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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네 Oct 01. 2022

소외된 여자들에게 쥐어준 음악

음악의 평등 정신을 알려준 베네치아 4개의 음악학교

그 건물의 한 편에는 아름다운 호선을 자랑하는 바로크 풍의 장식과 함께 오밀조밀하게 창살로 막든 여닫이문이 인장적인 한 작은 창이 달려있었다. 환기를 시키는 용도로 사용하기엔 무언가에 막혀 공기가 통하지 않으며, 안을 들여다보는 용도로 사용하기엔 너무나도 작은 창문. 창문이라기보단 무언가의 보관함으로 보이는 이 조그만 창 밑에는 돌로 새긴 라틴어의 명판이 이 창의 용도를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 주 하나님은 자녀를 버리는 자들에게 저주와 파문을 내리십니다.


오스페달레의 그 조그마한 창에는 항상 아기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정한 길거리에 버려져 죽음밖에 남지 않은 아기들을 구제하기 위해 병원에서 설치한 이 조그마한 창에 아기들이 점점 넘쳐날 즈음 병원에서는 이 고아들이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오스페달레의 한 편에 위치한 이 창은 바로 유기된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베이비 박스이다.


당시 26개의 교회 축제와 84개의 국가 행사가 넘쳐나는 베네치아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유럽의 새로운 음악 도시로 부상한 베네치아의 음악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베네치아는 이 아이들을 이용해 예술의 발전을 꾀하기로 결정하였다. 고아들을 예술가로 키우는데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베네치아는 매일매일 수많은 축제가 열리는 축제의 도시였으니까. 베네치아의 가장 큰 4개의 병원은 이윽고 버려진 여자아이들을 품은 고아원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음악이 필수적인 교회와 연계하여 이례적으로 소녀 합창단을 설립하며 ─비록 여자가 교회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교리를 지키기 위해 아이들을 보이지 않는 철장 뒤로 숨겼지만─여자 아이들에게 음악의 길을 열어주게 된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이례적인 여성 음악 학교, 베네치아에서 성행한 4개의 오스페달레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서양사 도처에 버려진 여성 음악가를 탐색할 때 베네치아의 오스페달레는 거대한 보물 상자와도 같다. 그들의 초상화 한 점은 불문하고 인생의 세세한 이야기조차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베네치아의 음악을 이끌어 나간 업적으로 인해 안나 본 디 베네치아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이 세상을 살아간 증거, 즉 그들의 이름이 오늘까지 남아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베네치아 오스페달레 출신의 가장 유명한 여성 음악가는 바로 안나 마리아 델라 피에타 Anna Maria della Pietà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가 남긴 업적보다는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한 붉은 머리 사제,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Vivaldi의 음악을 대중에게 전달한 전령사로 더 알려져 있지만 말이다. 고아이기 때문에 정확한 출생일을 알 수 없는 데다 자신의 뿌리인 성조차 알 수 없어 고아원의 이름을 자신의 성으로 삼은 이 여성은 그 누구보다도 음악에 훌륭한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잠재력은 불과 8세의 나이에 오스페달레를 이끌어 나가는 선생들은 물론 학교장까지 사로잡아 이 아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 지원 중 하나가 바로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 안토니오 비발디를 그의 개인 교사로 지명해 준 것이다.


비발디는 이 어린 여제자의 바이올린에 큰 감명을 받았던 걸까. 어느덧 비발디는 자신도 모르게 안나 마리아를 자신의 뮤즈로 삼아 그를 위한 아름다운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안나는 기쁘게 그 음악들을 받아들여 무대에 올라 그 누구도 소화시킬 수 없는 비발디의 음악을 유려하게 연주하였다고 한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한 시인은 안나 마리아의 연주회에서 접한 그의 바이올린 소리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천사가 감히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고.


마치 바이올린을 위해 지상에 강림한 천사와도 같은 이 여자는 바이올린의 거장의 칭호를 받은 24살부터 그 후 약 60년 동안 평생 음악만을 위해 살아갔다고 한다. 바이올린 이외에도 첼로, 오보에, 류트, 만돌린, 하프시코드와 같은 다양한 악기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린 이 여성은 베네치아의 음악의 예술적 경지를 한 차원 올린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 시인의 말대로, 그는 음악을 위해 세상에 내려온 천사였을지도 모르겠다.   




마달레나 라우라 롬바르디니 지르멘 Maddalena Laura Lombardini Sirmen


안나 본 디 베네치아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마달레나 라우라 롬바르디니 지르멘 Maddalena Laura Lombardini Sirmen 또한 빠질 수 없는 오스페달레 출신 여성 작곡가 중 한 명이다. 작곡가이자 가수, 그리고 뛰어난 바이올린 실력을 겸비한 이 여성은 한 귀족가의 딸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빈곤함에 허덕이는 부모는 일찍부터 딸의 음악적 역량을 알아보았음에도 그 역량을 키워줄 힘이 되어주지 못하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그 부부는 여성들에게 열린 그 음악 학교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렇게 어린 7살인 마달레나는 오스페달레 산 나자로 데이 멘디칸티에 입학하게 되었다. 


음악 학교에 발을 들인 마달레나는 당돌하게도 바이올린의 거장이되기를 희망하였다고 한다. 그의 희망은 결국 당대 최고의 기교를 가진 바이올리니스트, 주세페 타르티니 Giuseppe Tartini의 제자가 되어 오스페달레의 문지방을 넘어 타르티니가 있는 파도바로 매번 레슨을 받으러 세상으로 나가게 된 이례적인 학생이 되었다. 여느 학생과 다름없이 그 나이대의 실력을 가졌을 것이라 예상하며 심드렁하게 앉은 타르티니는 앞에 선 소녀가 활로 현을 한 번 긋는 순간 그 생각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져 버리게 되었다. 그날 이후 타르티니는 그 어느 제자보다 마달레나를 아끼게 되었다.   


타르티니는 자신의 애제자가 오스페달레에 매 번 지불해야 하는 수업료를 대신 전액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뿐이겠는가. 그는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능마저 이 아이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 바이올린이 속삭이는 은밀한 비밀을, 악마가 조종하는 극악스러운 기교들을 말이다. 세간에서는 타르티니의 이러한 모습에 사실 마달레나는 거장의 숨겨진 사생아가 아닐까 소문이 돌기도 하였지만 음악에 미친 이 두 사람에게 이런 소문은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타르티니의 모든 기술을 전수받은 아이는 21살이 되던 해, 바이올린의 거장의 칭호를 받으며 자신을 품어준 오스페달레를 떠나 세상이라는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 여성의 연주회는 항상 대호황이었다. 이 감상하기 힘든 연주회를 관람한 토리노 대성당의 음악 감독, 퀴리노 가스파리니 Quirino Gasparini는 잊기 힘든 그 감정을 이렇게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 여성의 연주는 토리노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나는 지난 토요일, 타르티니 영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이 학생이 그 누구보다 훌륭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으면 그 영감은 행복해질 것이다. 이 여성은 진정 타르티니의 후손이 틀림없다.


이후 이 여성은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남편, 루도비코 지르멘 Ludovico Sirmen와 결혼하며 더 넓은 세상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오스페달레 출신의 가장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그는 신혼여행으로 방문한 프랑스 파리에서 그가 직접 작곡한 이중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편과 함께 무대에서 직접 연주하였으며 런던에서 직접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데뷔하며 런던 인들의 아낌없는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음악을 전 유럽으로 전파시킨 가장 뛰어난 작곡가이자 연주자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제 주인께서 제 미약한 첫 번째 작품에 관용을 베풀어주신다면, 이 직업으로 인한 곤란함, 혹은 작곡가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는 세간의 비판으로부터 보호받을 것입니다.

안나 본 디 베네치아. 프리드리히 3세를 위해 작곡한 플루트 소나타의 전문 중


오스페달레에서 가장 어린 신동으로 이름 난 안나 본 디 베네치아가 남긴 서문을 통해 당시 여성 음악가들 앞에 선 커다란 벽을 느낄 수 있다. 프리드리히 3세의 이름을 빌려 '어린 여성 작곡가'라는 이유로  쏟아지는 불평등한 비판을 피하고자 자신의 첫 작품을 여는 서문에 안나의 고충이 은밀히 내비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유럽은, 베네치아 이 외에는 여성에게 음악의 문을 열어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심지어 가장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개신교마저 여성 음악가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는 일례만 보아도 여성 음악가들이 당하는 수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기에 베네치아의 오스페달레는 이 보수적인 시대에 더 특별한 존재로 다가온다. 어쩌면 베네치아 정부는 단지 수익성을 위해 여성들을 하나의 상품으로 여기고 음악의 문을 열어주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의도였건 이 기회는 역으로 여성 또한 남성 못지않은 뛰어난 음악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베네치아의 가장 소외된 고아 여자아이들은 음악과 함께 베네치아의 음악계를 은밀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또한 현재 알려져 있는 ‘오스페달레’라는 기관은 단지 안토니오 비발디가 교사로 활동한 공간이자 최초의 여성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수많은 명작을 남긴 공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야말로 오스페달레는 비발디만을 위한 공간인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베네치아에 존재한 4개의 오스페달레는 한 거장이 활동한 장소로만 알기엔 너무나 아쉬운 장소다. 비발디뿐만 아니라 베네치아의 음악을 움직인 수많은 여성들이 살아 숨 쉬던 곳. 그리고 음악의 본질 중 하나인 평등을 수호한 유럽의 유일한 음악 학교. 베네치아의 4개의 오스페달레는 바로 이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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