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부는 너무도 약해서, 조금만 부딪쳐도 상처가 생기고 잘 아물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원인 모를 멍도 너무 잘 들어서 그럴 때마다 나의 한 귀여운 친구는 귀엽게도
네가 나쁜 일을 해서 잘 때 천사가 때리고 간 거다.
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나쁜 일이라니, 난 누구보다 그런 일을 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아마도 난 천사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지도 몰라.
피부뿐이 아니다. 그게 둘러싸고 있는 나의 옅은 속도 그랬다. 피부가 얇아서 그 속이 모두 비쳤다. 나는 가감 없이, 여름날의 햇살을 입은 듯 다 내비쳤다. 혹자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상처는 흠이 되기도 하고 속을 다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그게 상대에게 부담이 된다나 뭐라나.
변명을 하자면, 내가 굳이 보여주려 했던 게 아니라 어쩌면 기억들이 너무 내 속에 오래 남아 둥둥 떠올라 내 표면에 드러나서 감출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건 아닐까.
어떤 기억들은 피부에 새긴 타투처럼 마음에도 잔상이 깊게 남아서 오래가기 때문에.
어제 우연하게 만난 사람은 몸에 여러 개의 타투를 갖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 앞에서는 늘 망설임이 없어서 보이는 것을 바로 해결해야 했다.
타투하셨네요.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 아뇨, 의미 같은 건 없어요.
무신경한 어조를 닮은 맥 빠지는 답이었다.'의미 없는 일은 왜 하게 되는 걸까?,' 순간 목구멍으로 치솟은 의아한 감정은, 고등교육으로 다져진 잘 차린 예의가 다행히 그 말을 먹어버렸다.
신기하다. 한 번 해보고 싶네요, 근데 아플까 봐.
- 별로 안 아파요.
타투를 새기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오히려 지우는 과정들이 벅차다고 말했다. 그래서 애써 지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싫증이 나거나, 꼴보기 싫어지면 어떻게 해요? 그럼 처음에 새긴 순간들을 후회할 텐데요.
- 간단해요, 의미만 안 부여하면 돼요. 의미가 생기는 순간부터 싫증이 나기 시작하거든.
나는 내 약점을 건드린 폐부를 찔린 듯한 발언에 한동안 멍했던 것 같다. 난 싫증을 내지 않으려고 그렇게 '의미'란 것을 찾고, 헤집고, 부여해왔다. 그런 '의미'야 말로 진짜라고 생각했으니. 하지만 그놈의 '의미'라는 것이 그렇게도 싫증, 퇴색이라는 막다른 골목의 끝이라는 정해진 목적지로 인도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상처와 흠을묻지도 대답하지도 않고 무의미하게 지나쳤더라면,그저 그런 평범하고 당연한 것이 되어있었을 텐데. 정도가 다르기는 해도, 모두가 겪는 흔한 피부의 괴멸과 재생과정이듯이.
하지만 어느 때에,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에 모든 것들이 커졌고,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던 것들이 되었던 것.
그 과정의 흔적을 그저 의미 없이, 피부와 기억에 새겨진 어떤 시간의 박제로만 생각했더라면 끝없이 이대로, 굳이 지우려들지 않고 그대로, 의미는 없는 Conversation Starter 정도가 되는 것이었을지.
의미를 찾아 헤매고 지치는 과정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애써 새기고 다시 지우는 업(業)같은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처음부터 '의미가 없다.'라는 건 나에게는 너무도 슬픈 일이라. 의미라는 게 처음부터 없었다고 해도, 그걸 찾으려 한다는 것 자체가 내겐 삶이고 사랑인 것을.
애써 지우지 않는 마음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굳이 또 흔적을 지우려고 상처를 덧나게 하는 순간이 고통스러우니까. 그럼에도 상처를 덧내고, 또 헤집어야 끝나는(혹은 끝내야 하는) 기억도 있다. 설령,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고 해도.
이미 '의미'라는 폭력으로 물든 멍들이 지우기 막막하기는 해도, '무의미'가 주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라는 그 '흠 없는 마음에 드는 영원한 한줄기 햇살(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처럼 한없이 냉정한 그 밝음이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어서.
굳이 애써 의미를 찾고, 그 의미의 퇴색에 스스로를 혐오했다가도, 넘어져서 우는 아이 달래듯 다시금 자신의 마음에게 애써 옷을 반듯하게 입혀주고 먼지를 털어주는 그 과정을 나는 반복한다.
어쩌면 내가 입은 기억의 상처들은 의미의 퇴색 때문이 아니라, 내 의미가 너에게 그저 무의미함으로 닿았단 것 때문이었을지도.
나는 그럼에도 어쨌든 나와 닿았던 '모든 너'의 의미를 고민하고 사랑한다.
너는 그럴 의미가 있는 사람이므로.
의미라는 건 어쨌든, 생각을 계속 살아있게 하니까.
그게 있는 동안엔 어쨌든 생의 과정을 하고 있으니.
나는 살아있는 순간에는 살아있고 싶다. 그래서 그 지겹도록 지긋지긋한 '의미'에 연연하는 것이었으니.
때로는 지우는 게 힘들어서 의미라는 것을 새겼던 순간을 후회한다. 어쩌겠나, 조금만 닿아도 흔적이 남는 연약함인데. 그저 나의 일이겠거니 생각하며 미움받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