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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네 Aug 19. 2022

II. 수도원복에 담긴 의미

안나 본 디 베네치아 | 제2편

'안나, 4세, 1743년 3월 8일'


앞으로 이 여성이 이룩한 음악적 성과에 비해 얼마 되지 않은 기록 중 하나인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 그리고 지금은 음악원이 된 피에타 음악원에 남은 입학 기록이다. 4살의 안나는 부모님과 앞으로 자신의 선생님이 될지도 모르는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짧은 대화가 끝나며 음악원의 선생님은 조그마한 안나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하였다. 아마 학교의 선생님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것이라는 부모님의 이야기처럼 그 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그렇게 안나는 4개의 음악원에서 항상 행하는 대로 입학시험이라는 관문을 만나게 되었다. 결과는 모두가 예상한 대로 합격이었다. 이리하여 가장 어린 학생 중 한 명인 안나 본 디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전도하기 위해 오랜 헤어짐을 결심한 부모님과 이별하며 엄격하고 빽빽한 수업이 기다리는 피에타 음악원에 남게 되었다.


피에타 음악원 원생들의 복장은 수도원복이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하얀 수도원복을 주장하지만 당시 그림과 같이 검은 옷과 흰색 깃을 가진 수도원복이라 추정하는 이도 있다.  


금욕적인 피에타 음악원에서 안나가 처음으로 한 일은 바로 빳빳하고 새하얀 수도원복을 받는 일이었다. 앞으로 신성한 음악과 이렇게 귀한 기회를 준 신에 대한 감사를 담은 수도원복을. 어린 안나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새하얀 수도원복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이 수도원복엔 음악에 대한 애정과 경애가 담겨있는 것을. 다음날 눈부시게 하얀 수도원복을 입은 안나는 쉴틈도 없이 복잡한 복도를 가로지르며 자신의 선배들과 함께 여러 강의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성악과 기악, 그리고 음악 이론만을 배울 줄 알았는데 교회 음악을 연주하는데 필요한 경건한 라틴어, 서양 음악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그리스어, 그리고 중세시대를 지배한 프랑스어도 수업에 포함되어 있었다. 


수업 과목은 여기서 끝나면 좋겠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음악을 위해 기본 훈련은 끊임없이 안나와 함께 하였다. 음을 바로 포착할 수 있는 청음 훈련, 그리고 독보력을 키우는 솔페지오, 악보를 보자마자 머릿속에 음악을 그려 넣을 수 있는 시창, 거기에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마니에라*라는 과목까지 모든 것을 섭렵하기 위해선 안나는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4살의 어린아이는 모든 수업을 이내 척척 해내며 주변에 놀라움을 선사하였다. 물론 이 모든 일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4개의 오스페달레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피에타 음악원이 아닌가. 거기서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안나의 음악 실력은 베네치아라는 도시 속에서 얼마나 뛰어난 음악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니에라 Maniera : 무대를 장식하는 방법을 제시한 과목




모두의 이목을 집중받은 안나는 입학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부모님 이후로 자신의 인생을 흔들 첫 번째 스승을 만나게 된다. 악기 이름을 자신의 성으로 삼을 수 있는 마에스트로의 경지에 다다른 '칸디다 달라 비올라 Candida dalla Viola'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을. 이 여성은 일찍부터 훌륭한 스승, 훌륭한 마에스트로로 베네치아를 휘어잡은 여성 음악가로 정평이 자자한 비올라 연주자였다. 악기의 이름을 가진 이 여성의 이름은 한 악보의 귀퉁이에 휘갈겨 쓴 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펠레그리나 달로보에 Pelegrina dall’ Oboè, 프룬덴차 달 콘트랄토 Prudenza dal Contralto, 루시에타 오르가니스타 Lucietta Organista라는 악기의 이름을 가진 여성 음악가들과 함께 이 여성의 이름이 남겨져있다. 그 악보는 바로 '오보에, 바이올린, 샬뤼모와 오르간을 위한 소나타 Sonata for oboe, violin, chalumeau and organ, RV 779'라는 이름을 가진 작품이었다. 이 곡을 만든 이는 바로, 베네치아 공국에서 태어난 바로크 최고의 음악가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Vivaldi. 비발디는 이 곡을 구상할 때 자신의 의도를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해 줄 연주자로 이 4명의 여성들의 이름을 남기면서 자칫하면 역사의 한 편으로 잊힐 칸디다의 이름도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30여 년을 피에타 음악원을 위해 음악 재능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안토니오 비발디가 자랑스러워한 제자 중 한 명인 칸디다 달라 비올라는 자신에게 맡겨진 이 어린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총기가 가득한 청회색의 눈동자를 가진 안나 본의 눈에 비친 자신은 베네치아의 명망 있는 연주자도, 그 대단한 안토니오 비발디의 제자라는 평판보다 단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일 뿐이었다. 자신의 권위보다 음악의 재능에 주목하며 기대하는 제자는 얼마만일까. 칸디다 달라 비올라는 순수한 이 어린아이를 위해 자신의 음악의 은밀한 언어를 알려주기로 하였다. 그렇게 안나 본은 칸디다의 음악을 흡수하며 안토니오 비발디의 계보에 합류하게 되었다. 




피에타 음악원은 다른 3개의 음악원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하였다. 안토니오 비발디를 중심으로 성장한 이 음악원은 약 1,000여 명에 이르는 아이들이 함께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 모든 아이들은 서로 그룹을 지어 하나의 반이 형성되었다. 현재 사회에서 정해지는 임의적인 반배정이 아니었다. 이들은 음악을 목적으로 모여들었지만 피에타 음악원의 본질은 바로 교회 음악 중심인 베네치아의 음악을 배우며 교회를 위해 음악의 재능을 바치는 곳이다. 그래서 비슷한 노래 실력을 가진 아이들과 그 음악을 반주할 현악기 연주자들, 그리고 교회의 방방곡곡에 심겨있는 파이프를 울리기 위한 오르가니스트가 한 팀이 되어 하나의 반이 형성되었다. 이 하나의 그룹을 '코로 Coro'라고 불렀다. 즉, 말 그대로 하나의 합창단이 한 반을 형성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코로마다 각 도시에서 온 저명한 스승들이 배정되어 이 아이들을 음악의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가 된다. 


안나 본의 스승 중 한 명인 안토니오 포르포라 (좌)는 파리넬리 (중)와 카테리나 가브리엘 (우)의 스승으로 이들이 지닌 음색을 최고로 끌어올리는 개별 수업으로 유명하였다.


각 학생들이 가진 고유한 소리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개별 교육법을 시행하여 오늘날 가장 유명한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 Farinelli, 그리고 비범한 기교로 이탈리아의 모든 가수들이 따라한 소프라노인 카테리나 가브리엘리 Caterina Gabrielli를 키운 음악가이자 교육가였던 니콜라 안토니오 포르포라 Nicola Antonio Porpora. 그리고 막시밀리안 3세 선제후의 카펠 마이스터이자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작품을 헌정할 정도로 훌륭한 실력을 가졌지만 이후 교회의 화제로 대부분의 작품이 소실되어 더 이상 업적을 알 수 없는 작곡가, 안드레아 베르나스코니 Andrea Bernasconi. 이 화려한 경력을 가진 두 사람은 바로 안나 본 디 베네치아가 소속된 코로를 이끈 스승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안나를 이끌어주는 칸디다, 그리고 훌륭한 두 스승을 만난 안나는 매주 토요일과 주일, 그리고 공휴일마다 음악원 교회에 세워진 무늬 격자 뒤에서 아름다운 합창을 선사하며 하루하루 음악만을 위한 삶을 살아갔다. 새하얀 수도원복은 안나가 열심히 뛸 때마다 그 색이 바래지며, 작아져갔다. 그렇게 매일매일 함께 하며 최선을 다한 안나에게, 음악은 그 보답으로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예술적 비밀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넘어가며 안나는 여러 번의 수도원복을 수선하였고 그럴수록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닮은 이 음악가는 어머니를 꼭 닮은 단아한 목소리로 꿀송이를 머금은 듯한 노래를 선사하게 되었으며 칸디다 델라 비올라를 비롯한 여러 스승의 도움으로 건반 악기와 현악기, 그리고 여타 다른 악기들의 오묘한 작동 방식을 익히게 되었다. 음악의 오묘한 비밀과 함께 한 안나는 어느덧 어린아이의 모습을 던지고 앳된 어른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학문의 길을 걸은 안나는 오래 입어 이제는 여기저기 기워입으며 낡고 빛바랜 이 수도원복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수도원복은 음악을 향한 경애와 신에 대한 사랑을 뜻하기도 하지만 유럽에서 유일하게 여성에게 허락한 음악의 권리에 대한 증표라는 것을. 이제는 까끌까끌해진 수도원복을 만져보며 자신을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시켜준 아름다운 도시, 베네치아에 감사를 느꼈다. 유일하게 여성에게 문을 열어 준 물의 도시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한낱 아마추어 연주자로 끝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안나는 자신의 이름에 이 고마운 도시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그때부터 안나는 자신의 이름 뒤에 '베네치아 di Venezia'를 붙이게 되었다. 베네치아의 안나 본 Anna Bon di Venezia. 안나 본은 자신의 인생을 바꾼 이 도시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빛바랜 수도원복을 벗을 때가 다가왔다. 피에타 음악원을 졸업할 수 있는 17살을 맞이한 해, 오랜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부모님은 어느덧 훌쩍 성장한 딸을 만나 기쁨으로 가득하였다. 지롤라모는 자신이 계획한 그대로 음악의 본질을 꿰뚫게 된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에 휩싸였다. 역시 우리의 딸은 음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을 믿은 대로 이루어진 지롤라모는 사랑하는 딸의 재능을 세상에 꽃 피우기 위해 학교 생활의 끝을 매듭지어줬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새롭게 합류한 딸과 함께 지롤라모 본은 다시 한번 저 넓은 유럽 대륙에 위대한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전도하기 위한 여행길을 밟게 되었다. 




안나는 어린 시절 이후에 만난 부모님과 함께 금욕적인 음악원에서 넓은 바깥세상으로 발을 딛게 되었다. 그립고도 익숙한 베네치아를 뒤로하고 이 가족들이 떠난 곳은 바로 브란덴부르크 바이로이트. 자신이 베네치아에서 음악의 길을 닦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무료한 여행길을 즐겁게 만들어줄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4살의 안나를 음악원에 맡긴 후 두 부부는 드레스덴과 베를린, 레겐스부르크 등지를 돌아다니며 어느 도시의 음악보다 가볍고 경쾌한 기분을 안겨주는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고 한다. 넓은 광장의 한 편에 간이 무대를 세우는 것은 힘들지만, 아름다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무대에서 빛날 때마다 아버지는 그 모든 피로가 사르륵 녹아버리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고 넌지시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랑하는 딸아이가 15살이 되던 그 해, 아버지는 그리운 딸의 성장한 모습을 상상하며 레겐스부르크 궁정을 향하였다고 한다. 당시 레겐스부르크의 지배자, 알렉산더 페르디난트 폰 트룬 운트 탁시스 Alexander Ferdinand von Thurn und Taxis의 부름에 어리둥절하였다고 한다. 이 고귀한 후작은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지만 특히 프랑스의 예술을 사랑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음악을 하는 우리들을 초대하다니. 하지만 그들을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고지식한 음악과 다르게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자신들의 음악은 페르디난트 후작의 손님들에게 그 어느 음악보다 즐거움을 선사해줄 수 있는 음악이었으니까 말이다. 레겐스부르크의 위대한 통치자와 그의 초대로 함께한 귀족들 앞에서 연주한 이탈리아의 막간극은 많은 감동을 안겨줬었던 것 같다. 페르디난트 후작의 매부였던 브란덴부르크 바이로이트의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von Brandenburg-Bayreuth의 눈에 든 지롤라모는 브란덴부르크 바이로이트 궁정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딸과 합류한 완전한 본 가족은 이번 여정의 목적지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베네치아를 가득 채운 산뜻한 바다내음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이내 숲의 향기로 가득 차더니 바이로이트에 도착할 즈음에는 짙은 안개 내음이 가득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이로이트와 베를린,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와 같은 도시는 항상 안개로 가득하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본 가족은 궁정에 도착하자마자 예술가들에게 권할 수 있는 최고로 극진한 대접과 함께 궁전 고용인들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향하였다. 마침 작년부터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로 예술 여행을 다녀온 궁전의 주인이 다시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돌아았다고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프리드리히 3세와 그의 지혜로운 아내, 빌헤미네 폰 프로이센 Wilhelmine von Preußen은 본 가족이 도착했다는 대령과 함께 활짝 열린 거대한 두 문 뒤에 위엄 있게 앉아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베네치아에서 최고의 수업을 받은 안나는 그 웅장한 분위기에 주눅 들지 않고 우아하게 예법을 지키며 부모님과 이 후작 부부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드는 순간, 안나는 빌헤미네 후작의 눈과 마주치게 되었다. 안나보다는 조금 더 깊고 푸른 눈동자를 지닌 빌헤미네는 이전부터 아버지인 지롤라모의 자랑 속에 수도 없이 등장한 이 앳된 아이를 바라보며 중후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안나는 그 눈빛에 단숨에 알아차렸다. 자신과 비슷한 눈동자 속에 열정이 담긴 빌헤미네 후작은 어느 누구보다 깊이가 다른 진정한 음악가라는 것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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