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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Apr 29.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 76

3. 1차 대전의 뫼즈 강

독일과 영국 

    

1984년 어느 날 두오몽 공동묘지에 당시 헬무트 콜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함께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전쟁 발발 70년만이었다. 1,2차 대전 전사자들을 합동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왜 이곳에서 전쟁을 벌였을까. 실제 콜의 아버지는 베르뎅 전투 참전용사였다. 미테랑은 2차 대전서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적 있었다. 비를 맞으며 그들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연합군과 동맹군 어느 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전공(戰功)에 목마른 장군들은 조바심을 냈고, 포탄과 총알은 무의미한 희생자 수를 늘려갔다. 죽음의 땅은 점차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규모 솜 공세는 독일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영불 연합군은 상당한 기동력을 발휘해 독일군 사령부를 놀라게 했다. 어쩔 수 없이 독일군 사령관은 베르뎅의 4개 사단을 급히 솜으로 파견해야만 했다. 솜이 무너지면 베르뎅도 도미노처럼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에서 슐리펜에 이르기까지 독일 전략가들의 고심은 한결 같았다. 전력의 분산을 최대한 피해라. 한 곳에 전력을 집중해서 먼저 부순 다음 다른 곳을 도모하라. 바로 적이었던 나폴레옹에게 호되게 당한 후 배운 전술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들의 구상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베르뎅에 발목이 잡혀 있던 독일군은 인근 솜에서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됐다. 솜 전투는 여러모로 베르뎅 전투와 닮은꼴이었다. 강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 모두에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솜과 베르뎅 전투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서부전선의 교착상태를 타파하기 위해 영국군은 처음으로 대규모 육군 공격을 계획했다. 영국 육군은 무려 60개 사단을 솜 강 전투에 투입시켰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은 10개 사단 가량이었다. 독일의 명백한 수적 열세였다. 


하지만 1916년 7월 1일 전투 개시 첫 날 영국 육군 사상 최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2만 여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5만 8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영국군은 육상에선 독일군에 우위를 보이지 못했다.  


4개월 여 1차 솜 전투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 51만 5000명, 독일군 65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솜 강 강물은 피로 물들여졌다. 2차 솜 전투 역시 양 측 합쳐 50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남겼다. 


영국군은 7월 15일 다시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이후 두 달간 무려 90차례나 일본 군대에서나 볼 수 있는 무모한 돌격을 감행했다. 하루 한 차례 이상의 파상 공격을 펼쳤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영국군은 고작 1㎞를 전진했다. 그 대가로 8만 여 명의 대영제국 젊은이를 잃어야 했다. 귀족과 명문가의 자재도 많이 포함됐다. 영국의 명문 이튼 고교 한 학교 졸업생만 2000여 명 1,2차 대전에서 희생됐다. 


막대한 병력 손실을 본 영국은 9월 15일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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