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즌정 Nov 23. 2022

딛고 나아가기 위한 끝없는 날갯짓

<벌새>, 2019


90년대의 향수

90년대가 주는 어떤 것에 공감할 수 있냐고 하면, 반반이다. 나는 조금 더 후발주자인 00-10세대.

나의 사촌 언니나 오빠 정도가 은희의 세대와 가깝다.


비슷한 시기에 화제가 된 미국 <미드 90 (mid90s)>도 90년대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표현하는 감성이야 물론 다르겠지만 큰 틀에서 느껴지는 바로는 이제 감독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점점 내가 기성세대가 되어가고, 문화의 주 생산층과 소비층이 되어간다는 뜻일 거다.


이건 이거대로 서글프지만, 아무튼 이 영화가 주는 90년대의 의 감성과 디테일함은 정말 너무 놀라서 입을 틀어막을 지경이었다.

공간적 묘사나 비주얼적인 것도 있지만, 그들이 사건에 대해 반응하는 일련의 사고나 행동방식 등이 그랬던 것 같다.

특히 90년대에 주로 지어졌던 복도식 아파트는 너무나 그런 환경을 조성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키 차일드(key-child):맞벌이 부모를 가진 아이'라는 표현의 유래처럼, 나 역시 열쇠를 가지고 다니며, 어릴 때 방과 후에 집으로 들어갈 땐 사람이 없어, 열쇠를 까먹고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할 거란 공포가 있었다.


요즘의 도어록 세대는 공감할 수 없는, 휴대전화가 없고 집 열쇠도 없을 때에 할 수 있는 건 소리치며 문을 두드리거나 문고리를 몇 번씩 당겨보는 일뿐이라는 거. (그리고 그럴 땐 으레 옆집 아주머니가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있다가 가라고 하셨다.)


또, 아파트 현관을 친척 어르신들은 그렇게나 여는 법을 모르셨다.(심지어 다른 아파트에 사셔도 그랬다.) 그래서 꼭 내가 열어드려야 했던 기억. 그 디테일함이 너무 놀라웠다.

(영화 장면 장면들이 어찌나 섬세하던지, 그 섬세함을 몰라주면 미안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90년대가 꽤 옛날이지만 의외로 지금보다도 '별난 세상'이었던 걸 어렴풋이 기억한다.

(필자가 어릴 때 봤던 90년대인지 2000년대 배경인지의 드라마에 대학생 여주인공이 원조교제를 한다는 내용이 버젓이 공중파 드라마에 나왔다.)


그리고  영화에서 묘사되는 성수대교 붕괴 등의 갑작스럽고 재난적인 큰 사건들도 더러 있었다. 그런 사건들이 너무도 뜬금없는 때에, 예고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갑작스럽게.


시대적으로 핵가족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공동체가 붕괴되는 과도기적 사회였고, 은희도 그랬듯이 나도, 또 주변 많은 친구들이 그랬듯이 맞벌이 부모님을 점차 겪게 되는 시대였다. 난 또 IMF 직후의 세대라 많은 내 또래 친구들은 학교를 마치고 가면 집에 혼자, 또 그렇게 학원에 다녔다.


영화에선 강남 대치동이란 설정에 '교육열'에 대한  부분이 다른 측면으로 강조되기도 했지만, 시대의 경제상 변화로 점차 늘어나는 대부분의 맞벌이 가정에서 당시 아이들의 학원행이 교육열은 물론이거니와 방과 후 홀로 남겨진 아이들의 비자발적인 선택지와도 가까웠다. 일례로 나는 어릴 부모님께 처음으로 학원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는데, 그 이유는 '친구들이 다녀서'였다. 학원에 안 다니면 방과 후 같이 놀 친구가 없었다.


이혼 가정이 처음으로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고, 30평 남짓한 아파트 거실의 상징은 컬러 TV와 가죽소파가 되기 시작하던 시절이다.


그 시대의 두드러지는 또 다른 측면은 지난 폭력에 대한 시정과 자각 없이, 남은 폭력은 그저 그대로 묵시한다는 점이다. 80년 전후의 민주화 운동 시대의 폭력적 잔재가 90년대 문민정부로 들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 격변기를 겪었음에도 이제껏 없던 자유의 시대를 다르다는 듯 살게 되었으나, 그 남은 폭력적 잔재는 자각하지 않고 자연스레 흘러가게 두었다는 점이다.


은희도, 친구 지숙도 오빠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건 그 애들이 여자애들이라서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체벌이 모두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이 우선인 것 같다.

나도 체벌당할 때는 매를 맞았고, 내 오빠의 경우는 '남자애'라는 가중치가 붙어서 피멍이 들도록 학교에서 선생님께  체벌을 당했다.


그때 우리 부모님은 '네가 맞을 짓을 했겠지.'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어쩔 수 없는 그 시대분들이었고, 폭력이 폭력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던 세대였다. 그래서 최근에서 그때 선생님들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생겨났던 게 아닌가. 우린 그렇게 자라왔던 것이다.


온 집안 막내였던 내가 드디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다니.

그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




소녀의 성장

솔직히 영화가 어느 정도 페미니즘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 남성들과 대치적 관계를 이루고 있음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숱한 논란을 낳았던 '82년생 김지영'이란 작품이 영화화되면서 그 반감이 더욱 드세진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비치고 있는 페미니즘은 반감이 덜할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영화의 주인공이 어린 소녀이기 때문이고, 이 영화의 전개는 이 조그만 여중생의 모든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젠더를 떠나, 사람이라면 모두 연소자나 연로자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실제로 남성 관객들도 꽤 많았다.


또 이 작품이 갖는 특이성은, 소녀적 관점에서의 성장, 그것도 1)이 시대의, 2) 소녀의, 시점에서 성장하는 것에  있다.


1) 우리 세대의 변명

 이 세대는 90년대에 주어진 자유에 대한 공덕으로 주로 '윗세대의 희생'에만 포커스를 두고 교육을 받아 왔다. (예를 들면 영화 <국제시장>)


2박 3일 캠프에서 둘째 날 밤엔 캠프파이어를 하면 꼭 사회자는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 그러면 꼭 모두가 눈물바다였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깨닫는 것이다.


우리 세대 또한 그리 즐겁고 쉽게만 자라온 게 아니라는 것과, 부모세대들이 나만을 위해 모든 걸 다 포기한 건 아니라는 것(공부를 잘하는 다른 형제 또는 성별을 기준으로 주로 남자 형제의 경우와 차별을 뒀던 점) 또는 나만을 위해 모든 걸 다 포기했기에 나는 발언할 수 없었다는 것을.


위에 서술한 생각들이 요즘 이런 시대적 배경과 장르 특성을 갖는 영화가 많아지는 것에 대한 이유라고 생각이 든다. 이제 충분히 시간이 지나 그때의 상황을 발언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2)'이미지'로써 소비되는 것이 아닌, 소녀의 현실세계 이야기

그간 영화에 연소자가 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어린 순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어른들의 셈에 의한 장치에 불과했다. 돌아보아도, 소녀의 시점으로 이렇게 성장 과정 속 세밀한 심리묘사를 보여준 한국영화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특히 현실에 맞닿은 성장 과정을 보여준 한국영화는 더욱. 그래서 그 자체가 너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은희의 무표정 속에 담긴 진짜 표정이 뭘까를 생각하며 클로즈업된 은희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최근 한국 메이저 영화가 부진한 가운데 혜성처럼 등장한 높은 작품성의 비주류 영화로 꼽힌 두 작품은 여성 감독의 작품들이고, 소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점도 닮았다.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해도 성장하고,

개인적으로도 영화를 보면서 나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나의 어머니께서 아들인 오빠에게 주는 사랑과, 딸인 내게 주는 사랑의 결이 다르다고 느꼈던 것이다. 딸인 내가 어머니의 정서와 깊게 유대하기는 했어도, 물질적인 것으로는 내게 주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오빠는 어릴 때 엄마에게 이것저것 많은 것을 해달라고 쉽게 요구하고 쉽게 화를 냈다. 그리고 엄마는 쉽게 다 주었다.


나는 어렵게 요구하고, 엄마는 어렵게 내게 주었다.

 '엄마, 왜 나한테만 돈 없다고 그래? 오빠는 맨날 다 해주면서!'

그때의 엄마는 내게,

 '오빠는 남자니까 없이 지내면 기죽는다'라고 했던 걸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근데 그땐 어려서 이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난 착하고 혼자 둬도 제 알아서 한다'가 정말로 칭찬인 줄 알았다. 그래서 정말로 그렇게 살아왔는데.

영화를 보고 눈물이 났다. 내가 바보였다는 걸.

엄마를 원망할 수 없는 게, 엄마도 그런 삶을 당연히 살아왔으니까 내게 그런 삶만을 당연하게 주었겠지.




사랑과 유대를 통해서도 성장하며,

그리고 퀴어 장르인가 아닌가에 대한 모호성도 지니고 있다. 은희를 비롯한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후배와의 특별한 관계적인 이야기들, 은희가 동경하는 여선생님과의 사이에 생기는 특유의 긴장감이 영화 내내 자리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서 감독의 잡지 인터뷰를 보니, 이 장면들 때문에 해외에서는 '퀴어 장르'로 분류가 되기도 했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린 소녀가 가질 수 있는 성장 과정 중 흔한 감정/기간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실제로 내가 여중생일 때, 학교에 그런 소문들과 일들이 공공연하게 있기는 했었다.

후배가 선배 언니를 동경+반함의 시선으로 따른다던가.

친절한 여선생님에 대해서 여학생들이 유독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는 것.


이 또한 노골적인 묘사가 아닌 특유의 섬세함으로 다루어져서 장르에 적합하게 재미있기도, 발칙하기도 했다.




이별을 통해서도 성장하는 소녀의 세상

은희가 마주하는 다른 이들의 세 차례의 죽음, 그 속에서 은희가 성장했다고 감독은 인터뷰에서 말한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성수대교의 붕괴는 순식간에 어떤 사람의 세상이 무너지는 커다란 일이었고,

또 그렇지 않았던 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다른 세상의 일과도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가 곁에 없다는 상실을 다루는 것,

그리고 그 일을 뒤로하고 또 마주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

또 그 슬픔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때로는 추억할 수 있는 것.


그 속에서 우리는 내면의 성장이라는 과제를 해오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은희는,


 내가 언젠가는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라고 편지에 썼다.


그와 비슷한 질문을 했던 나는 또한 어렸을 때의 나였고, 이제는 그 대답을 되돌려주기 위해 어른이 된다.

그렇게 빛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영화 속에서 선생님 영지는 스스로가 싫어질 때 손가락을 움직인다고 했다.


나도 또한 이제는 질문이 아니라 대답을 해주기 위해, 어떻게라도 빛나는 삶을 살아보기 위해

분주히 움직거린다든가, 글을 쓴다든가 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대의 아이콘으로 사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