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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Apr 28. 2024

(일기) 와 내가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2018.04.27. 거시경제학 교과서 처음 보며 적은 생각들

남북정상회담 기념 포스팅. 이전에 페친님 담벼락에서 전후 한국(남한)의 빠른 경제성장과 남북한의 경제성장격차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보고 배웠다. 그런데 거시1을 듣다 보니 Romer의 거시 기본서인 Advanced Macroeconomics(4th)의 ch.4, Cross-country inceome differences에서(성장이론 파트) 관련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경제학과 대학원에서 거시경제학 수업을 들은 사람이면 모두 읽은 내용일 테니 새롭거나 어려운 건 아니지만 정확히 같은 내용이라 요약해서 옮겨본다. 


Romer가 정치경제학자여서 그런지, 아니면 거시경제학에서 원래 사회하부구조(Social Infrastructure)를 다루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성장이론은 거시경제학의 원래 몫이 맞는 듯하다. 혹시 Romer의 특징인지 아니면 거시경제학 전반적으로 사회하부구조를 연구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지 아시는 분은 말씀해주셨으면 좋겠다. 일전에 담벼락에서 이야기 나눴던 부분은 4.3 Social Infra structre ~ 4.5 Beyond Social Infrastructure에서 주로 등장한다. 


성장이론은 국가 간 소득격차를 설명하기 위해 물적자본의 축적, 인적자본의 축적, 그리고 자본축적량이 일정할 때 생산이 담당하는 역할을 설명한다. (어렵다. 다 동태분석이다.) 그런데 ‘그 축적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서 왜 달라졌느냐’는 아직도 설명을 시도중인 것 같다. 문제를 알아야 답이 나오듯 거시경제학의 목적이 큰 경기변동 없이 지속적인 국부의 성장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원인과 핵심 요소들의 시작과 조합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은 거시경제학자 모두의 의무감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국가라는 틀이 다면적이고 복합적이다보니 미시경제학보다는 훨씬 타 학문 분야와 교류가 많은 듯하다. 3장의 ch.7 Population Growth and Technological Change since1 milion B.C.를 보면, 1993년에 Kremer라는 학자가 기술진보와 인구 사이의 관계, 인구성장과 소득의 관계를 증명하겠다고 고고학자와 인류학자가 기원전 100만 년 전까지 소급해 만든 인구추계를 가지고 자기 모형을 검증했다. 


어쨌든, Romer는 Hall and Jones(1999)와 Klenow and Rodriguez-Clare(1997)의 정의를 인용해서 확장시키고 있다. 인용된 학자들의 연구는 결론적으로 물적 자본 축적의 차이와 인적 자본 축적의 차이, 기타 요인들이 국가 간 소득 격차 확대에 기여하는 비중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여기서 이들이 사회하부구조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왜 맑스 냄새가 나지)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이는 ‘경제활동에 대해 사적 수익과 사회적 수익이 일치하도록 하는 제도와 정책들’을 전반적으로 그렇게 부르기로 한 것 같다. 여기에 대해 지대추구라든지 세금이라든지 신뢰도라든지 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참 재미있지만 건너뛰고, 결론으로 넘어가자.


사적 수익과 사회적 수익 간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제도와 정책이 경제성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은 애덤 스미스 시절부터 지속됐다고 한다. Romer는 그 제도와 그 정책을 사회하부구조로 설명해냈다고 주장하는(노동자 1인당 생산량을 주로 사용했다) 위 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동시에 잠재적인 상관관계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고, 측정오차는 어쩔 거냐는 비판점도 제시하고 있다. 재미있는 부분은 분단국가들이 거시경제학자들에게 일종의 자연 실험(natural experiment)을 제공했다는 것인데, 당연하게도 시장지향적인 하부구조는 모든 경우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계획경제체제보다 성공적이었다.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사회하부구조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Romer는 경제학자답게 경제적인 유인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식민지나 내전 경험이 있는 국가라든가 열대지방 연구와 관련하여) 현 경제체제에서 권력을 지닌 개인의 경제적 유인을 다루고자 한다. 비독재체제에서도 권력자의 부정부패나 체제유지 관련한 연구는 많지만, 이 경우에는 독재자에 초점을 맞춘다. 독재자는 개인의 부를 직접적으로 약탈할 수 있으며 나아가 ‘합법적으로’ 자신과 내집단의 부를 쌓을 수 있도록 각종 정책과 제도를 조정 가능하다. 경제학이 의외로 ‘기대’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하는 것 같은데(사실 기본적으로 하는 것 같은데) 이 경우 일반적인 개인은 부를 축적하려는 기대가 사라지고 제도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독재자가 국부를 성장시켜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경제주체가 더 잘 살게 하려면(그래서 자신이 착취할 부가 더 커지도록 하려면) 결국 저축과 기업활동을 독려해야 한다. 그러려면 독재자는 일반인의 기대를 배신하는 행위만큼은 하지 말아야 한다.


Romer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거의 모든 독재자가 실제로는 권력을 상실할 위험이 없는 선 안에서도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는데, 이는 DeLong and Shleifer가 2002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절대권력자는 낮은 평균소득을 가져오는 사회하부구조를 선호한다’는 결론을 통해 강화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여기서 예외적인 경우가 등장한다. 남한과 박정희다. 1960년대~1980년대 남한이 겪은 경제성장의 직접적인 이유가 구체적인 정책들과 근로자(노동자라는 말은 일부러 안 썼다)의 의욕, 여러 가지 행운과 우연들 그리고 체제경쟁 등임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박정희와 김일성은 상호 체제경쟁의 도구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거의 모든 독재자가 선택하는 전략’을 택하지 않고 국가 전체의 평균소득을 늘리고자 하는 목표를 가졌을까? 사실 독재자의 동기와 사회하부구조의 변화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명확한 상관관계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 무엇이 남한의 경제기적을 일으켰느냐는 질문은 너무 포괄적이므로 그만두고, 박정희와 김일성이 ‘좁은 독재자의 길’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할 때는 역시 유학이 지배적이었던 한반도와 중원대륙엔 한 번도 인민대중의 (명목적인) 동의를 얻지 못한 지배권력이 선 적 없음을 강조하고 싶다. 시장경제든 계획경제든 2차세계대전 직후엔 무엇이 더 우월한지 실증적 증거는 없었다. 둘 다 각자의 방법으로 ‘국가를 이끌어보고자’ 한 것이다. 한 쪽이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택했으면 경쟁 성립은 불가능이다.


기원후 600년경에 당(唐) 태종 이세민이 쓴 경전 『정관정요』에 벌써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배니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엎기도 한다’라고 적혀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선진적인 사상이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했지만 후에는 외려 경쟁과 발전을 저해했던 역설도 새삼 다가온다. 어쨌든 앞으로도 한반도에는 명분이고 정치공학이고 개돼지들에게 주는 부스러기도 없이 노골적으로 자기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지도자는 등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재밌는데 참 어렵긴 하다. 이건 그냥 교과서 번역요약 + 썰 푼 거고 사실 수식이 주다.  Romer 책은 수식이 적은 편인 것 같다. 그런데 공부를 하자니 수식 많은 책이 편하고 좋은 책인 걸 알겠다. 수식이 적다는 게 그냥 유도과정 없이 결론만 적어놨다는 이야기와 동의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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