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했다고 한다. 나는 읽어보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를 그렇게 선호하는 편은 아니라서 큰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새삼 무라카미 하루키, 아니, 일본 소설 자체의 콘텐츠 파워는 어마어마하다고 새삼 느끼게 된다.
원작의 소설이 있고 영화가 제작되었다고 한다면, 오히려 원작 정보 없이 영화를 먼저 보는 게 언제나 좋다고 스스로는 생각한다.
원작을 보고 영화를 본다면 뭔가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되어버리는 자신을 발견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름대로는 원작 소설을 읽는 일 없이 영화를 먼저 본 게 괜찮았다는 생각이다.
'헛간'이라는 단어를 보고 있자면, [무한도전]에 나왔던 혁오 밴드와 정형돈이 함께 부른 '멋진 헛간'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꽤 신나는 컨트리 음악의 쾌활한 무드지만, 가사의 내용이 제법 철학적이고 짜임새 있는 이야기여서 한 번쯤 생각을 해보게 된다.
열심히 일해 차곡차곡 모아둔 헛간에 도둑이 들어, 애써 모아 놓은 모든 것이 텅 비어있더라는 허탈감.
그보다 더 공포스러운 반전은, 드나든 발자국이 '내 것 하나뿐'이었다는 이야기의 가사.
내가 나를 위해 애써 노력해도, 한순간의 젊음과 유혹에 빠져 내가 나를 탕진하는 탕아가 되어있었다는 이야기다. 나도 그 노래를 듣고 가슴이 꽤 철렁거렸다.
특히, 그 노래가 떠오른 이유는 청춘의 방황이라는 측면에서, 꽤 이 영화와 접점을 같이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존재감
영화는 철저히 종수(유아인 분)가 중심으로, 그의 시선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속에서 종수가 좇는 실체를 관객들도 따라 좇게 된다.
종수는 현 우리나라 속 어느 군데에서 한 번쯤은 볼 수 있는 처지의 청년이다.
대학은 졸업했으나, 이렇다 할 직업이 없고 작가를 꿈꾸며 글을 쓴다고 자신을 소개하지만 실제로 그가 글을 제대로 쓰는 장면은 고작 감방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작성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불안정한 고용 형태인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기도 한다.
지금의 그 나이대 청년은 최소 한 두 가지 정도는 그와 접점이 있으리라 확신한다.
전혀 공감할 수 없다면 그의 영화 속 말을 빌려 '개츠비'와도 같이 젊은데 하는 일은 모르겠고 돈은 많은 그런 존재일지도. (물론, 이 또한 현실에서 꽤 볼 법한 청년상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적 현시대 속에서 존재와 삶의 의미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
특히 종수나 혜미(전종서 분)가 그 나이대와 그 처지로 설정된 것이 더욱 메시지를 확고히 했다고 본다.
장면을 예로 들자면, 일용직 일을 구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 틈에서 1, 2, 3 등 번호로 매겨지는 것,
자본적으로 우월한 지위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광대처럼 (나름대로는 스스로를 다른 이들과 특별하다고 구별 짓게 했던)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전하는 혜미와도 같은 여자들이 쉽게도 대체되어버린다든 점,
또 비닐하우스에 느껴지는 어떤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메타포는 특히 현 청춘 세대를 겨냥한 어떤 메시지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체 가능하고, 설치와 해체가 비교적 짧고 손쉬우며 불에도 화르륵 한 번에 타버리며, 불타 사라진다한들, 경찰들이나 여타의 이목을 집중할 만하지도 않고, 대수롭지 않은 그저 흔한 일.
미스터리 장르로 분류되는 '사건'에 대하여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상징적이고, 시적이다는 평가를 많이 받고는 한다.
그래서 이 영화 <버닝> 또한 은유와 상징적 내용이 많지만, 장르가 '미스터리'라고 분류된 만큼
사건을 미스터리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서 잠깐 설명을 해보자면, 벤(스티븐 연 분)의 살인자적(포식자적, Predator) 면모가 느껴졌다.
스스로 프로파일러는 아니지만 미국 수사물 드라마를 많이 봐왔던 나로서, 그들을 패턴화 한 특징이 벤과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공감의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소시오패스적인 살인자들은 정리가 깔끔하고, '전리품'을 갖는 경향이 있다.
영화에서 혜미가 실종 상태가 되었을 때, 종수는 그의 집 서랍 속에서 여자들의 머리핀 또는 귀걸이 등 액세서리가 모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벤의 영화 속 대사를 빌려서 그는 요리를 좋아한다고 했다.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서 먹어버리기까지 해서 좋다며.
게다가 메이크업 박스로 여자를 꾸며주는 장면이 나오고 그 뒤는? 글쎄. 직접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으니 판단은 관객들 몫이다.
존재와 삶의 의미를 위한 헝거
그래서 혜미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생전 처음으로, 이러한 류의 이야기를 접하면서도 혜미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할까, 혜미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그렇게 궁금하지가 않았다.
그냥 혜미의 오렌지를 먹는 팬터마임처럼 그 사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해버리는 것이었다.
혜미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위한 헝거'는 그런 식으로 성립된다.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부정을 한 번 더 부정해버리는 굳이 어렵고도 다소 우회적인 방법으로.
이를테면 ' a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a의 부존재를 잊는다'
-오렌지가 있다가 아닌, 오렌지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왜 굳이 그렇게 어렵게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가.
혜미와 종수의 현시점에서 그들은 '헝거'의 상태를 충족시키지 못한 불만족의 상태에 놓여있다.
즉, 그들은 한 번도 '존재'한다는 상태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태를 부정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던 게 아닐까.
게다가 현실에서 실패와 좌절의 연속 속에서 나약함의 극단을 달릴 때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남겨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대답을 부정함으로써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소멸과 부정으로써 되찾는 존재의 의미
그리고 제목의 의미를 줄곧 궁금해하며 생각을 정리해봤다.
태우는 것은 소멸이지만, 부정과 부존재를 소멸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존재와 긍정을 입증하는 반증(反證)이 된다.
그래서 나는 결말의 의미는 오히려 종수가 그 사실을 긍정한다기보다 부정의 부정을 반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벤의 존재는 혜미의 부존재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 어떤 것, 그 사실을 한 번 더 부정해버리면 결국 혜미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