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겨울이었다
15년 전 새내기 때 일이에요. 3월이라곤 하지만 아직 새순도 안 돋고 쌀쌀하던 초봄이었지요. 두 번째 강의인가 듣고 다산인문관 계단을 내려가는데 어떤 남자가 다급히 쫓아오는 겁니다. 그러더니 전화번호를 알려달래요. 알려줬지요. 만나쟤요. 혜화역 쪽 그 고등어로 육수 내는 진한 우동집 맞은편 떡볶이집에서 만났어요. 학생증을 내밀면서 본인이 옆에 서울대 의대를 다니는데 한 번 만나볼 생각이 없냐더라고요.
내가 사귀어도 너랑 사귀지 서울대 의대랑 사귀냐 의대랑 사랑에 빠질거면 의대를 갔지(못 감)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같이 밥 먹고 있는 거 그럭저럭 이야기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밥값이 만 얼마 나왔어요. 끝자리가 100원 단위였어요. 몇천몇백오십원씩 내야 하는데 십원짜리 없냐더라고요. 그때는 아직 현금이 사용될 때였어요. 더치페이 자체가 당황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십 원 단위에서 가르는 더치페이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안 해 봤고요. 제가 당황하니까 그 서울대 의대생이 오늘은 첫만남이고 본인이 남자니까 오십원 더 내겠다고 고맙죠? 이러더라고요. 결말은 뭐. 상상하시는대로.
밥값은 부른 사람이 냅니다. 직장인과 학생 사이에서는 직장인이 냅니다. 내가 저 쪽을 유혹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내가 냅니다. 갑과 을 사이라면 갑이 냅니다. 연장자는 밥값 책임 플러스 알파됩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놈 그 때 한창 유행하던 일베 열심히 하고 있었겠네. 지금은 어엿한 의사가 되어 어디선가 개갑질을 하고 있으려나. 아니면 정신을 좀 차렸으려나. 요즘 연애판 분위기를 보면 심해지면 심해졌지 여전히 븅신새끼겠네요.
(2023.02.22)
의대생이나 의사한테 악감정은 없다. 정신머리 이상한 놈이야 어디에나 있는 거지 뭐. 그래도 이 븅딱을 굳이 서울대 의대생이라고 부르는 건, 내가 운이 좋아서 이제껏 연애 걸 때 학생증 내미는 사람 딱 두 명 봤는데 그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 명은 고대생이었는데 전공은 잊어버렸음. 그 고대생은 전화번호 뒷자리가 고대 창립년도였는데... 어쨌든 20대 초반에는 대학 잘 간 게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니까 이불킥 흑역사 정도로 한 번 쯤 저지를 수 있는 실수라고 생각한다. 물론 누렇게 뜬 인품의 떡잎이 기사회생하는 일은 드물겠지만. 그래도 그게 뭐가 문제인지 알아차리고 한심한 짓거리는 그만둘 수 있지. 그게 30대를 넘어서서 40대, 50대까지 가면 인제 아무도 안 놀아줘서 자기들끼리 노는 사람 되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