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 May 03. 2024

(일기) 봄비 내리는 가리봉동

2023.05.03. 물에 잠겨도 웃으면서 곁에 있어라 

책상 앞에 앉아 일하노라면 배우자님이 발밑에서 뒹굴며 tv시청을 하시다 말고 간간히 여보 여보 나 심심해 나 관심 줘를 시전하시는데 그러던 지난주 일요일에는 진심으로 답답증을 호소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 비도 추적추적 오고 기온도 4월 말 답잖게 차갑고. 불현듯 떠오른 도삭면. 하지만 도삭면으로 유명한 산시쑹화는 건대입구에나 가야 있고. 그래서 무작정 검색을 해보니 역시 대림역과 가산디지털단지역 주변에 가게들이 좀 있는 것이다. 


도착해서야 알았다. 내가 있는 곳이 바로 가리봉동임을. 이곳은 한국말이 단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는 곳이다. 이이들의 고향인 중국의, 그 어느 빈민가에서도 이렇게 거친 분위기는 풍기지 않으리라. 험악한 공기를 뚫고 좁고 끈적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가격이 저렴하기로는 10년 전 가격이라 메인 메뉴들이 5천 원에서 7천 원 값을 뽐내고 있었다. 도삭면 두 개를 시키고 먼저 나온 짜사이를 먹어봤는데 감칠맛이 어마어마. 그때부턴 옆 옆 테이블에서 금방이라도 돕바 품속에서 회칼을 슥 꺼낼 것처럼 누구 조지는 이야기를 한국어 중국어 섞어 말씀하시는 건장한 아저씨도 예뻐 보여. 뒷머리에 까치집 짓고 살벌하게 침 뱉는 총각도 싫지 않아.


잘 먹고 나오는 길에 괜히 뿌듯한 것이, 이런 내 올드 앤 삐끕 취향과 함께 해줄 사내도 그다지 없으려니 싶은 것이다. 웬만해선 낡고 좁고 더럽고 바닥에 침 뱉고 욕질하고 식당 문앞에서 담배 피는 손님들이 찰랑이며 고이는 할렘가에 같이 가자면 학을 떼겠지. 앞으로도 나는 많은 순간, 삶의 때가 치덕치덕 묻어 있는 씨바 좆같은 동네에서 은근슬쩍 내 자리 저 자리 두 개 깨진 플라스틱 의자로다가 끼워넣으며 자주 웃고 싶은 것이다. 잘 살거나 못 살거나. 얼마나 높은 하늘을 보거나 얼마나 낮은 물에 잠기거나 개의치 않고.


----


지금 굉장히, 여러모로 힘든데, 그래도 웃어 보자. 이 비가 그칠 날이 올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