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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니 Aug 24. 2022

스승님에 대한 뒤늦은 추모


처음으로 글쓰기를 배우러 간 건 국어국문학과 졸업생 몇이 선생님을 모시고 글쓰기를 배우는 동아리 모임이었다. (난 40대 초반에 방송대 국어국문학을 편입하고 졸업했다)

수강생이 부족해 모임이 존폐의 기로에 섰다며 선배가 부탁하다시피 했다. 

그때 난 선뜻 선배의 청을 받아들여 한 달 수강료와 급하게 쓴 짧은 시 한 편을 가지고 동아리방으로 갔다. 



동아리방에 들어가니 수강생은 대 여섯 명, 모두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선생님도 80이 넘으셨다. 긴장감을 풀려고 밝게 인사를 하고 총무가 차를 타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연배 차 많은 이들과 과연 공감대 형성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을 시작하자 선생님이 골라온 보기 글을 읽고 감상을 했다. 그리고 수강생들이 각자 써온 작품을 읽고 평을 하는데 선생님은 내 시를 맨 먼저 읽게 하셨다. 깊은 고민 없이 짧게 써온 시를 읽으려니 얼굴이 간지러웠지만 용기를 내었다. 

읽고 나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부끄러움이 스멀스멀 올라올 즈음 선생님이 천천히 평을 하셨다.



난 사실 악평을 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지만 선생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그 짧은 시에 무슨 평가라고 할 게 있겠냐 싶었는데 그 시에서도 좋은 표현이 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다름아닌 조사- 은/는/이/가-를 잘썼다는 칭찬이었다. 소설가 김 훈이 '칼의 노래' 첫 문장에서 '꽃 피었다.'로 할지 '꽃 피었다.'로 할지를 가지고 한참 고심했다는 예를 들면서 말이다. 점처럼 사소한 것을 끄집어 내어 칭찬해주신 선생님이 고마웠고 부끄러운 마음이 진정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그런데 알고보니 선생님은 그다지 칭찬을 해주는 분이 아니셨다. ‘시가 늙었다’, ‘비문이다 고쳐라, ’ ‘한 단락이 길어서 지루하다’, ‘앞부분 모두 지워버려라’ 등 수강생들에게 직언을 잘하셨다. 난 그것도 좋았다. 칭찬만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등단하신 분의 시는 거의 뜯어고쳐야 할 정도로 지적을 해주셨는데 기분 나쁘지 않게 조곤조곤 말씀하셨고 작가도 곧잘 수긍했다. 



다른 분, 책을 낸 작가분은 겉으로 보기에 스승님의 지적에 대해 잘 수긍을 했다. 하지만 꾸준히 오시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바쁜 일도 있으신 걸로 안다.)

또 수필을 써오셨던 분은 ‘글을 좀 더 따뜻하게 쓰라’는 지적에 불만을 가졌고 발길이 뜸했다. 어느 날 등장해서는 자신의 수필을 모아 자비 출판한 책을 나누어 주고는 발길을 뚝 끊었다.

사람들은 각자 성향이나 상황에 따라 선생님의 지적을 다 다르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시를 써서 몇 번 가다가 말던 어느 날 총무(등단 시인)에게 연락이 왔다. 바쁘지 않으면 다시 오라고 했다. 

선생님이 시집을 내셨는데 내 것도 챙겨놓았다고 했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다시 동아리로 갔다. 

수필을 써서 갔는데 선생님은 “그동안 수필 써 놓은 게 좀 있느냐”고 물으시며 다듬어서 등단부터 하고 열심히 문인 활동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때 옆에 있던 등단 시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말했다.

“어, 선생님은 늘 늦게 등단하라고 하셨잖아요!”



선생님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한 표정을 지으시다가 

"젊은 문인이 들어와 협회 일도 하고 그러면 좋지 않냐, 다들 나이가 많다."고 하셨다.

그러자 시인은 다들 문인활동을 늦게 시작하는데다가 이 바닥에서 시간과 공을 들여야 직책도 맡는 건데 젊은 나이에 들어오면 더 빠르겠지요라는 했는데 약간의 질투가 들어있는 듯했다.




논어의 선진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자로가 “좋은 말을 들으면 곧 실천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공자는 “부형이 계시는데 어찌 듣는 대로 곧 행하겠느냐?”고 대답했다.

염유가 똑 같은 질문을 하자 공자는 “들으면 곧 행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공서화가 공자에게 어찌 두 제자의 같은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하시는지 묻자 공자가 말하길,

“염유는 소극적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한 것이고, 

자로는 남을 이기려 하기 때문에 물러서도록 한 것이다.”고 했다.




선생님은 글은 쓰고 싶으나 끈기가 없고 게으른 제자에게 맞춤 조언을 하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선생님의 연세가 적지 않으셨기에 제자를 위해 서두르는게 아닐까 싶은 짐작이 들어서 너무나도 감사했다.

하지만 아직 등단할 정도의 실력이 아니어서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고 동아리와도 멀어졌다.



가끔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했다. 

몇 개월 밖에 안 되는 짧은 인연이라 나를 기억하실까 싶어 소식을 묻지 못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다가 선생님이 작년 4월에 (향년 89세) 돌아가신 걸 알게 되었다. 


                         

                                      후배 문인들 존경 받아온 유병근 시인 별세

그렇게 많은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정신은 수식 없는 단촐함, 그리고 종내는 침묵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겨울 산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으며 "침묵으로 더 크게 말할 수 있다"는 역설의 미학을 직조했다. 글을 쓰면서 글 이전의 침묵에 닿고자 했으며 말과 글을 부리면서 말과 글 너머의 저쪽에 이르고자 했다.

                                                                                      부산일보기사 2021. 04. 23 발췌




선생님이 양산으로 이사 오셨다는 말을 들었던 게 생각난다. 이사는 사모님의 선택이었으며 자신은 아무런 권리가 없어 따라오게 되었다고 하시며 엷게 웃으셨다. 그때 내가 양산에는 황산강 베랑길이 있는데, 자전거를 타기도 좋고, 걸어볼수도 있다고 말씀드렸던게 생각난다.



그 즈음 쓰신 수필집을 읽은 적이 있는데 목적 없는 산책을 하시며 천천히 깊은 사유에 가닿으시는 글이었다. 쓸쓸했다. 하지만 깨어 있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시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글을 쓰려면 이정도로 끈질기게 해야하는 구나 싶었다.



선생님은 내가 아는 한 깔끔하고 담백한 정신의 소유자셨다.

아주 잠깐동안 가르침을 받았지만

글을 줄이고 지우며 군더더기를 살피는 건 선생님의 영향이 있지싶다.(잘쓰는 건 별개의 문제)

그래서 감히 스승님이라 부르고싶다.




늦었지만 스승님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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