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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즌정 Dec 19. 2022

지워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실수, 혹은 사랑

<이터널 선샤인>, 2005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후련할까

사랑의 기억은 때론 아름답지만, 때로는 잔인하다. 너무도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끝이 날 때에는 부서진 거울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움켜잡은 손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그럴 때에 정말로 한 번은 생각해봄직하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래서 그 사람과의 기억을 다 지울 수 있으면 하고.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그런 많은 사람들의 흔한 생각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이고, 작품 속 배경이 되는 시점이 밸런타인데이의 전후이므로 계절감을 느끼기도 좋아서 겨울에 한 번씩 다시 보기도 한다.


 주연은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으로, 그 외 유명 배우들도 다수 등장한다. 특히나 짐 캐리의 바로 떠오르는 희극적 이미지와는 달리 건치 웃음 없는 진지한 톤의 연기가 꽤 자연스럽고 놀랍다.


 영화는 조엘(짐 캐리 분)이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의 기억을 지워나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는데, 그 무게감을 아주 잘 소화해냈다.

영화 속에서 조엘은 스스로를 원래 충동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칭한다. 그런데도 그는 한겨울 출근길에 느닷없이 일을 땡땡이치고 '몬톡(Montauk)'이라는 해변으로 향한다. 그도 스스로 이유를 모르지만 그렇게 한다. 그리고 클레멘타인이라는 머리색이 특이한 여자를 마주한다.


 그 순간, 조엘도 클레멘타인도, 관람객도 안다, 그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란 걸. 이렇게 영화가 흘러갔다면 그저 그런 로맨스 영화였겠지만 반전이 있다.


 사실 그것이 서로를 처음 마주한 순간이 아니었다. 그 둘은 사랑하던 사이였는데, 헤어졌고 그 기억에 괴로워 한 나머지, 기억을 지우는 회사에 의뢰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운 채 마주친 것이었다.




흠 없는 마음에 드는 영원한 햇살

설명만으로는 꽤 우습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영화가 설명하는 메시지는 다분히 철학적이고 상징적이다.


'흠 없는 상태'라는 것은 영화의 제목이 될 만큼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잘 만든 영화는 제목도 또한 그러하다. 영화에서 아예 대놓고 그 구절을 언급한 만큼, 그 부분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영어 원제목은 '흠 없는 마음에 드는 영원한 햇살'이며 이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의 구절을 인용했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처녀 사제의 운명은 얼마나 행복한가!
세상은 그녀를 잊고, 그녀는 세상을 잊어가네
흠 없는 마음에 드는 영원한 햇빛
모든 기도는 받아들이고, 모든 소망은 내려놓는구나.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Eloisa to Abelard) -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해석은 주관적 의미를 더했다; 여사제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세상 속 자신의 운명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그저 신만을 바라보면 되는 삶이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에는 흠도 없고 고뇌도 없이 신을 위한 기도만을 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을 했다.)


 우리가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함의 동기는 대부분 후회이며, 그 기억들을 흠이라고 여기고, 그 부분을 지워내면 마치 흠 없는 상태로 온전해질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흠이었던 기억을 지운다고 해도 흠이 없었던 존재였단 걸까? 영화는 그 사실을 자조적으로 비꼰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소지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주인공인 조엘마저도 원래 같이 살고 있던 여자가 있으면서도 클레멘타인을 처음 보고 그녀에게 호감을 느껴 접근했다.


시에서는 흠 없는/무결한 (blameless) 신녀를 영원한 햇살을 얻게 되는 자격 주체로 삼았으나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흠 투성이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에 빠질 때 상대에 대해 환상을 입히며 마치 내가 기대한 완벽한 어떤 모습을 그리지만 그 환상은 점차 깨지고 만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듯이 상대도 또한 흠 투성이인걸 점차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와 이뤄낸 관계에도 또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이를 클레멘타인의 호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책임을 나한테 떠넘기지 마.
난 그저 내면의 평화를 찾으려는 망가진 여자일 뿐이야


 그리고 이 흠 덕분에 사람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비슷한 이유로 쉽게 사랑에 빠지고, 비슷한 이유로 이별을 한다. 그렇게 슬퍼하다가 다시는 사랑 같은 걸 하지 않는다고 했다가도, 실수처럼 사랑에 빠진다.


망각에는 축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 또한 잊기 때문이라.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기억은 지우려 하면 지워지지 않지만, 그렇지 않을 때엔 쉽게도 잊혀진다.


우리는 이미 잊혀진 실수 같은 사랑을 기억하지 못한 채 또 같은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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