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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ONSU Feb 09. 2024

나를 버려야 새로운 것을 얻는다

배움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 +퀴어에 대한 생각 변화

배움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수정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배움이다.


자신이 알던 사실이 거짓임을 알게 되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배움의 태도를 바꾸는 것은 삶의 태도를 바꾸는 거와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 살아가기 위해서, 스스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저마다 자신의 상황을 개척한다.


배운다는 것은 뭘까, 나는 왜 배우고 있을까? 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게 되었다.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함일까, 아님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일까?'  

이렇게 나는 공부가 어떠한 특권을 주는지 어른들에게 들었지만 그것이 어떤 가치와 유용성을 갖는지 스스로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남들이 다 하기 때문에 따라서 하고, 이 지식이 무슨 쓸모가 있을지 의문과 비판이 생기면서도 스스로 말문이 막혀 '그냥 하자'라고 믿어왔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비전들은 평소엔 무질서하게 떠다니는 존재에서 확실한 형태로 느껴졌고, 학교 내 사회가 요구하는 배움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겐 리스크가 있다는 말 관철시킬 수 있는 그런 강자도 아니었기에, 사회 네트워크 밖으로 튕겨지는 게 무서웠던 것도 있었다. 완전한 자유를 누르고 살고 학교 안 시스템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도, 자기실현을 하기엔 내가 나 자신을 알기가 가장 어려웠기 때문에 남들이 가잘 잘 안다는 말들을 보고 달려갔다. 고등학생 때는 누군가가 주는 교육으로 자신을 채울 수 있었지만, 자신에게 주는 배움이 없었다. 그리고 학교 안, 작은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다.


성인이 되고 세상에 나오면 스스로 세상을 보고 중요한 것을 느끼고 배운 것들로 새로운 나를 채워가기 작했다. 가족과 학교에서부터 배운 것들이 비워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나형성시키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사회에서 주는 배움은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는 점을 점차 알게 되었다.




그 계기는 어렸을 때 들었던 고정관념을 버리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동성애자가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 모태신앙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내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동성애자들을 보고 잘못되었다는 부정적인 말들을 해왔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이 말들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 세상 속 모두가 동성애자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이례적이어서 나와는 마주칠 일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다 친구들하고 퀴어 퍼레이드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하다가 나는 어쭙잖은 지식으로 동성애자들은 자연의 순리에 맞지 않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가, 친구 한 명이 크게 화를 내서 친구들하고 말다툼을 했었던 적이 있다. 이후에 다른 친구한테 들은 내용으로는 화를 냈던 그 친구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동성애자들은 홍석천같이 소수의 취향을 가졌지만 유명해서 방송에 나오는 나와 먼 존재들 비현실적이고 알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는데, 몇 년 동안 무리에서 같이 지내왔던 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얘기를 들으니 그 친구에게 큰 실수와 상처를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면서도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기가 무서워서 아무 행동을 하지 못했다. 틀린 것을 바로잡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때라도 진실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인권에 관한 시사하고 이슈들을 찾아보고 관심 있는 책들을 읽었다. 그전과 완전히 다른 시야로 세상을 보고 나니, 지금까지 동성애자들을 일반적인 틀에 넣어서 보고 나쁘다고 규정하는 그 사람들의 말만 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통찰하는 시야 없이 단정 지어서 말하는 사람들의 말이 사실인 줄 알고 똑같은 말을 누군가에게 분별없이 말을 내뱉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이후로는 성소수자들도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구나, 그저 평범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성소수자들이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주변에 어울리는 친구들도 이전과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열린 생각으로 세상을 보는 친구들과 교류하며 지낼 수 있었고, 그때 친하게 지냈던 애들 중에는 커밍아웃한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상처 줬던 그 친구한테는 아직까지 사과하지 못했다. 다른 대학을 진학했기 때문에 자연히 멀어진 것도 있지만, 진짜 그 이유는 학폭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한 댓글에, "피해자는 가해자들과 마주치는 것조차 불편하다"라는 댓글에 많은 좋아요가 달려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댓글에 공감했었던 게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내가 했던 행동이 악질적으로 상습적이게 괴롭히는 학폭 가해자들과는 결이 좀 다를 수 도 있겠지만 결국엔 상대방에 대한 혐오를 보인 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상처를 줬던 친구의 눈에 안 띄고 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사과이자 배려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고 이전의 잘못된 방식을 그대로 반복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나에게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스스로 진실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매번 상기시킨다.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는 나의 무지가 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 점도 있지만 과거를 답습하면 발전은 없다.


고등학생 때처럼 정신의 소유권이 남에게 있는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은 버리고 기존에 있던 관념들을 비워야 내가 배운 것들로 나를 채울 수 있다고 느꼈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들만 보고 세상을 바라봤던 판단 했다. 어릴 때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 당시 내가 이야기하던 것들은 나의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했고 남의 이야기에 쉽사리 흔들렸다. 진정한 삶은 나를 붙잡고 조종하려는 것들 속에서 벗어나서 스스로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자신의 교육이 실현된다는 것은 나를 속박하려는 것들로부터 벗어나서 더 이상 남이 나에게 주입시키는 말들에 흔들리지 않을 때이다. 스스로 부족한 지식의 구멍을 생겼을 때 메우는 게 되면 정체되어 있는 배움이 변화한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라도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다면, 우리는 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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