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차 대전의 뫼즈강
1917년
영화 ‘1917’(샘 멘데스 감독)은 관객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극적인 전개나 감동은 적지만 전쟁에 대한 거부감만큼은 어느 영화를 보았을 때 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를 본 느낌은 잔혹함 보다 참혹함에 더 가까웠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 해변 상륙신이 적나라했다면 ‘1917’은 전쟁의 민낯을 보다 충실히 재현해 냈다. 사실적이어서 더 충격적이었다.
1차 대전 서부전선의 파스샹달 전투를 배경으로 만든 ‘1917’은 롱테이크 기법을 사용해 관객을 전장 속으로 끌어들였다. 편집의 기교를 배재한 채 배우들과 함께 전쟁터를 달려가는 듯 생생한 느낌을 전달했다.
007시리즈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스카이폴’을 연출한 멘데스 감독의 작품으로 2020년 제 92회 아카데미에서 촬영상과 시각효과상, 음향효과상 등을 수상했다. 감독상과 작품상 후보에도 올랐으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밀렸다.
‘1917’은 ‘콰이강의 다리’(데이비드 린 감독), ‘디어헌터’(마이클 치미노 감독), ‘플래툰’(올리버 스톤 감독), ‘라이언 일병 구하기’(스티븐 스필버거 감독) 등과 함께 가장 잘 만들어진 5대 전쟁 영화로 손꼽힌다.
이 전쟁영화들의 밑바닥에 흐르는 공통 정서는 광기다. 인간은 조국을 위한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저지르기 힘든 잔혹 행위를 태연하게 저지른다. 제정신인 상태서 어떻게 목 베기 게임 같은 광기를 표출할 수 있을까.
실제로 있은 일이다. 일본군 장교 무카이와 노다 두 사람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난징에서 100명의 목을 누가 먼저 베느냐는 참담한 게임을 벌였다. 이 둘은 각각 106명과 105명을 살해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들의 만행을 스포츠 중계하듯 보도한 당시 일본 신문들이었다.
베르뎅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길고 많은 희생을 치른 전투로 남아 있다. -위키피디아
베르뎅 전투(1916년 2월-12월)는 광기의 끝판을 보여주었다. 약 10개월, 날짜로는 302일간 치러진 전투에서 독일과 프랑스군은 6천만 발이라는 어마어마한 포탄을 서로의 머리를 향해 쏟아 부었다. 베르뎅이라는 작은 지역에 날아든 숫자다.
프랑스 북부 뫼즈강에 위치한 베르뎅은 인구 1만 7000명의 역사적 도시다. 프랑크왕국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세 나라로 나눈 베르뎅 조약이 843년 이곳에서 체결됐다. 이 유서 깊은 도시는 20세기 초 비극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영화 ‘1917’에서 볼 수 있듯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진흙 더미 아래 파묻힌 시체들이 공중으로 치솟은 후 봄비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그 장면을 보고 온전한 정신을 붙잡고 있긴 힘들었을 것이다.
베르뎅 전투에 참가한 한 프랑스 장교는 “지옥도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없다.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미쳤다”고 일기에 남겼다.
베르뎅 전투 개전 첫 날 하루 양군은 100만 발의 포탄을 일시에 소모했다. 공업화로 인해 급격히 향상된 생산력은 살인이라는 장르로 특화됐다. 오만이 가져다 준 인재(人災)는 21세기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 재앙과 유사했다. 두 눈을 가린 이성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 지 보여준 참극이었다.
1차 대전은 근대와 현대의 분기점으로 일컬어진다. 개전 초기만 해도 마차는 여전히 군대의 수송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말 탄 기병들이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이들은 곧 탱크, 잠수함, 전투기, 독가스라는 새로운 무기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났다.
베르뎅 전투에서 사망한 독일과 프랑스 양군의 군인 수는 71만 4231명에 달한다. 부상자는 그 몇 배다. 10달 동안 매달 7만 여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꼬박꼬박 죽어나갔다. 한 달에 도시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그들의 생명과 맞바꿀 만큼 1차 대전은 결코 고상한 전쟁이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유럽인들을 광기로 몰아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