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아기 엄마
아기를 둘러업고 베란다로 나간다. 저 아래에 남편이 두 팔을 휘저으며 출근하는 모습이 보인다.
1983년 초여름, 이른 햇살에 눈이 부시다. 오 층인 아파트 맨 꼭대기 층 베란다에서 보는 하늘은 더 파랗다.
‘아! 나도 출근하고 싶다.‘
등에 업은 아기를 뒷짐 진 손으로 들썩해 추겨 올리고 방으로 들어온다.
밤새 아기가 안 자고 울어서, 안거나 둘러업고, 밤을 새운다. 내려놓으면 운다.
난산으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아기가 뱃속에서 배내똥을 먹었고 황달이 오고, 머리에는 출산할 때 사용한 보조 석션 기계로 생긴 꽤 큰 상처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아기는 퇴원 후 밤새 못 자고 울었다. 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갓난아기를 어떻게 다루는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냥 엄마가 된 나는 출산 당일부터 완벽한 엄마 노릇을 해야 했다. 아무런 지식도 연습도 없이 어느 날 엄마가 된 것이었다.
젖은 안 나오고, 너무 졸리고 팔과 손목이 아프고, 등도 빠개지듯 아팠다. 그리고 아기는 밤낮으로 누가 꼬집는 것처럼 찢어지듯 울었다. 두렵고 무서웠다.
남편은, 아내라는 여자는 출산과 동시에 마치 예전에 인기 있던 미국 영웅 드라마 ’ 원더우먼‘처럼 한 바퀴 돌면 디지털 로봇 옷을 입고 전지전능하고 힘센 엄마로 변신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아내는 태어날 때부터 ’ 엄마‘라는 변신체가 몸에 장착되어 있어서 아기를 보면 곧바로 ’ 여자‘에서 ’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엄마‘로 변신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육아를 힘들어하고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지 이해는커녕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다.
나 역시도 결혼하고 아기 낳으면, 저절로 능숙한 엄마가 되는 줄 알았나 보다. 다들 잘하고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인지, 뭐가 뭔지 모르겠고 두려울까 하는 생각에 더 좌절감만 생긴 것 같다. 친정엄마가 안 계셔서 힘든 건 줄만 알았다. 왜 내 아이를 함께 길러야 할 파트너를 남편이 아닌 친정엄마라고 생각했을까?
“나 육아 처음이야. 그래서 아무것도 몰라. 우리 아기는 당신과 내가 함께 의논하고 도와가며 길러야 해. 두렵고 무서워. 나 진짜 아무것도 몰라.”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나도 육아는 온전히 여자의 몫이고 여자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었나? 아기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차마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이니 어떻게 남편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도움을 청했던들 남편이 무엇을 해줄 수 있었을까?
남편이 출근한 후의 집안 풍경은 날 짓눌렀다.
욕실에는 밤새 나온 기저귀가 물에 담겨있고, (그때는 소창 기저귀를 쓸 때였다) ’ 저걸 언제 빨지? ‘ 한숨만 나왔다. 오줌 기저귀는 세탁기에 돌리기 전에 대야 물에 담가 소변기를 빼고 애벌빨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융통성 없는 생각인지, 그만큼 어떤 정보도 없었다.
싱크대에는 설거짓거리가 쌓여 있고(뭘 먹은 기억도 없는데 설거지는 만날 있었다. ) 먹을 것은 없고.
누가 반찬이라도 좀 해 주었으면, 누가 김치라도 좀 해 줬으면, 누가 아기를 두 시간만 봐줬으면, 누가 아기는 어떻게 기르는 거라고 가르쳐 주었으면, 잠 좀 자봤으면, 무기력해지고 우울했다.
남편은 결혼식과 동시에 다시 미혼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결혼 전이나 후나, 아이 출생 전이나 후나 달라진 일상은 없었고, 오로지 직장에 충성하고 승진에 목마르고 퇴근 후 밤놀이 회식 문화에 흠뻑 취해있었다.
그 시절 내가 가끔 물어보던 동화 같은 질문이 있었다. “가정과 직장 어느 쪽이 중요해? “
남편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답했다. ” 직장! “ ( 좀 망설이기라도 하지.)
그때 아기를 바라보며 빌었던 소원은, 내가 오래 살아서 최소한 우리 딸이 출산할 때는 옆에서 토닥여주고 보살펴주는 거였다.
다행히 우리 딸들이 결혼하여 아이 낳는 것도 보았다. 비록 일본에 있었기에 산후조리를 직접 해 주지는 못했지만, 내가 겪었던 그런 고립무원의 절박했던 고통은 없었던 것 같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결혼 전후 남자와 여자의 변화는 극과 극이었다.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퇴직해야 하는 분위기였고, 남자는 어떤 변화도 없이 오히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직장 생활과 취미 생활까지 가능했다.
난 임신과 함께 근무하던 약국을 그만두었고 남편은 자기 계발을 위해 퇴근 후 영어 공부도 하고, 잦은 회식, 동료들과 당구, 고스톱으로(그 시절엔 고스톱이 전 국민 오락이었다) 매일 새벽 서너 시에 들어오고, 아무런 연락 없이 아침에 들어오거나, 일요일도 테니스 라켓 걸머지고 나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심지어 위풍당당했다.
난 후줄근한 티셔츠에 부스스한 얼굴로 젖먹이 둘러업고, 경쾌하게 나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절 내가 어떻게 아기를 키웠는지, 잠은 언제 잤는지, 무엇을 해 먹고살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두운 먹구름 낀 정지된 시간으로 기억될 뿐이다. 내 가치관과 정체성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혼돈의 시간이었고, 안개 낀 혼란의 어둠 속에서 난 무엇이든 혼자 해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고, 강한 엄마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5개월 된 아기를 둘러업고 약국을 개업했다.
햇살 가득 받으며 화사하게 출근하는 남편을 메마른 눈으로 오 층 베란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아기 업은 스물여섯의 젊은 여자가 보인다. 그녀에게 달려가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예쁜 아기를 대신 받아 안고는 그녀에게 잠시 눈 좀 붙이라고 해야겠다. 그녀가 단잠을 잘 동안 진한 소고기미역국 한소끔 끓이고, 고등어 반 마리 굽고, 그녀가 좋아하는 열무김치 한 보시기랑 따뜻한 밥 한 그릇 퍼서 뜨끈할 때 편히 먹으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