를 사로잡을 때도 있다.


감정은 숨 쉬듯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내가 감정이 발생하게끔 나 스스로 유인한 것도 있겠지만 보통 그 원인을 알기 전에 감정은 발생하게 된다. 어떠한 감정이든 내 마음대로 컨트롤하거나 없애버릴 순 없다.


특정 기분 상태만 유지하게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늘은 휴일이라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늦은 새벽까지 핸드폰을 침대 위에서 붙잡고 잠들었던지라 숙면을 취하진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나쁘다고는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개운한 기분은 아니다.

이런 상태라면 하루 종일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면서 하루를 보낼 것 같다.

감정상태가 그런 거야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감정 때문에 앞으로 내가 보낼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미 침체된 의욕 상태를 그러지 말자라는 생각만으로 다시 끌어올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아주아주 별거 아니지만 간단한 것부터 시작한다.

일단 먼저 거실 한쪽의 블라인드를 모조리 올려버린다.

원래도 빛이 잘 들어오는 집이기에 한낮에도 특별한 조명 없이도 생활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일단 블라인드를 천장 끝까지 쭉 걷어올린다.

너무나 단순하고 큰 힘이 들지 않는 일이기에 아주 간단하게 거실 전체가 햇볕으로 가득 차는 것과 동시에 나의 움직임의 폭이 넓어진다.

거실 소파 위 한쪽 구석에 있는 나의 활동 반경이 집안 전체로 넓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옷방이든 욕실이든 화장대로 아무 데나 가서 안 쓰고 있는 물건들을 몇 개 추려내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청소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하고 나면 뭔가 개운한 느낌이 난다. 재활용 쓰레기도 몇 개 집어낸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지갑도 챙긴다.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반경은 이제 집 밖으로 그 영역이 확장된다. 플라스틱과 종이박스를 잘 정리해서 재활용품 수거함에 버리고 곧바로 테이크아웃 커피점을 향해 걸어간다. 샷도 추가해서 주문을 해본다.


그리고 더 이상 나의 기분과 감정상태에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원래 감정이라는 것이 우울하고 짜증 날 때 나도 모르게 파고드는 것이지, 평온하고 좋을 때는 내 기분이 왜 이렇지 하면서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감정을 하나하나 집중하면서 왜 이런 감정이 떠오르는지에 대해 파악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외면하자는 것도 아니다. 정상 범주를 벗어나는 영역과 전문가의 상담과 치료가 필요한 부분은 적극적으로 마주 보고 해결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 감정이라는 것은 나를 차지하고 있는 큰 부분임과 동시에 그 자체를 온전히 존중하고 인정하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만, 그 자체에 너무 몰입을 한다면 앞으로 내가 해야 될 좋은 방향과 더 좋은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걸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우울한 감정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들뜬 감정으로는 신중함이 없어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평상시에 우울하지도 않으나 그렇다고 들뜨지 않는 상태가 될 순 없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고 억누르는 걸 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어떠한 감정이든 그 걸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존중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싶을 뿐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겠지만 생각보다 그 원인을 찾는 것도 힘들고 찾았다고 하더라도 바로 해결하기에 힘든 부분도 많다. 그래서 나는 특정한 기분과 감정상태를 무시한다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차라리 지금 내 감정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음을 인정해버리고 그다음에 그러한 감정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블라인드를 걷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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