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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름의 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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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코 Aug 20. 2023

구름¹: 비행운

름의 나열 ch.6


부끄러운 순간들이 있다. 아니, 사실 지나고 돌아보면 부끄러운 순간들이 안개처럼 자욱한 것이다. 사는 것이란 게,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걷는 것처럼 모든 순간들이 처음인 것이다. 길도 없이 하얗기만 한 평지 위에 어린 나는 매번 최선을 다해 발자국을 남겼지만, 자란 내가 보기엔 그저 어설프고 어여쁘지 않은 실수들의 향연이다. 지금의 나도 곧 어리숙한 모습으로 남게 될지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았던 걸 보면, 이건 천성인 것 같다. 내가 당연히 제일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같은 반 다른 친구가 승리를 가져가 버린 날은 집에 와서 목이 나가라 통곡을 했다. (엄마는 이 일화를 귀엽다며 여즉 좋아하지만, 나는 목이 아프도록 메여오던 것까지 기억한다.) 하지만 욕심이 많다고 해서 모든 부분에서 남을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먹는 일에 흥미도 없고 많이 먹지 못하는 탓에 식탐을 부린 적은 없다. 남들이랑 음식을 쌓아두고 같이 먹는 자리에선 매번 손해나 보고 온다며, 엄마가 놀리듯 말할 정도였으니까. 숫자나 셈에 약한 탓에 수학을 남들보다 잘해보기 위해 노력한 적도 특별히 없다.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 '수포자'가 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하지 못할 것 같은 일에 시간이나 노력을 들이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면 나는 참 얄밉게도, '이길 것 같은 게임'만 하곤 했다. 내가 잘하거나 잘할 것 같으면 주저 없이 링 위로 오르곤 했지만,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단숨에 포기해 버렸다. 게임을 하지 않으면, 지는 일도 없으니까. 아쉬울 것도 없었다. 어쩌면 나는 단순히 남을 이기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 게 아니라, 지는 것을 무서워했을지 모른다. 내게 실수와 실패가 카운팅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잘하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던 것이 있다면, 사랑이다. 사랑은 달콤하게 꿀 냄새가 나는 꽃이었고, 나는 늘 홀린 듯이 이끌리곤 했다. 나는 멍청할 정도로 몇 번이나 사랑의 게임을 했지만,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넘어지고 깨지고 망가졌다. 이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무도, 그리고 어디서도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매번 우스울 정도로 서투른 몸짓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끊임없이 시도했다. 하지만 뭐든 실패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던 나에겐 잘 넘어지는 방법도, 그리고 상처를 잘 회복하는 방법도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기 때문에 주저앉을 때면 이런 짓 따위 다신 안 하겠다 마음을 먹어도, 이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날벌레처럼 상처 난 몸을 끌고 또 사랑을 했다. 항상 잘 해내지 못했지만, 끝내 잘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사랑의 서사를 돌아본 날이었나. 나는 새삼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실수와 실패의 순간들이 작은 얼음조각처럼 서로 엉겨 붙어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운 모습들이, 그렇게 뜨거운 온도의 순간들이 하나 사라지지 못한 채, 차가운 생 위에 하얀 입김 같은 자국들을 길게도 남겨왔다. 나의 생 어디에서도 그렇게 짙고 긴 꼬리는 없었다. 그것은 나의 비행운이었다.




엔진이 배출한 뜨거운 온도의 공기를 만난 수증기는 높은 고도의 대기층이 가진 차가운 온도 속에서 급속도로 응결되며 작은 얼음조각이 되고, 그대로 구름의 모습이 된다. 그러니까 최소 영하 38도 정도는 되는 환경이어야 한다. 비행하는 항공기의 뒤를 따라 생기는 구름을 일컫는 말이라, 이름도 어쩜 '비행운'이다. 사랑의 뒤를 따라 생긴 사랑의 비행운은, 너무 아프고 민망하고 추했기 때문에 지우고 싶던 순간들이 결국은 지워지지 못한 채 얼어붙은, 알고 싶지 않지만 선명하게 기억되는 거대한 꼬리인 것이다. 오점으로 얼룩진 역사라도 어쩔 수 없는 도리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니까 괜찮다. 나는 날고 있었다. 사랑할 때, 항상 높은 고도에서 날고 있었단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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