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사중 Mar 23. 2022

시선 속, 산의 모습


 나의 첫 영화 사수는 K선배이다. 현재 내 주변인 중 가장 영화를 좋아하는 이 선배를 만나게 된 것은 단편 영화에서 제작부로 일을 할 때였다. 선배와 처음 만난 것은 등산로 입구였는데 선배는 작은 크로스백 하나에 커다란 보조배터리를 넣고 폰을 충전하며 걸어왔다. 느린 속도로 걸어오는 선배의 발에 맞춰 보조배터리가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보였던 게 선배의 첫 장면이었다. 카톡을 주고받다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선배에게 어색하게 인사하고 곧바로 보조배터리의 안부를 물었다. 선배는 '얘 튼튼해' 하고 자신 있게 말했고 보조배터리의 우람한 덩치를 보며 그럴 거 같네요. 다행이에요. 하고 대답했다. 선배는 늘 로케이션 지를 돌 때마다 어딘가 한눈 판 듯 앞을 보지 않고 주변을 구경하며 걸었다. 그러다가 자기가 생각한 이미지와 맞는 장소가 있으면 그 큰 보조배터리를 단 폰으로 사진을 마구 찍어대기 시작했다. 선배는 엉성했고 열정적이었다. 보조배터리는 늘 빠지고 떨어지기 일상이었고 로케이션 후보지를 다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찾아야 한다며 여기저기 검색을 하기도 했다.


 첫 스텝으로 들어간 단편 영화의 헌팅 장소가 모두 산인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걸 어떻게 찍을까? 하는 기대감도 잠시, 이끼가 낀 큰 바위, 거친 표면의 나무 뒤에 숨겨진 바위, 풍성한 잎 사위로 새어 나오는 한 줄기 빛과 같이 세세하게 묘사된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땀에 쩐 운동화를 신고 걸어 다니겠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선배와 산의 여러 곳을 이리저리 사진 찍고 어떻게 스텝들이 올라가야 할지 이동한다면 어떻게 할지 등을 고민했다. 용달을 불러도 밑에서 멈출 텐데요. 이런 가파른 산은 보조인원을 더 부를까요? 하는 의견을 주고받기도 여러 번, 어영부영 결정을 하고 곧장 내려갈 일만 남았었다. 이미 앞머리는 다 젖고 운동화는 흙에 묻어 엉망이었다. 이렇게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오르내리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장비를 옮긴담, 시나리오 전체가 산인 건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야? 하며 투덜대고 있는데 선배가 또 한참을 느리게 걸어 내려오다가 사진을 이곳저곳 찍기 시작했다. 이미 감독님이 결정한 장소인데 뭘 찍는 거야 이미 다 찍었는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걸어 내려오는 선배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참 느렸다. 느린데 산만했다. 느린 말투와 느린 행동으로 어떻게 영화를 할까, 하는 빈정거림도 있었다. 나는 못된 마음에 넌지시 말했던 거 같다. 선배는 영화 일 맞아요? 현장은 엄청 빠르게 돌아가잖아요. 하고 말이다. 선배는 웃으며 그냥 이 모든 게 다 영화 같아서 발이 안 떨어지네,라고 대답했다. 그런 선배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었다. 내가 후보지로 올린 장소들 중 몇 개가 감독의 마음에 들어 실제 촬영 장소로 변했다. 내가 본 장소들이 마음에 든다니 내심 기쁘기도 했고 어떻게 촬영할지 떨리기도 했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서는 촬영하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장비와 스텝들 도시락을 지키고 서 있는 일만 할 줄 모르고 말이다. 그렇게 단편 영화 5회 차 중 3회 차가 지나갈 때, 스텝들은 이리저리 산만 이동하며 촬영을 하고 나는 여전히 촬영 장비를 지키는 지킴이를 하고 있었다. 촬영은 길었고 하루 종일 앉아 쉬는 시간에 오는 스텝들의 음식을 챙기고 장비 정리를 도와주고 미리 선배가 언질을 주면 폰으로 용달 트럭 차를 부르는 일이 전부였다. 남은 시간에 폰을 만지기도 한두 번이어야지 지루한 시간에 보던 폰도 질려 끄고 멀찍이 보이는 촬영 현장을 보았다. 다들 빠르게 움직이며 일을 하는 사이, k선배도 그 전과 다른 모습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을 해나가는 k선배를 보며 사람을 쉽게 판단했다는 생각과 함께 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 모든 게 영화 같다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선배의 시선을 흉내 내며 먼발치에서 산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은 짙어지며 조용해졌고 바람이 부는 소리에 입사귀가 흔들리는 소리들이 매력적으로 들렸다. 산은 고독하기도 했고 차분하기도 했다. 입시 전 등산한 게 전부였던 나에게 산은 언제나 어른들의 전유물 그뿐이었다. 온종일 산에 서서 있을 일이 없었으니까 전혀 몰랐던 나무와 풀 따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딜 가서든 로케이션 장소에서 또 다른 생각을 하던 선배가 생각났다. 이 장면을 나도 내 영화로 찍고 싶다던 선배. 선배의 욕심과 생각이 묻어 나오는 문장을 떠올리며 가만히 장비를 지켰다.


몇 년 뒤 선배는 같이 장소를 구하러 다녔던 산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산을 배경으로  단편 영화를 하나 찍었다. 선배가 평소에 이야기해주던 선배의 생각들이 담긴 영화였다. 언제나 관찰하고 생각하던 선배의 모습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올랐다. 시각과 청각, 이 두 개의 감각이 동시에 들어와 감독의 생각을 보여주는 영화를 , 선배는 일상에서 매일 찍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촬영을 하면서 장소를 갈 때마다 선배의 시선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 멋진 감독님이 여길 선정한 거라면 그 이유가 있겠지. 내 영화에도 쓸 수 있는 장소가 있겠지. 하고 말이다. 이유 없는 장소도 없고 특징 없는 장소도 없다. 그 사이에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 나는 오늘도 선배의 시선을 따라 한다.

작가의 이전글 왜 영화가 하고 싶어요? 왜 글이 쓰고 싶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